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화산천검 6권(6화)
2장 혈마강시(4)
“크르르…….”
어깨에서 비산하는 탁한 독은 이내 혈무가 되어 갈천악의 몸을 감싸듯 뒤덮었다.
움직일 새도 없었다.
단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문기!!”
북초이가 크게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멈춰야 돼!’
남문기가 순식간에 당했다.
남문기보다 더욱 심하게 다쳤던 북초이로서는 당연히 버텨 낼 수가 없었다.
바보같이 멍청이 있다가 눈앞에서 누군가가 허망하게 죽는 것을 보는 것은 이번 한 번으로 족하다.
바깥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 해남파와 점창파의 무인들과 기다리고 있을 무림맹 내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북초이까지 쓰러지게 할 순 없었다.
마음을 다잡았다.
공명을 탐한다? 복수심으로 움직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부질없는 이유일 뿐이다.
갈천악을 쓰러뜨리고, 북초이와 남문기를 살리고, 위층에 있다고 하는 사사도 초령을 쓰러뜨릴 뿐이다!
화아아∼
그윽하게 퍼져 나가는 매화 향기.
자하십육검 십오 검.
동시에 진입하는 상승의 영역.
그윽한 향기에 몸과 마음이 맑아지고, 기의 흐름이 잡힐 듯 눈앞에 보였다.
갈천악의 왼손 수도에 강물과도 같은 기가 모였다.
이내 빠르지만, 내 눈엔 천천히 보이도록 갈천악의 수도가 움직였다.
천천히 궤도를 따라 앞으로 분사되는 수도의 기운.
기의 파장이 일렁이며 뻗어나가 북초이의 검과 부딪쳤다.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는 기운들.
벽력탄이 폭발하듯 터져나가는 기운에 버티지 못한 것은 북초이뿐이다.
갈천악은 몸을 피하지도 않고 터져 나가는 기운 사이를 통과하여 달려 나갔다.
손 안에 쥐고 있는 검이 느껴진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맥동하는 검이 느껴진다.
진정한 검이란 무엇일까?
손 안에 느껴지는 차가운 검이 진짜일까, 마음속에서 맥동하는 뜨거운 검이 진짜일까?
손 안의 검과 몸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검이 바로 내 손이며, 내가 바로 검이다.
신(身)과 검(劍)의 합일(合一).
기운이 내 몸의 혈도를 타고 움직이는 양 자연스럽게 검 안에 흘러 들어간다.
차가운 검신으로 느껴지는 감각들이 자연스레 읽혀졌다.
이어서 마음속의 검이 더욱더 빠르게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두근! 두근!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맥동하고, 마음속의 검이 가슴을 뚫고 나올 듯 거세게 진동한다.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흐렸던 형상이 점점 뚜렷해지고, 마침내 빛을 발했을 때!
보였다.
닳고 닳아 이가 나가고 녹이 슬었으나, 모든 것을 잘라 버릴 듯이 풍겨 나오는 서늘한 예기와 지독하게 뿜어내는 살기만큼은 그 어떤 것과도 비견될 수 없는 검이.
부러질 듯 부러지지 않을 듯 위태로운 경계 속을 걷는 고검(古劍).
움직여 휘둘러지고 베는 것으로 자신을 단단하게 연마하는 찬란한 신검(神劍).
마음을 쉴 곳을 찾지 못하고 고독하게 빛을 뿜어내는, 칼집 없이 존재하는 고검(孤劍).
이것이 내가 벼리고 벼린, 지금까지 키워 온 나만의 검이다.
마음의 검, 심검(心劍).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나 외엔 누구도 갖지 못하는 이중적인 검.
병장기와 몸의 경계가, 마음과 몸의 경계가 한꺼번에 허물어지며 순간 모든 것이든 해낼 수 있을 법한 자신감이 끓어올랐다.
많은 것을 느꼈지만, 갈천악의 모습은 방금 전보다 미세하게 앞에 있는 것일 뿐이었다.
지금 이 공간의 시간은 나의 것.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절대의 영역이다.
검을 움직인다, 아니 몸을 움직인다, 아니 마음을 움직인다.
무엇이든 관계없다.
지금 움직이고 있는 것이 바로 나다.
콰아아아아앙!
몽롱한 느낌.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은, 하늘을 노닐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갈천악이 북초이에게 닿기 전에 움직였을 뿐이다.
그것으로, 싸움이 끝이 났다.
3장 만나다(1)
“…….”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다.
팔을 들어 올리려 생각하는데 무거운 무엇인가를 들어 올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발을 움직이려 하는데 커다란 중압감이 발을 짓누르며 미동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고개를 돌리려 하는데 우악스런 손이 목과 볼을 붙잡고 있기라도 한 양 숨이 막히고 고통스러웠다.
결국 움직이려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눈앞을 보았다.
갈천악.
남궁세가에서 죽고, 혈마강시로 되살아난 자.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있어야 한다.
아무리 원한이 있어도, 그리워도, 미련이 남아도 순리를 거스르려 하면 안 되는 법이다.
순리를 거스른 자의 최후.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 갈천악의 눈은 공허했다.
초점이 없었다.
영혼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양 인형처럼 눈을 뜨고 있을 뿐이었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갈천악의 수도 바로 앞에서 목울대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북초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목이 날아갔을 상황이었다.
탱그랑! 털썩!
검은 놓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을 텐데도.
북초이는 사문의 보물이라는 사일검을 바닥에 떨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급하게 숨을 몰아쉬는 북초이.
얼마 지나지 않아 숨소리가 잦아들고 북초이가 안정된 호흡을 되찾았다.
“죽은…… 건가? 아니, 죽인 건가?”
북초이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미동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언가가 짓누르는 듯한 기이한 느낌에 싸여 있는 나.
말을 할 수가 없어 힘을 쥐어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군. 결국 죽인 거로군.”
조금은 허망한, 조금은 허탈한, 조금은 시원한 감정을 담고 말을 내뱉는 북초이.
“아, 남문기!”
이제야 생각이 난 것인지.
북초이는 갈천악, 멈춰 있는 시체의 옆을 지나쳐 남문기에게 빠르게 달려갔다.
북초이는 다가가자마자 바로 남문기의 손목을 들어 올려 맥을 짚었다.
눈을 감고 얼마간 그렇게 있던 북초이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후∼ 다행이다. 죽진 않았군.”
북초이가 뒤적뒤적 피에 절은 손으로 품속을 뒤지더니 작은 함을 꺼냈다.
그리곤 남문기의 몸을 들어서 벽에 기대게 하곤 입을 벌려 함 안에 잠들어 있던 단약을 꺼내 입안에 밀어 넣었다.
품속 깊이 갈무리하고 있던 것인 만큼 뛰어난 효능의 단약이겠지.
북초이는 이젠 괜찮다는 듯 미련 없이 몸을 일으키고 나에게 다가왔다.
“왜 그렇게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거야? 어이, 이봐?”
눈가가 퀭하고 눈동자의 정광이 희미하다.
자신도 몸이 좋지 않을 텐데 피에 절은 몸으로 나를 살피는 북초이.
“……올라가자.”
“뭐?”
미약한 목소리.
제대로 듣지 않고 있던 북초이가 되물었다.
천천히 운기를 하고 있던 덕분인지 막혀 있던 혈들이 뚫리면서 몸이 점점 회복되고 안정되어 갔다.
물론 평소에 비하자면 조족지혈이지만.
“갈천악을 쓰러뜨렸지만…… 아직 사사도가 남아 있소.”
말을 하던 중간 뱃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올라오는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가 꿀꺽 삼키곤 말을 이었다.
입술 사이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많이 다쳤잖소? 그리고 나도 남문기도 몸이 정상이 아니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다.
사사도.
그 무공의 수위가 칠사도 중 네 번째로 강하다는 소리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싸웠던 사도, 칠사도조차 실력을 감추고 있었는데도 우승빈의 말로는 오사도 정도의 수준이랬다.
그렇다면 사사도 초령은 얼마나 강할 것인가?
갈천악보다는 약하겠지만 만만한 상대가 아닐 것이다.
일반 무인들조차 이겨 내기 힘든 지금의 상세로는 사사도에게 간다는 것 자체가 바로 죽고 싶다는 얘기와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가야 하오.”
그렇다고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갈천악이 죽고 싸움의 굉음이 멈추었다.
기와 기의 충돌이 멈추었는데 어떻게든 승부가 났다는 것을 사사도가 모를 리가 없다.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는지 보기 위해서라도 이리로 내려오거나 아니면 내려오지 않고 잠시 상황을 살필 것이다.
이리로 내려온다면 방법이 없다.
지금까지의 사도들의 말로 예상해 볼 때 내가 죽을 가능성이 낮긴 하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목숨을 구걸 받는 것도 추하다.
반대로 그곳에서 잠시 상황을 살핀다면 노리던 바다.
바깥에서의 싸움.
진법, 사술? 모르겠다만 아무튼 이 건물에 펼쳐진 그것으로 인해 바깥의 상황은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든, 사도가 하나라도 더 나타나지 않는 이상 해남파와 점창파의 무인들이 질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시간을 끌수록 우리가 이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내가 안 된다면 남이.
내가 지더라도 바깥에 있는 모두가 달려든다면 남궁세가에서의 갈천악과 마찬가지로 이길 가능성이 높았다.
시간이 핵심이다.
사사도 초령은 말이 통할 가능성이 높았다.
대화로 시간을 끌어야 한다.
어떤 주제로 끌어야 할지는 모르겠…….
끼이익∼ 끼이익∼
들려온다.
우리를 죽일 수도, 우리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는 사신의 발걸음 소리가.
끼이익∼ 끼이익∼
기와 기의 커다란 충돌에 의해 무너질 듯이 위태위태한 계단을 딛고서 한 발 한 발 내려오는 여자.
숨이 막힐 듯하다.
사사도, 초령.
나이를 먹고 더욱더 요염해지고 아름다워진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턱 하고 막혔다.
“무…….”
말을 하려던 북초이조차 입을 다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턱!
계단을 밟고 내려와 바닥을 딛고 선 여인.
옷은 저번에 만났을 때와 비슷하다.
가슴이 푹 파이고, 새하얀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옷.
하지만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 봉황 무늬가 자수되어 있다는 것과, 지금이라도 불타오를 듯한 새빨간 붉은색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오뚝하게 솟은 코, 도톰한 새빨간 입술, 만지면 묻어 나올 듯한 새하얀 피부.
이지적으로, 도발적으로 휘어진 눈썹과 살짝 말려 올라간 입술 끝이 더욱더 농염해진 색기와 요기를 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