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천검-121화 (121/175)

# 121

화산천검 5권(21화)

8장 화산파(4)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그랬던 것인가?

나는 그저 공명을 탐하여 정면대결을 추구했던 것인가?

“다른 후기지수들은 몇 번의 싸움으로 이름을 날리는데, 암중에서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공적을 쌓은 네가 이름을 날리지 못해 분한 것이더냐?”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아차’ 했지만 이미 저질러 버렸다.

이토록 마음의 수양이 덜 되었던 것인가?

겨우 몇 마디의 말만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렇게 풀이 죽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더냐?”

하지만 장문인은 내가 소리 지른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저…… 이제는 힘도 얻었으니 드러난 곳에서 호쾌하게 한 번 싸워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힘을 얻어서 호쾌하게 싸워 보고 싶다? 허, 말은 좋구나.”

신랄하게 마음을 후벼 파는 말.

장문인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겨우 그 정도 힘을 얻고서 그렇게도 기쁘더냐? 후기지수들 중에선 으뜸이라고 하더라도 네가 장문급, 원로급의 무인들보다 강하더냐?”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 그건 연륜의 차이라 그렇게 치도록 하자꾸나. 하지만 호쾌하게 싸워 보고 싶다는 것은 무슨 뜻이더냐?”

“…….”

“네가 육사도와 싸웠을 때, 남궁세가는 방해꾼들은 모두 쓰러졌고 너와 육사도가 일대일로 싸웠다고 했다. 그것은 호쾌하게 싸운 것이 아니더냐?”

“…….”

“네가 암중의 혈천회와 싸웠을 때, 강자와의 싸움을 해 본 적이 없더냐?”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말이라고 하는 소리더냐? 너는 너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많은 자들의 목숨을 버릴 셈이더냐?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는 화산파 제자의 자격이 없다. 구파의 의지이자 긍지, 그리고 목표는 협이다.”

“협…….”

“협사가 되라는 소리가 아니다, 너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너의 움직임에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 있다면,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게 된다면 나의 명을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

맞는 말이다.

아까 전에 생각했듯이 사람들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살리고 싶다면 장문인의 명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나는 복수라는 목적으로 덮어씌운 공명심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었다.’라는 것을 말이다.

처음엔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목적은 변질되어 간 것이다.

썩어 들어가고 있던 마음.

대체 언제부터 썩어 간 것일까?

“죄송합니다.”

“사문의 존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다. 알았으면 어서 나가거라.”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조금씩 하늘이 짙은 남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조금은 어두운 빛깔.

현재 내 마음을 빗대고 있는 색이었다.

9장 진격(1)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다.

전날 비가 왔었기 때문인지 하늘은 평소보다 배는 맑고, 높았다.

“날씨 좋구나.”

이런 날에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

하지만 강호에 나온 후부터 많은 피를 손에 묻혔다.

지금에 와서 망설일 이유는 없다.

그것도 다른 자들의 목숨이 담보로 잡혀 있는 한 말이다.

‘감상적이네.’

이틀 전 장문인과의 대화 이후로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하는지,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지.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심마(心魔).

많은 세월 동안 변질되고 바뀌어 온 목적은 이미 완벽히 썩어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그저 모든 것을 가슴속에 묻어 두고 명을 따라야 할 뿐이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고 검병에 손을 얹었다.

검병을 타고 흘러오는 싸늘한 예기와 한기에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일단 가자.”

이틀 동안 밤새도록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건만 지금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오겠는가?

안일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답이 나오기 전까진 현실에 충실해야 할 뿐이다.

우우우웅∼

검이 울었다.

내공을 불어넣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

검은 점점 세차게 울었다.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갈수록 더욱더 세차게 퍼지는 검명.

검명이 절정에 오른 순간, 커다란 공터에 자리 잡고 있는 많은 무인들이 보였다.

두 패거리.

왼쪽에 서 있는, 어두운 빛깔의 짙은 남색 무복을 입은 육백 명 정도의 무인들이 한 패거리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보라색에 가까운 붉은 무복을 입은 오백 명 정도의 무인들이 나머지 패거리다.

그들이 뿜어내고 있는 하늘을 찌를 듯한 엄청난 기세가 검을 울리고 있던 것이다.

내가 등장하자 고개를 돌리는 천 명이 넘는 숫자의 무인들.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앞쪽에 서 있는 약 삼십 명 정도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게나, 장문인께 얘기는 들었네.”

다가가자 환영해 주는 한 노인.

보라색에 가까운 붉은 무복을 입은 노인이었다.

“장문인께 명을 받아 이 자리에 함께하는 화산파의 선검수 청우입니다.”

“소개도 참 거창하게 하는구나.”

희끗희끗 흰 수염이 나기 시작하는, 짙은 남색의 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말했다.

햇빛에 많이 노출되어 탄 것인지 구릿빛이 나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햇빛에 많이 노출되고, 거친 기상이라면 해남파인가?’

해남파는 중원의 맨 아래쪽, 해남도에 있는 문파다.

뱃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거칠고 사나운 성격의 사람들이 많은 문파이다.

하지만 거칠고 사나운 성격과는 다르게 많은 협행을 하는 전통의 구파인 문파다.

“어린아이에게 너무 말이 거치오.”

붉은 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말했다.

“약관을 넘었고, 검선에게 명을 받을 정도라면 어린아이가 아니겠지.”

“말싸움을 그렇게 많이 하고도 질리지도 않나요? 게다가 초면인 사람의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실례입니다.”

말을 한 것은 백의를 입은 남자였다.

“우승빈?”

모습을 드러내기 전엔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기척을 숨기고 있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던데, 어때?”

팔을 벌리며 자랑하듯 말하는 우승빈.

“애송이가 어디서 잔소리를 하는 것이냐!”

“올바른 말에 화를 내는 것은 소인배라는 말이 있던데.”

“큭!”

“자, 자! 혼란스러울 텐데 정리를 좀 합시다!”

우승빈이 크게 박수를 치며 말했다.

“먼저 보라색에 가까운 붉은 무복을 입은 사람들이 점창파. 점창 본산의 제자들은 약 이백이고, 자원을 한 속가제자들이 약 삼백. 도합 오백 정도다. 그리고 짙은 남색의 무복을 입은 사람들이 해남파. 해남도에서 온 제자들이 약 삼백이고, 자원을 한 속가제자들이 약 삼백. 도합 육백 정도다.”

예상이 맞은 듯 붉은 무복 쪽이 점창파, 짙은 남색의 무복 쪽이 해남파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싸움을 했던 두 분이 해남파의 파랑도(波浪刀) 엄수사(淹水使) 장로님과 점창파의 회풍검(回風劍) 언보고(혞保古) 장로님.”

“해남의 엄수사다.”

“점창의 언보고라고 하네.”

“그리고 맨 처음 너를 환영해 주신 노인분이 점창파의 천선자(千善者) 이이(李怡) 장로님.”

“이이라고 한다네.”

그 이후로 우승빈은 네 명의 점창파 장로, 다섯 명의 해남파 장로, 아홉 명의 해남파 속가 문파의 장문, 아홉 명의 점창파 속가 문파의 장문을 소개했다.

그들은 물론이요 천백여 명의 문도들까지.

모두들 범상치 않은 무위의 소유자들.

혈천회의 사도가 있는 곳으로 진격하는 만큼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었다.

“그런데 우승빈, 너는 왜 여기 있지?”

누가 누구인지도 궁금하긴 했지만 이것이 가장 궁금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신룡들이랑 친하게 놀고 있던 녀석이 어째서 이번엔 장로들, 속가 문파의 장문인들과 시시덕거리며 있는 것인가?

“흑풍들이 만만한 줄 알아? 개방이 사도가 있는 곳을 눈치챈 지 오 일 정도가 지났으니, 그들도 아마 우리가 사도가 있는 곳으로 진격하려는 것을 알 거다. 그런데도 수상한 움직임이고 뭐고 없다고 하니 아마 싸워도 이길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겠지. 최악의 경우엔 사도가 더 있다는 소리일 수도 있다.”

“그거랑 네가 있는 것이랑 뭔 상관인지 모르겠군.”

“내가 말하긴 뭣하지만 실력엔 자신 있다고. 많은 도움이 될 거다.”

자신감 있는 표정의 우승빈.

웃음 짓고 있는 눈 사이로 싸늘한 안광이 내비쳤다.

방금 전에 기척을 숨기고 있을 때 눈치를 채지 못했던 일과 부정하지 않는 삼십 명의 장로들과 장문인들.

우승빈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뭐, 우가장에서 헤어질 때부터 예상은 했었지만…….’

하지만 구파의 장로들에게도 인정을 받을 정도라면 무척이나 놀랄 만한 성장이다.

“준비는 다 하고 오신 것이오?”

점창파 속가 문파, 절맥문(切脈門)의 장문인 절맥검(切脈劍) 매초도(梅硝道)가 말했다.

“예.”

“그렇다면 이제 출발해도 될 것 같습니다만?”

“그러도록 하지.”

매초도의 말에 엄수사 장로가 답하며 천백여 명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벅 저벅.

웅성거리던 소리가 잦아들고 모두가 엄수사 장로를 쳐다보았다.

그 엄청난 시선 앞에서 엄수사 장로는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점창과 해남의 문도들이여! 지금 강호를 어지럽히는 혈천회의 잔당들과 극악무도한 사도를 치러 가겠다! 죽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따라오지 마라! 그런 쓰레기 따위 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죽을 각오로 싸워라!”

우와아아아아∼!

자존심을 긁는 말일 수도 있건만 엄수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들 크게 외치며 병장기를 빼 들었다.

길게 연설을 한 것도 아니다.

그렇게 말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엄수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호기가 담겨 있어 모두의 마음을 들끓게 하고 있었다.

충천하는 듯한 기상.

빼어 든 병장기들이 태양빛을 반사하며 빛의 기둥을 만들었다.

“가자!”

엄수사의 말과 동시에 모두가 몸을 날렸다.

“검을!”

조용하지만 힘이 담긴 목소리.

옆에 있던 한 남자가 말을 한 남자에게 꽂혀 있는 여러 검 중에서 하나를 빼내어 건네주었다.

한 문파에 소속되어 있는 정도의 사람들에게 검을 내어 준다는 것은 그만큼 믿을 만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 같은 특이한 사람들을 빼고는 대부분이 한 자루의 검만을 들고 다니고 있으니, 옆에 있던 남자는 낭인일 가능성이 크지만 이곳에 있는 것은 모두 점창파와 해남파의 사람들이다.

그렇다는 것은 미리 준비했던 검이라는 뜻이다.

“파검을 신호로 돌입한다!”

이미 얘기되어 있었던 신호.

언보고 장로가 다시 한 번 강조하며 말하자 남자가 나무에서 내려와 기척을 숨기며 앞으로 다가갔다.

앞에 있는 것이 바로 운가장.

혈천회의 사사도, 초령이 있다고 하는 운가장이다.

우리가 있는 곳은 운가장의 남문.

돌격하는 곳은 남문, 동문, 서문이다.

상대방의 전력을 정확히 모르는데 모든 곳을 막고 포위공격을 하는 것은 많은 병력의 손해를 가져온다.

그럴 바에는 전멸을 시키지 않더라도 한쪽의 문을 열어 두어 그쪽에 매복을 시키든지, 추격대를 보내 도망치는 전력을 조금씩 줄이는 것이 낫다.

삼백삼십여 명으로 나뉜 세 개의 돌격대.

어느 쪽에 사도가 있을지 모르니 수뇌부를 열 명씩 골고루 나눈 상태였다.

내가 있는 쪽에는 우승빈, 점창파의 언보고 장로와 나머지 하나의 장로, 해남파의 장로 둘, 그리고 점창파의 속가 장문인 둘, 해남파의 속가 장문인 둘이 있었다.

말을 하며 앞으로 나선 이는 파검술(破劍術)에 조예가 있는 해남파의 한 속가 문파의 일대 제자이다.

부르르르 떨리며 진동하는 검신.

진동이 극에 이르면 검이 견디지 못해 깨지게 되고, 그 깨진 파편 하나하나에 기를 실어 엄청난 범위의 공격을 하는 것이 바로 파검술이다.

검이 깨지며 엄청난 수의 조각으로 나눠지기 때문에 막기도 어렵고 피하기도 어렵다.

특히나 기습일 경우에는 엄청난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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