# 144
화산천검 6권(19화)
8장 흑풍의 본거지(2)
타다닥!
유혁 사형, 장일 사형과 동시에 빠른 손놀림으로 아혈과 마혈을 제압했다.
모든 여인들의 눈동자가 경악의 감정을 담았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기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들었죠? 사형들?]
[그래, 잘 들었다.]
유혁 사형과 장일 사형이 탁탁 몸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여야 할까?]
장일 사형이 물었다.
흑풍이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 상황.
하지만 반항할 수 없는 여인들을 죽인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에 물은 것이다.
[아니, 죽이면 소란스러워져. 방 안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계단을 찾아야한다. 시간이 필요해. 생기가 사라지면 그 노인이 알아챌 가능성이 높으니 차라리 혼혈을 짚어 놓는 것이 좋을 거다.]
유혁 사형의 말에 장일 사형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여인들의 혼혈을 짚었다.
눈이 감기는 것을 확인하고 구석에 눕혀 놓았다.
[자, 찾자.]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이며 방의 이곳저곳을 조사했다.
비단의 아래, 그림들의 사이사이, 벽면의 구석, 심지어 천장까지도 모두 뒤져 보았다만 어느 곳에서도 계단은커녕 수상한 것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지?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히 방 안에 삼 층으로 향하는 계단이나 통로, 기관이 있을 터인…… 잠깐, 저들의 말이 가짜라면?’
이 가능성을 빼먹었다.
저들이 정말로 진실만을 얘기할 것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나는 착각한 것이 아닐까?
두 사형에게 고개를 돌리자 두 사형도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이다.
‘어떡하지?’
가짜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지금 곧바로 이곳에서 도망쳐도 모자라는 상황이다.
‘그렇게 되면 기회가 없을 수도 있는데…….’
아니, 분명히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흑풍은 만만하지 않다.
지금의 이 잠입도 그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다시 한 번 찾아보는 방법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두 사형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 번 샅샅이 뒤졌다.
반 정도를 다시 뒤졌을 때, 기감에 무언가가 잡혔다.
공간이 불안정하다.
방금 전까지와는 무언가 다른 느낌.
달라진 것이 없으면서도 달라진 것만 같은 느낌.
‘그 노인이다!’
갑작스레 기감 속에서 이런 느낌이 생길 이유가 없었다.
분명히 나와 두 사형의 감각을 속이고 접근했던 그 노인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 노인이 왔습니다.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주의하십시오.]
나의 말에 두 사형이 동작을 멈추고 검을 뽑아 들었다.
휘이잉∼
닫힌 방 안인데도 한순간 바람 소리가 났다.
‘오른쪽! 유혁 사형이다!’
미약한 소리가 오른쪽에서 멎었다.
아직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절정을 넘어선 초절정의 은신술.
분명히 비정상적인 위화감이 느껴지지만 시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유혁 사형!”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 유혁 사형.
경호성을 내뱉자 유혁 사형이 눈을 빛내며 검을 휘둘렀다.
까가강!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생겨난 것만 같이 나타난 주름진 다섯 손가락.
유혁 사형의 검과 부딪치자 쇳소리가 났다.
“무슨…….”
유혁 사형의 기가 깃든 검과 부딪쳤건만 손가락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조공(爪功)의 고수인가?”
유혁 사형이 뒤로 몸을 빙글 돌리며 물러나자 노인이 어둠 속에서 스르르 몸을 드러냈다.
“호오∼ 대단하시군요. 제 은신을 눈치채는 사람이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하건만, 경호성을 내뱉었다고 바로 기습을 막아 내다니. 대도문에 이런 실력자라고는 장문인밖에 없을 텐데.”
“…….”
다음에 나올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도문의 사람이 아니다, 대체 누구냐?
장일 사형이 앞으로 달려가며 검을 휘둘렀다.
사아아∼
천지만물의 조화.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침이 없는, 자연스러운 움직임.
검으로서 도를 이루려 했던 검문의 장로, 조화검 도우화 장로의 무공.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어느새 노인의 목 언저리에 다다랐다.
“조화검이라, 화산파의 분이셨군요.”
스스스!
노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잔영이군. 빠르다.”
이형환위의 경지.
노인의 잔영이 사라짐과 동시에 노인의 본신이 장일 사형의 뒤에 나타났다.
쩌어엉!
틈을 파고드는 악랄한 손가락 사이로 유혁 사형의 검이 파고들었다.
“이쪽은 낙화검. 소문이 자자한 화산파의 두 꽃이로군요. 그렇다면 저쪽은 요즈음 명예를 드높이고 있는 화산의 검룡(劍龍)인 것 같구려.”
‘한 번에 알아보는군.’
단 두 수.
장일 사형의 횡 베기와 유혁 사형의 사선 베기 두 번으로 정체가 탄로 났다.
엄청난 안목.
게다가 더더욱 대단한 것은 범인보다 못한 미약한 내공으로 두 사형의 검을 막아 냈다는 것이다.
“외공의 고수인가?”
이것 외에는 답이 보이지 않았다.
“미안한 말입니다만, 아닙니다. 전 내가고수이지요.”
노인이 주름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사이한 웃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세 신룡의 명성이 천하에 드높은데, 이 비천한 노부가 실력을 감추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요.”
노인이 백회혈에 손가락을 댔다.
그리고 천천히 올라가는 손을 따라 백색의 침이 딸려 왔다.
“……!”
백회혈은 요혈이다.
상단전과 연관된, 뇌와 관련이 있는 가장 중요한 혈도 중 하나.
그런 자리에 침을 박아 넣다니.
무모하다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는 행위였다.
“이제 예의를 차릴 수 있는 상황이 되었군요.”
화아악∼!
방 안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기운.
금제를 하고 있었던 것인가?
침이 백회혈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갑작스레 경시할 수 없는, 방심하다가는 당할 수밖에 없는 절대자의 기도가 노인의 전신에서 드러났다.
“흑풍의 이인자(二人者), 혈조부(血爪父) 무삼(繆芟)이요.”
흑풍의 이인자.
‘일인자라고 한다면 사사도 초령, 그렇다면 이자가 초령 바로 아래의 강적이란 말인가?’
범인보다 못했던 기운을 가지고 있었고, 신법과 단단한 손가락만이 위협적이었던 노인.
갑작스레 우리가 사력을 다해야 할 만큼 강한 적으로 돌변했다.
“장일, 방심하지 마라. 힘에 부치면 협공도 불사해야 할 정도의 적이다.”
유혁 사형의 말에 혈조부 무삼이 음흉하게 웃었다.
“클클클, 합공을 하여도 상관은 없소이다.”
“무시하다간 큰코다칠 것이오.”
“후기지수라고 무시하진 않소이다. 그저 실력에 따른 자신감일 뿐.”
“…….”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그저 검을 나누고, 실력에 따른 승패가 결정 날 뿐.
“하압!”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는 검.
매화꽃잎 만천하에 휘날리니 그 화우(花雨)를 어떻게 피할 수 있으리?
콰앙! 콰아앙! 콰아아앙!
순식간에 끝내려는 듯 낙화검법의 날카로움과 현란함, 그리고 부드러움을 배제하고 패도적으로 기를 끌어모아 휘두르는 유혁 사형.
혈조부 무삼은 피하지 않고 손가락을 구부리고 조공의 형태로 검과 맞부딪쳤다.
“겨우 이것이 화산파의 신룡인 낙화검협의 실력이란 말이오? 클클클, 화산파도 많이 죽었군. 겨우 이 정도 후기지수가 신룡이라니.”
“놈!”
유혁 사형의 눈이 불길을 토했다.
콰앙! 쉬이익∼!
조공과 맞부딪친 후의 그 조그마한 틈 사이로 유혁 사형의 검이 파고들었다.
순간적으로 검의 속도를 올린 것이다.
이어서 유혁 사형의 검이 분열하듯 갈라져 상반신의 사혈과 요혈을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꽃잎이 바람에 휘날리듯 어떻게 움직이는지 짐작할 수가 없는 검로.
환(幻)의 요결과 쾌(快)의 요결이 적절히 분배된 초식.
낙화검법 오 초, 천변낙화(千變落花)였다.
“호오∼”
경탄의 감탄사를 발하며 혈조부 무삼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가볍게 휘둘렀건만 나타난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따다다다다다당!
전신을 가려 버릴 듯 분열하고 분열한 손가락들.
검막을 치듯 앞을 가려 버린 것으로 모자라 각 잔영이 살아 있는 듯 각자 다르게 움직이며 유혁 사형의 검로를 막아서며 검신을 때려 버렸다.
“……!”
유혁 사형조차 놀란 듯 다급히 검을 회수하며 뒤로 물러났다.
혈조부 무삼은 즐겁다는 듯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클클클, 오랜만에 즐거운 경험을 했군. 낙화검법의 천변낙화라. 과연 소이련 장로로군.”
“무슨 소리지?”
“네 사부인 낙화검과는 예전에 만나 본 적이 있다. 먼발치에서 보고만 있었기에 부딪쳐 보지는 못했고 견식을 하기만 해서 아쉬웠는데, 이렇게 부딪쳐 보니 무척이나 기뻐서 말이다.”
“그만큼 약했었다는 소리겠지.”
유혁 사형이 딱 잘라 말하자 혈조부 무삼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럼, 그럼.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다르지. 이제 그 정도 퇴물은 가볍게 상대할 수 있다.”
“헛소리.”
무심을 유지하려 하는 것 같지만 사부에 대한 모욕에 유혁 사형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어서 덤벼 보거라. 그 잘난 낙화검법을 파훼해 줄 터이니.”
“후회 말거라, 늙은이.”
어느새 장일 사형은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소이련 장로님과 그 검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장일 사형으로서는 끼어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콰앙!
그때, 뒤쪽에서 폭음과 함께 부서져 나간 문짝의 파편이 날아왔다.
살짝 고개를 젖히며 피해 내고 앞을 살폈다.
“크르르∼”
“화산파의 세 신룡. 살아서는 이곳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안의 상황을 다 파악한 것인지 바깥쪽에는 검은 복면과 검은 옷을 입은 많은 무인들과 흑철인 열다섯 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곤란하군.”
저 정도 전력이라면, 게다가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면 계단을 찾는 것은 힘들다.
분명히 위로 올라가는 것만이 흑풍의 본거지를 찾고 흔드는 것일 텐데.
“내가 막아 주마. 그동안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아라.”
장일 사형이 검을 늘어뜨리고 앞으로 걸어갔다.
“알겠습니다.”
장일 사형의 실력이라면 상처를 입기는 해도 저들을 모두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만만한 전력이 아닌 바, 빨리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아야 했다.
콰아아앙! 쩌정! 쿠우웅! 콰콰콰!
경천동지의 대결을 벌이고 있는 혈조부 무삼과 유혁 사형.
수적인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흑풍들과 흑철인들을 세차게 몰아치고 있는 장일 사형.
저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정말로 거짓을 말해 준 것이란 말인가?’
구석에서 곤히 자고 있는 여인들.
유혁 사형과 장일 사형이 되도록 저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싸움의 피해 반경을 조절하고 있기 때문인지 저들에겐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어서 빨리 올라가야 하는데…….’
더 이상 사형들을 피곤하게 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어떻게 하지?’
그때, 장일 사형의 검에 의해 날아온 흑철인 한 기가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