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화산천검 5권(24화)
10장 칠사도 희월(2)
“그렇게 싸늘하게 말하면 상처받아. 령 언니가 관심 갖고 있는 남자인데 내가 화나서 상처 입힐 순 없잖아?”
“령?”
“어머, 모르는 거야? 만나 본 적도 있잖아. 이 안에서 오매불망 널 기다리고 있다고?”
‘초령을 말하는 거군.’
“헛소리.”
“진짜야. 네가 사라지고 나서 반년 동안 언니가 얼마나 가슴 아파 했는지 알아? 내가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고.”
“가슴이 아프다면서 하는 그 몸짓은 대체 무엇을 표현하는 건지 모르겠소.”
야릇한 몸짓을 하는 희월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 이것도 너무 오랫동안 하다 보니까 버릇이 됐나 봐.”
하지만 빈틈은 없다.
희월은 자신의 주변 공간을 지배하는 듯했다.
이 상태로 있다가는 회복을 할 시간을 주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터엉!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매화천락이겠지? 난 흑영을 조직하고 지배한 사람이야.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하십육검 육 검.
“응? 꺄악!”
희월이 취한 움직임은 매화검로의 매화천락을 최소한의 피해로 방어하는 움직임이다.
하지만 매화의 형을 버린 진정한 자하십육검은 더 이상 매화검로가 아니다.
콰콰콰쾅!
땅을 커다란 삽으로 파 버린 듯한 구덩이들.
그 사이에서 희월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승빈이 말했던 대로군.’
예전의 육사도 혁련월도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얻어맞을 공격이었는데 희월은 피했다.
물론 모두 다 피한 것은 아니지만 흘릴 것은 흘리고 피할 것은 피하면서 최소한의 피해로 피한 것이다.
“아아, 정말. 령 언니가 관심을 갖고 있는 남자라 봐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싸움에 집중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우승빈과의 싸움에서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을 텐데 저런 여유라니.
오만하다 할 수 있었다.
“조금은 버릇을 고쳐 놓는 것도 좋겠지.”
희월의 눈이 사이하게 번뜩였다.
세계가 돈다.
하늘과 땅이 원을 그리며 천천히 돌아 자리를 뒤바꾼다.
사람이 사라지고, 나무가 사라지고, 풀이 사라지고, 하늘과 땅이 합쳐진다.
그 사이에 서서 그 혼돈에 몸이 끼여 사라져 간다.
“합!”
크게 소리치며 정신을 집중했다.
환술일 뿐이다.
정종 무공과 심법을 익힌 나에게는 잔재주일 뿐이다.
‘대단하군.’
사부에게 조금의 도술을 배웠고, 정종의 무공과 심법을 익힌 나에게 조금이나마 환술을 건 것은 무척이나 대단한 일이었다.
희월은 이미 사라졌다.
내가 환술에 걸린 시간은 눈 깜빡일 시간 정도다.
그 시간에 몸을 감추고 기척을 감춘 것이다.
‘위? 아래? 오른쪽? 왼쪽?’
기감의 범위를 좁히며 더욱더 정신을 집중한다.
공간을 점하고 있는 기의 실은 넓고 얇은 것이 아니라 좁고 굵게.
‘오른쪽!’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장천수 승의 묘리를 담고 검을 위로 올려쳤다.
까앙!
검과 맞부딪친 비수가 하늘 높이 튕겨 나갔다.
“역시 피했네.”
방금 전과는 다르게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싸늘히 말하며 희월이 다시 몸을 숨겼다.
몸을 숨기는 것이 너무나 빨라 검을 휘두르지도 못했다.
‘아니, 휘두를 수 있다.’
다음번을 잡으면 휘두를 수 있다.
희월이 빠르다고는 하지만 내 자하십육검 일 검은 극쾌다.
극성으로 전개한다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갑자기 두 개의 커다란 기운이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두 기운이 맞부딪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핏빛의 두 바람이 싸늘한 월광 아래 서로 맞부딪치고 있었다.
우승빈의 뒤에는 흑영들이 쓰러져 있었다.
“치잇, 어서 돕지 않고 뭐하는 거야!”
우승빈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촤악!
희월의 비수가 우승빈의 왼쪽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다.
분수와도 같이 솟아오르는 그 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청운검을 내던지고 암향표 신법을 극성으로 발휘하며 달려갔다.
비수와 비수를 맞부딪치던 희월이 입술을 깨물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소용없다.’
몸을 띄우며 손을 내민 후 검을 쥐듯이 모으고 오른쪽으로 그었다.
“뭐?”
날아가던 청운검이 그에 맞춰 오른쪽으로 희월을 베어 갔다.
스걱!
드러난 새하얀 복부를 가르고 청운검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핫!”
두 손으로 청운검의 검병을 쥐고 희월의 정수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쾅!
오른쪽 발을 반보 뒤로 옮기며 허리를 젖혀 피한 희월.
희월이 발로 검첨을 누르며 사나운 얼굴로 장을 내쳤다.
어두운 기운이 휘몰아치는 장.
오른손을 청운검에서 놓으며 발검.
파앙!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아깝네. 머리를 터뜨릴 수 있었는데.”
타다닥!
복부의 혈을 점해 지혈을 하며 희월이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검을 납검하며 말했다.
“이만 포기하는 것이 어떻소? 그 정도 상처라면 피가 부족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
혈을 점해 지혈을 해도 피는 나온다.
그것이 극단적으로 줄어들 뿐이지 혈을 점하는 지혈은 완벽한 지혈이 아니다.
이미 오랜 시간 피를 흘린 희월이라면 과다출혈로 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빈혈과 같은 증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머, 그 정도로 죽으면 칠사도라는 이름이 아깝지. 죽어 간 부하들 복수라도 해 줘야 하지 않겠니?”
“아줌마한텐 도구일 뿐일 텐데?”
곧 죽어도 깐죽깐죽.
우승빈의 말에 희월이 눈을 부라렸다.
“네놈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것이냐?”
“아님 말고. 왜?”
능글맞은 우승빈의 말에 희월이 품속에 손을 넣더니 이내 출수했다.
날아오는 세침과 유엽비도.
“실력도 좋은 아줌마가 왜 기습인지 몰라?”
우승빈이 입술 사이로 피를 주르륵 흘리며 은사를 뿜었다.
따다다당!
가늘고 긴 은사.
정교한 손놀림과 깃들어 있는 커다란 내력으로 암기들을 막아 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위험하다.’
우승빈은 이제 한계다.
내공이 거의 바닥이 난 듯 우승빈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꼬마야, 이제 끝인가 본데? 무릎 꿇고 살려 달라고 빌면 특별히 고통 없이 죽여 줄게.”
“필요 없어. 난 복상사가 꿈이야.”
“말장난을!”
파앙!
공기가 진동할 정도의 쾌속의 질주.
하지만 희월이 쾌속이라면 나는 극쾌다.
왼손으로 자하검의 검집을 잡고, 오른손으로 검병을 잡으며 기를 끌어모은다.
부풀어 올라 검집이 터져 나갈 듯이 떨어 대는 자하검.
절정에 올랐을 때, 검을 뽑았다.
자하십육검 일 검.
혈천회 일사도의 극쾌.
그것과 비교될 만한 신속의 발검이 희월의 팔을 베어 갔다.
촤아악!
“치잇! 방해하지 말라고!”
짜증을 터뜨리며 희월이 멈추지 않고 우승빈을 베어 갔다.
“아아, 이젠 무리야. 마지막 한 방 날리고 난 갈랜다.”
한탄하듯 말하며 우승빈이 신기의 움직임을 보였다.
‘……!’
사라졌다.
어딘가로 이동한 것이 아니다.
기척을 숨긴 것도 아니다.
정말로 말 그대로 사라졌다.
한순간이었지만 그것은 경이였다.
눈을 깜빡하기도 전에 우승빈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희월의 뒤에 나타나 신묘한 기운이 담긴 주먹을 내찔렀다.
콰아앙!
아무리 칠사도, 그것도 실력을 숨기고 있어 오사도와 비슷한 정도로 추측되는 실력의 소유자라도 이 신기의 움직임은 막을 수 없다.
감각을 벗어난, 말 그대로 사라지는 움직임을 그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윽!”
희월이 날아가던 몸을 빙글 돌리며 땅에 착지했다.
우승빈과 마찬가지로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
아마도 족히 일주일 정도는 요양을 해야 할 내상일 것이다.
“혼원벽력장이라니, 네놈 공동의 전인인 것이냐?”
“아아, 내 거는 혼원벽력장이 아니라 혼원벽력권이야.”
“또 말장난을!”
“진짜라니까? 나한테 가르쳐 준 사람이 이름을 이렇게 알려 준 걸 어떡해? 물론 공동의 혼원벽력장 같은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말이야.”
우승빈이 투덜거리며 이내 스르륵 사라졌다.
“칫, 도망쳤군.”
희월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말괄량이, 나 반년 전에는 관일공에게 선천진기의 손상을 입었고, 지금은 한 달은 족히 요양해야 할 내상을 입었는데 어때? 차륜전이라도 상대하겠어?”
“칠사도나 돼서 싸움을 거부하는 것이오?”
이제는 통하지 않는 말장난이다.
사도의 저지.
차륜전이라도 불사하겠다.
희월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실력이랑 얼굴이랑 전부 다 령 언니가 관심을 가질 만해서 나도 조금씩 도움을 주는 것일 뿐이야. 싸움이라면 난 기꺼이 받아 준다고.”
“도움?”
“실력을 거의 다 발휘하기는 했지만 아직 마지막 한 수가 남아 있다고? 그걸 맞으면 아무리 너라도 큰 상처를 입을 텐데 그 상태로 안의 사도들을 막을 수 있겠어?”
“사도…… 들?”
“그래, 사도들. 사사도와 일사도. 운가장엔 사도만 세 명이야.”
“부동심을 깨려는 말장난이라면 소용없소.”
사사도가 와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니 맞다만, 일사도를 말한 순간부터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일 뿐이다.
일사도가 죽는 것은 내가 보았다.
남궁세가의 무인들 둘러싸여 죽어 가던 그 모습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건만.
“어머? 일사도 때문에 거짓말이라도 생각하는 거야? 미안하지만 일사도는 진짜 있어. 물론 죽은 몸뚱어리지만 말이야.”
“설마…… 강시?”
“그래, 맞아. 그것도 살아생전의 기억과 실력을 모두 갖고 있고, 금강불괴와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갖고 있는 혈마강시(血魔f屍)가 되어서 말이야.”
혈마강시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희월의 설명대로라면 사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살아생전의 실력과 기억을 갖고 있고, 금강불괴와 지치지 않는 체력 또한 갖추고 있는 괴물.
아무리 많은 장로들과 속가 장문인, 그리고 문도들이 갔다고는 하지만 저렇게 된다면 절대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갈천악이 나에게 썼던 초식은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전율이 일 정도니까.
“어때? 날 놓아주고 상처 없는 몸으로 가서 막을래, 아니면 나를 죽이고 가서 네가 죽을래?”
선택지가 없다.
이것은 두 개의 선택지가 있지만 한쪽밖에 선택할 수 없는 악랄한 질문이다.
“후우∼”
어쩔 수 없다.
희월을 잡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는…….
“이런, 이런. 곤란하지.”
“그럼, 그럼. 당연한 말을.”
뒤에서 들리는 두 목소리.
“선택하는 것이 왜 그렇게 느려 터진 거야? 결국 와 버렸잖아!”
희월이 앙탈을 부렸다.
“우와∼ 칠사도와 사사도가 그렇게 예쁘다던데, 사실이잖아?”
“어머, 그건 고맙네. 하지만 내가 마음에 드는 건 백옥과도 같은 피부의 남자야.”
“얼굴에 흉터가 있는 남자다운 사나이는 맘에 들지 않나요?”
“미안하지만 나는 청우가 마음에 드는데? 령 언니한테는 미안하지만.”
“미녀한테 찍히다니. 그 미녀가 칠사도만 아니라면 참 부러울 텐데.”
능글맞게 말하며 두 남자가 다가왔다.
말투와는 다르게 싸늘한 표정.
점창과 해남의 신룡.
북초이와 남문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