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검-143화 (143/175)

# 143

화산천검 6권(18화)

8장 흑풍의 본거지(1)

노인이 주름진 얼굴로 웃으며 검면에 손을 대어 검을 밀쳐 냈다.

스르릉∼

일단 검을 다시 집어넣기는 했지만 경계를 늦추진 않았다.

저 정도 은신술, 노인이 만약 숨어서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확실히 흑풍의 본거지인 것은 맞군.’

일개 홍루에 이 정도 수준의 인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자격을 보여 주시지요.”

밑도 끝도 없는 한마디 말.

유혁 사형이 알아들었는지 돈주머니를 노인에게 던져 주었다.

이곳에 올 자격.

돈을 말하는 것이었다.

노인이 돈주머니의 안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를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면 이제 목적을 말씀하시면 감사하겠소이다.”

“목적?”

장일 사형의 말에 노인이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할 말을 하고 싶은 것이요, 아니면 기분을 풀기 위해 온 것이요?”

‘비밀리에 회담을 한다면 우리들 빼고는 아무도 못 들어오겠지. 그러면 정보를 얻을 수가 없어.’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장일 사형이 곧바로 대답했다.

“기분을 풀기 위해 왔다.”

“허허, 이리로 오시지요.”

노인의 느긋한 발걸음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까의 모습을 보자니 실력이 뛰어나 보이는데……?”

노인이 운을 띄웠다.

“어느 소속인지 묻고 싶은 건가? 알 것 없을 터인데?”

“허허, 혼잣말일 뿐인데 예민하게 반응하시는구려.”

노인이 기분이 나쁘다는 듯한 유혁 사형의 말투에 능글맞게 대답했다.

‘의심하는 건가?’

노인이 흑풍의 소속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우리의 실력을 보고 정체를 확인하려 하는 것 같았다.

노인이 우리에게서 눈을 떼던 중, 유혁 사형의 검이 장포를 살짝 들추며 우승빈이 모방을 하여 만든 대도문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패가 보였다.

노인의 눈이 음흉하게 빛났다.

‘대단하군.’

일부러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정말로 우연찮게 검이 살짝 장포를 들추며 패의 모습을 보이게 한 것 같았다.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죽립을 눌러쓴 상태로 천천히 앞으로 걷는 유혁 사형.

아무리 저 노인이라고 해도 이 행동이 유혁 사형이 일부러 한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방인가?”

“그렇소이다. 그럼 편안히 즐기기를…….”

노인이 천천히 물러나 어둠 속에 스르르 몸을 감추었다.

‘칫.’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았는데도 어떻게 몸을 감추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기감으로 찾으려 해도 몸 안에 있는 기의 양이 보통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는 정도라 더욱 느끼기가 힘들었다.

‘우리가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 엿볼 수가 있다는 말인데.’

이렇게 이곳에서 회담을 하는 자들의 말을 엿듣거나 기녀들을 통해서 정보를 빼내는 것인 건가?

‘안 좋아.’

기감을 넓게 퍼뜨리면 안 된다.

방 안에 들어가 딱 방을 채울 만큼 기감을 퍼뜨려 밀도를 높여 위화감을 느끼기 쉽게 해야 했다.

[들어가자.]

장일 사형이 말하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유혁 사형도 따라서 들어갔다.

안은 화려했다.

비싸 보이는 푹신푹신한 비단이 바닥에 깔려 있고, 벽에는 금으로 화려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으며, 방의 중간에서 여인들이 탁자의 근처에 앉아 있었다.

탁자의 위에도 각종 안주와 산해진미, 그리고 명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음식은 갓 요리한 것인지 따끈따끈했고, 세상의 모든 안주란 안주는 다 모아 놓은 것인지 안주들의 종류는 셀 수가 없었으며, 칠대 명주를 비롯하여 각 지방의 유명한 술들이 다 자리하고 있었다.

‘그 돈을 다 가져가더니 과연…….’

유혁 사형이 노인에게 건네준 돈주머니의 안에는 일반 평민들은 물론이고 하급 관료들조차 절대로 모으기 힘들 정도의 돈이 들어 있었다.

그 돈을 다 가져가더니,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탁자의 앞으로 걸어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인들 중 몇몇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악기를 연주했고, 나머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방 안을 가득 메우는 선율의 향연, 아름다운 목소리와 춤.

넋을 놓고 보고, 듣고 싶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음공과 섭혼술이군.’

귓속을 파고 들어와 정신을 어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와 악기 소리, 가끔씩 눈을 떠서 나를 쳐다볼 때마다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 차리자.’

일반 사람들, 그리고 고수들이라고 할지라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은밀한 행동들이었다.

초령과 희월의 섭혼술과 사술을 느껴 보지 않았다면 나조차 넘어갔을 만큼.

방금까지만 해도 그토록 맑았던 두 사형의 눈동자가 풀려 가고 있었다.

초점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죽립 사이로 언뜻언뜻 보였다.

‘밀리고 있군.’

넘어가지 않으려 저항을 하지만 조금씩 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초점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주기가 계속해서 짧아지고, 이제는 거의 없어지려 하는 순간.

피핑!

약간의 내력을 담아 두 사형의 등허리를 향해 지풍을 쏘아 냈다.

순간 두 사형의 몸이 움찔하고, 이내 다시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두 사형이 내게 고맙다고 살짝 눈짓을 보냈다.

‘어떻게 나오는지 보아야겠군.’

섭혼술과 음공을 썼으니 우리에게서 어떠한 정보를 빼내려 한다는 것은 당연지사.

그렇다면 만약 그것이 통하지 않았고, 우리가 그 사술을 눈치챘다면 어떨까?

‘아니, 차라리 걸린 척하는 것이 나으려나?’

저들에게 당황을 주느냐, 아니면 저들의 의도에 넘어가 주는 척하면서 방심을 유도하느냐.

둘 모두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걸린 척한다. 저들의 물음에는 각자 알아서 임기응변으로 넘기고, 우리의 목적을 물어보았을 때 이 위층을 어떻게 올라가는지에 대해 물어본다. 적당히 방심하고 있다면 아마 넘어올 것이다.]

유혁 사형은 후자를 선택했다.

별 불만은 없기에 그 말에 따르기로 하였다.

이윽고 음악 소리와 가무가 끝이 나고, 여인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나긋나긋한 손동작으로 우리의 몸을 이끌었다.

쪼르르∼

은은하게 풍기는 주향.

“자, 드시지요.”

내 팔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앉아 있는 여인이 술을 나에게 권했다.

‘할 수 없군.’

섭혼술에 걸린 척해야 하니 마실 수밖에 없었다.

‘주정이야 어차피 배출할 수 있으니.’

마시긴 마시되 기로서 위의 가장자리에 모아 놓고 나중에 손가락 끝으로 빼내는 방법이 있다.

희월의 귀원장의 기운을 빼낸 것과 같은 원리.

하지만 정신력의 소모가 심해 되도록 쓰고 싶지 않은 기술이었다.

꿀꺽∼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가 뱃속에서 활활 불이 타듯 몸을 뜨겁게 만드는 술.

하지만 곧바로 내공으로 한쪽에 모아 두자 그 기분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머리가 아프군.’

술은 좋아하는 쪽이라기보다는 싫어하는 쪽에 속하는 나이다.

다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다고 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술을 마시면 머리가 띵하고 아파 오는 것이 술을 싫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연이어 반대쪽에 있는 여인이 술을 권하고, 옆에 있는 여인이 안주를 권하기를 여러 차례.

내가 걸렸다는 것을 확신했는지 두 여인이 미소를 짓고는 내게 살짝 몸을 맡겨 오며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몸이 탄탄하시고 굉장히 늠름하신 것이, 무림인 같아요.”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이 나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사천지방의 무인이신가요?”

‘이미 섭혼술에 걸렸다고 확신했을 텐데 또 섭혼술이라, 조심성이 넘치는군.’

이들을 속이려 하는 것이기에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대도문의 분이신가요?”

연이어 반대쪽의 여인이 물었다.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서 물어보던 여인이 내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그리고 허리춤에 있는 대도문의 패를 살짝 들어 보이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뻣뻣하게 계시는 건가요? 우리와 같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신가요?”

여인이 말하며 더욱 내게 몸을 안겨 오자 무진장 곤혹스러웠다.

‘웃.’

촉촉한 눈망울, 아름다운 외모, 달짝지근한 목소리와 무언가를 바라는 듯 살짝 벌어진 입술.

여인이 눈을 감더니 조금씩 내게 얼굴을 들이댔다.

‘어쩔 수 없나.’

속여야 하는 상황.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잠시의 달콤한 시간이 흐르고, 서로 입술을 떼었다.

‘조심성이 지나쳐.’

처음 하는 입맞춤.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설레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그 기분을 싹 날아가 버리게 한 여인이었다.

여인이 내 입속으로 무언가를 밀어 넣은 것이다.

혀가 지금도 따끔따끔했다.

독침.

게다가 그 종류도 내공을 흩어지게 만드는 산공독 종류였다.

미약한 양이라 별 티도 나지 않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많은 양의 내공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후훗.”

아름답게 웃으며 다시 술을 권하는 여인.

떨떠름하지만 다시 받아들여 내공으로 위의 한쪽에 모아 두었다.

“아무리 대도문이라곤 하지만 이곳에 올 정도시라면 높은 분이실 것 같은데, 실례지만 괜찮을까요?”

이제는 안심이 되었는지 본론으로 직행했다.

“…….”

주저주저하며 입술을 달싹달싹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자 여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말을 하기 주저한다면 섭혼술에 걸렸다고 해도 답하지 않을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여인의 가늘어졌던 눈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 반대쪽에 있는 여인이 내게 음식을 건넸다.

이렇게 계속해서 여인들의 물음과 나의 대답이 이어졌다.

가끔씩 다시 입맞춤과 함께 육탄공세와 같은 조금 곤혹스러운 행동들이 이어졌지만 잘 넘겼다.

‘산공독으로 배를 채우겠군.’

조금 오래 지난 시간.

계속해서 독침이 혀를 찔렀기에 미약한 양으로 시작한 산공독이 내공의 사분지 일 정도는 흩어지게 만들 정도의 양이 되었다.

‘거의 끝났군.’

이제 물어볼 만한 것들은 다 물어보았다.

마지막 한 가지만이 남은 상황.

그것이 지금까지의 상황을 버텨 온 이유이다.

“이곳에 온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지요?”

여인의 눈이 어두움으로 빛났다.

기다려 온 마지막 질문은 이것.

아직 두 사형에게는 이 질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첫 번째이자 마지막 순서.

“삼 층으로 올라가고 싶어서 왔소.”

그동안 대답에 있어서 이곳으로 온 목적에 무언가 있다는 듯한 말투로 얘기를 해 왔다.

여인들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다는 듯이 말이다.

결국 여인은 미끼를 물었고,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호호호, 삼 층부터는 저희의 관할이 아니랍니다.”

“계단이 보이지 않던데?”

궁금하다는 듯 묻자 여인이 방심했는지, 아니면 어차피 기억 못 할 것이라고 확신했는지 곧바로 대답했다.

“각 방마다 숨겨진 계단이 있답니다. 물론 저희는 모르지만요.”

여인의 대답이 끝나고, 살짝 침묵이 감돌았다.

주저리주저리 물어오던 두 여인이 살짝 의아해하는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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