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화산천검 6권(7화)
3장 만나다(2)
‘큭.’
칠사도 희월과는 다르다.
희월이 억지로 남자들을 끌어들이려는 듯한 몸짓을 하고 있는 것 같다면, 이 여자는 그런 마음을 먹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남자들이 다가올 법한 그런 느낌이었다.
진정 경국지색이라고 할 정도의 미모.
“오랜만이구나, 꼬마야.”
맑지만 끈적끈적한, 이상한 느낌의 목소리.
저번과 같다.
끓어오르는 가슴속의 무언가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사사도 초령…….”
“귀엽게 보고 있던 꼬마가 이렇게 성장하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야.”
대견하다는 듯한 느낌의 말.
이번에는 다른 느낌으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위에서 가만히 있던 주제에…… 무엇하러 내려왔지?”
중간에 가슴이 찢어질 듯한 통증에 입술을 깨물었다가 이어서 말했다.
“몸이 좋지 않다면 억지로 얘기할 필요 없어. 어차피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으니 말이야.”
입꼬리를 살짝 더 말아 올리면서 다가오는 초령.
사라락∼
바람을 따라 긴 생머리가 공중을 유영하고, 풍겨 나오는 사향 냄새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잘 참는구나. 그래, 그 정도는 돼야 신룡이라고 불릴 만하지.”
이번엔 나를 향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삐딱하게 고개를 돌려 북초이에게 말한 것이다.
북초이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심령을 제압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만든다.
극에 이른 섭혼술과 사술.
이 정도라면 일가를 이뤘다 할 수 있을 정도였다.
“…….”
찢겨진 옷 사이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붉은 반점.
독이다.
아직 풀리지 않았다.
독을 막고 해독하고 있어야 할 진기가 정신을 혼란스럽게 어지럽히는 사술을 막느라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죽어도 상관은 없지만, 눈앞에서 피를 보기는 그러니까 살려 주지.”
휘익∼ 툭!
공중을 유영한 검은색의 동그란 무언가가 북초이의 앞에 떨어졌다.
북초이가 핏발 선 눈으로 초령과 동그란 무언가를 번갈아 보았다.
“갈천악, 혈마강시의 독에 중독된 것 같은데, 전문적으로 만들어진 해독제야. 하나로는 완벽히 해독하지 못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여자다.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했던 말도 그렇고, 자하검을 준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혈천회의 사도인지, 아니면 우리 쪽을 도와주려고 하는 것인지 행동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다.
초령이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물기에 젖은 새까만 눈동자가 내 얼굴로부터 천천히 내려와 옆구리 쪽의 자하검에 닿았다.
“잘 가지고 다니네. 역시나 잘 맞나 봐?”
사뿐사뿐 걸어와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 초령.
저번과 무척이나 비슷한 상황이다.
“이 손 치우시오.”
“어머, 기분 좋으면서 왜 그럴까?”
스르륵 옷을 타고 내려오는 새하얀 손가락.
움직일 수 없는 몸, 반항할 수 없는 몸을 가지고 노는 초령.
기분이 나빠진다.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탁!
어깨가 찢어질 듯한 통증을 억누르며 손을 치웠다.
“치우라고 했소.”
꿈틀꿈틀 감정에 따라 부글부글 끓는 진기.
고통도 잊을 만큼, 강렬한 느낌이었다.
“그래. 나도 장난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니까.”
스치듯 지나가 빙글 몸을 돌린다.
“무엇하러 내려왔냐고 처음에 물었소.”
아직 답을 하지 않았다.
우릴 죽이러 온 것인가, 대화를 하러 온 것인가.
답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그렇게 급할 것 없어. 네 생각쯤이야 훤히 아니까. 장단을 맞춰 줄 뿐이지, 네가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알아챘다.
게다가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무언가 있는 듯했다.
“내가 너희를 죽이러 왔다면야, 뭐, 선천지기라도 끌어내서 죽더라도 시간을 끌 예정이었겠지. 그리고 내가 대화를 하러 내려왔다면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라도 시간을 끌다가 바깥에 있는 점창파와 해남파의 무인들이 이곳으로 진입할 시간을 벌 예정이었을 테고.”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정확한 발언이다.
“전자는 무리야. 선천지기를 끌어내 봤자 정신적인 피로와 육체적인 피로가 겹쳐져 있는 너희는 내 사술을 막을 수가 없거든. 그리고 후자는 더욱더 무리야. 왜 그런지 알아?”
등 뒤에서 천천히 다가와 귓가에 입을 대는 초령.
후욱∼
귓가를 간질이는 숨결에 뱀이 몸을 타고 오르는 듯한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밖은 이미 회의 창마대(槍魔隊)에 포위된 지 오래거든.”
“……뭐?”
창마.
그리고 대라는 말과 포위라는 말이 들렸다.
“쿡쿡, 너로서는 아주 재미있는 이름일 거야.”
다시 몸을 빙글 돌리며 나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초령.
“창.마.대. 혈천회 삼대호법 중 창마의 직속 호위대.”
한 글자 한 글자 강조하며 말하는 초령.
초령의 눈동자에 스산한 살기가 감돌고, 나도 모르는 새 저절로 주먹이 올라갔다.
까앙!
공간을 울리는 쇳소리.
초령의 손아귀에는 어느샌가 섭선이 들려 있었고, 그 섭선과 내 주먹이 맞닿아 있었다.
“창마…… 라고 했겠다?”
고통이 없다.
아직 완벽하지 못한 기술을 써서 몸이 버티지 못하고 있는 고통, 금속과 내공이 미약하게 담긴 주먹이 맞닿음으로 생긴 고통.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가 새하얗다.
눈앞이 흐려진다.
초령의 모습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창마 황신의 모습으로 변해 간다.
“황신!!”
내공이 요동친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불같은 분노.
눈앞에 보이는 황신.
쓰러뜨린다.
공명을 탐하였다? 이름을 알리지 못해 아쉬웠다?
하, 헛소리다.
이제야 알았다.
그런 감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만, 지금의 이 감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감정이었을 뿐이다.
이 불타오르는 분노를, 증오를, 살의를 어떻게 그런 하찮은 감정으로 지울 수가 있단 말인가?
느끼지 못했을 뿐, 드러나지 않았을 뿐.
증오는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고 깊어져 그것이 아예 사라진 듯 보였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이 상황을 뭐라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정신 차려.”
싸늘한 목소리.
짝!
“윽!”
볼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진다.
느껴지지 않던 고통이, 흐려져 황신의 얼굴만이 남았던 눈앞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폭주하듯 온몸을 타고 돌던 내공이 점점 가라앉고, 하얗게 표백되었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후우∼”
너무 심한 반응이었다.
지금의 내 상황은 위험하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상황.
그저 한순간의 분노에 몸을 맡긴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냉정하게 판단해도 모자랄 판이다.
“아주 좋은 살의야. 그 정도는 되어 줘야지. 하지만 아직 자신을 완벽히 제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미숙해.”
할 말은 없다.
앞의 말은 제하더라도 뒤의 말은 맞는 말이니.
“창마대는 운가장을 포위했고, 너희 쪽에선 더 이상 지원군이 없어. 어때, 재밌는 상황이지 않니?”
“…….”
아직 남아 있는 분노의 잔재.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너와 회의 악연의 원인, 네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창마가 이곳에 있어. 어때, 당장 나가서 싸우고 싶지 않아?”
즐겁다는 듯한 말투.
하지만 어째서일까?
창마를 언급하는 초령도 왠지 모르겠지만 살의를 품고 있었다.
“알려지지 않았던 화산의 신룡, 그리고 점창파와 해남파의 신룡이 일사도와 칠사도를 죽이고 뼈를 묻다. 얼마나 감동적이니? 아마 무림맹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질걸?”
“누구도 그런 것은 원치 않소.”
북초이가 싸늘히 내뱉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일으킨 북초이.
“안 먹었어? 먹는 것이 좋을 텐데?”
“적의 호의, 그것도 혈천회 사도의 갑작스런 호의를 받아들일 만큼 어리석진 않소.”
“쿡쿡, 찔리지 않아?”
북초이의 말.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적인데도, 무언가를 주면 계속해서 받았다.
특히나 자하검.
적이 준 물건인데도, 그냥 주는 대로 받아서 계속해서 써 왔다.
그런데, 그렇다고 부끄러운가?
아니, 아니다.
어째서일까?
어떤 것이든 이용한다는 뜻에서였을까?
아니면 그만큼 순수했다는 얘기일까?
답은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는 결론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되지만.
“그럼 거기서 그냥 죽게? 혈마강시의 독을 해독시켜 준다는 말은 맞으니 그냥 먹도록 해.”
“부작용은?”
“뭐?”
“부작용이 없다곤 얘기하지 않지 않았소?”
“…….”
딱딱하게 굳는 얼굴.
하지만 이내, 처음과 마찬가지로 은은한 웃음을 띤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만일 없더라도 그 사이에 공격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소. 믿을 이유가 없지.”
“그래, 맞는 말이야. 믿지 않겠다는데 내가 할 말은 없지.”
작게 한숨을 내쉬곤 초령이 또다시 몸을 돌렸다.
“자, 그럼 이제 결론을 맺자.”
사뿐사뿐 걸어가 타고 내려온 계단에 선 초령.
내려다보는 오만한 눈동자로 차갑게 말했다.
“이곳에서 죽을래, 아니면 바깥에서 죽을래?”
사사삭!
조그마한 동물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
하지만 절대 그런 동물의 소리가 아니다.
잘 갈무리했지만 미약하게 퍼져 나오는 기파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스스슥!
모습을 드러내는 남자들.
“흑풍이야. 몇 번 본 적이 있을 거야.”
나타난 흑풍의 수는 열다섯.
지금으로서는 많은 수다.
초령을 상대하기는커녕 이들을 상대하기도 벅차다.
“첫 번째 선택지, 나에게 죽는 것.”
초령이 검지를 들어 올렸다.
“두 번째 선택지, 이곳에선 무사하겠지만 바깥으로 나가서 창마대, 아니면 원수인 창마에게 죽는 것.”
이어서 초령이 중지를 들어 올렸다.
모두가 죽는 것으로 끝나는 선택지다.
‘두 선택지 중에서 살아날 가능성이 높은 쪽은?’
첫 번째는 나와 북초이 대 열다섯 흑영과 사사도.
두 번째는 점창파와 해남파의 무인들, 그리고 나와 북초이 대 창마대와 창마.
‘일단 두 번째를 선택했다 치자. 이곳에서 나갈 때까지는 건드리지 않는다 해도 바깥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모른다.’
“난 별로 싸우고 싶은 생각 없어. 피를 보기 싫거든. 나가서 죽겠다면 그 후론 관여하지 않아.”
초령의 말.
그렇다면 가능성은 반반이다.
상처 입은 두 신룡 대 흑풍과 사사도.
점창파와 해남파의 무인들과 상처 입은 두 신룡 대 혈천회의 호법인 창마와 그의 친위대 창마대.
둘 다 부담스런 선택지다.
어떻게,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까?
“흐음, 재밌는 말을 하고 있네.”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모를 목소리.
새로운 적의 등장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익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