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화산천검 5권(20화)
8장 화산파(3)
‘조심해라.’
‘예?’
매화검로에서 자하십육검의 형을 점점 찾아가던 중.
공천패는 갑작스레 그렇게 말했다.
‘무림맹과 혈천회의 싸움의 끝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자하십육검을 얻은 너라면 나중에 이 싸움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이라니요?’
‘내가 해 줄 말은 하나뿐이다. 조심해라, 화산의 장문인을.’
‘장문인을…… 조심하라고요?’
‘네가 믿든 말든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선택은 자유다. 하지만 진실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면 화산의 장문인을 조심해라.’
‘…….’
그때는 공천패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두 번째로 만난 자보다는 자파의 장문인을 더욱 믿어야 되는데 말이다.
예전에 느꼈던 많은 불길함들.
그리고 그 일 이외에도 장문인에겐 위화감을 느낀 일은 많았다.
하지만 절대 장문인을 의심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불경한 일이며, 정상적인 마음가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자, 가득 차 있는 대기의 도사가 절대 거짓말을 할 리는 없기 때문에 일단 기억을 해 놓기는 했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렇게 느껴보자 공천패의 말이 조금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내 눈길을 눈치챈 것인지 장문인께서 걸음을 멈추셨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단지 예전에 뵈었을 때와 지금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에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장문인이란 직위 때문에 일에 치여 살긴 해도 절대 검을 놓아 본 적은 없다. 아니, 손에선 검을 놓고 있어도 마음속에 검을 쥐고 있는데 어찌 검을 놓았다 할 수가 있겠느냐?”
“……!”
장문인의 말.
마음속을 후벼 파는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그것은 또한 자하십육검을 깨닫고 마음속에 무언가가 생겨났다는 것에 의문을 갖고 있던 나의 머릿속을 맑게 하는 하나의 밝은 빛이었다.
모호했던 그 무언가를 깨닫게 해 주는 조언.
이제 내 마음속에 생겨난 그 무언가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검’이었다.
검(劍).
단 한 번도 나에게서 떼어 놓지 않은 단 하나의 병장기.
만병지왕(萬兵之王), 모든 병장기의 왕이자 나의 벗이라 할 수 있는 무기.
휘두르고 휘두르다 보니 나의 마음속은 이미 하나의 검이 되어 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보통의 청강검과 같다고 하면, 그것 또한 아니다.
나의 깨달음, 나의 초식, 나의 무리, 나의 추억이 담긴 나만의 검이다.
심검(心劍).
모든 검객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마음의 검.
그것이 자하십육검을 깨달음과 동시에 마음속에서 맥동하고 장문인의 한 마디에 의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벌써 그 경지라니, 놀랍구나.”
장문인께서 놀란 표정으로 말하셨다.
“예?”
“나의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것은 심검의 초입이라는 얘기이겠지. 한평생 검을 휘둘러도 마음속에 있는 검을 느끼지도 못하는데, 겨우 네 정도 나이에 심검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이더냐?”
장문인은 정말 감탄했다는 듯 말하셨다.
“아직 멀었습니다.”
“그건 그렇긴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심검 정도라면 이미 장로보다도 강한 무위라는 말이니 말이다.”
“…….”
“도착했다.”
“이곳입니까?”
높다곤 할 수 없는 이층의, 옆으로 넓은 건물.
매화의 색과 같은 붉은색의 기왓장이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럽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들어오거라.”
“아, 예.”
구경하던 것을 멈추고 장문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벽마다 빽빽이 있는 책장들.
또한 그 책장 안에도 책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병법서, 진법서는 물론이요 주역과 같은 책들과 더불어 각종 무공서들이 각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들고 가서 읽도록 해라. 물론 얘기가 끝나고 말이지.”
“예, 감사합니다.”
“됐다, 일단 앉거라.”
“앉아도 됩니까?”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허락하는 것이다.”
장문인께서 손을 휘휘 내저으신 뒤 가운데 있는 사각형 탁자의 뒤에 있는 의자에 앉으셨다.
나 또한 옆에 있는 의자를 끌고 와 장문인과 마주 보고 앉았다.
“어디부터 얘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구나.”
“…….”
“남궁세가에서 일사도와 싸우고 사라져 어딘가에서 수련을 하고 온 것이 맞느냐?”
“예, 맞습니다. 운 좋게 죽지는 않아, 은공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 그곳에서 몸을 회복하며 절치부심 무공을 더욱 수련하고 왔습니다.”
“은공이라……. 누구인지는 얘기하지 않겠지?”
“예.”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평범한 민초들이라면 강호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할 테고, 은거한 노선배들이시라면 은거하고 있는 곳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니 누구인지 얘기하지 말라고 너에게 당부했을 것이라고 추측했을 뿐이다.”
“…….”
독심술이라도 쓴 것인가?
내가 의문을 갖고 있던 점을 쉽게 말해 주는 장문인이다.
“그렇다면 네 얘기는 더 이상 할 것이 없겠지. 이젠 이곳, 무림맹의 얘기를 너에게 알려 주마. 이 싸움에서 너의 비중이 무척이나 크니 말이다.”
“예.”
이제부턴 정면승부다.
지금까지의 혈천회와의 격돌이 그들의 암중 계획을 파괴하는 각개격파였다고 한다면, 이젠 수면 위로 드러난 혈천회의 본진과 격돌해야 한다.
“일단 혈천회에서 가장 귀찮고도 강한 자들은 칠사도다. 아니, 이제는 사사도라고 해야 하겠지. 이사도는 사신철부(死神鐵斧) 악벽(岳劈)이다. 커다란 쌍도끼를 휘두르며 전장을 압도하는 사신이라고 불리더구나. 현재는 네 사부인 무진에게 패배하여 어딘가에서 요양 중이라고 알고 있다. 사사도는 요희(妖姬) 초령이다. 섭혼술, 사혼술과 같은 사술의 달인이며 또한 섭선을 휘두르는 요녀다. 해남파의 장로 두 명을 쓰러뜨려 남해신검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중이지. 오사도는 사필마(死筆魔) 번냉비(樊冷悲)다. 무기는 판관필이고 사혈과 요혈만을 노려 대 상대하기 힘든 자이다. 곤륜과 개방의 장로 네 명이 기습을 당해 현재 중태, 단전이 파괴된 상태다. 칠사도는 추영살 희월이다. 혈천회에서 주요 인물의 암살을 담당하는 흑영들의 대장이다. 관일공과의 싸움에서 놀랍게도 관일공을 상처 입히고 도주한 자이지. 물론 거의 다 죽어 간 상태에서 진원진기까지 끌어다 쓴 공격이었겠지만 말이다.”
사부에게 패했지만 일사도를 대신해 전장을 피로 물들이는 이사도, 나에게 자하검을 건네주었으며 해남파의 장로를 쓰러뜨린 사사도, 곤륜과 개방의 장로를 쓰러뜨린 오사도, 점창파의 장문인인 관일공에게 상처를 입히고 도주한 칠사도.
하나같이 굉장한 자들이다.
“이렇게 네 명이 현재 싸움에서 가장 돋보이는 혈천회의 고수, 칠사도다. 이외에도 다섯 개 정도의 대(隊)가 무림맹과 맞부딪치고 있다. 다섯 개의 대는 매화검수나 오행검사들과 같은 후기지수들의 단인 소룡단(小龍團) 등과 맞붙어 싸우고 있어 큰 위협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칠사도가 전장에 나오면 상황은 달라지지. 이사도를 빼고는 전장에 많이 나오진 않으나 칠사도 중 한 명이라도 나오면 후기지수들이나 중소 문파의 장문인과 장로들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구파의 장로님들이 계시잖습니까?”
“흑풍과 흑영이 만만치 않다. 정말로 중요한 싸움에만 나타나게 정보를 전달하고 조작하고, 승산이 있는 싸움에만 나타나니 말이다.”
“교활하군요.”
“차라리 탁월한 선택이라고 칭찬해 줘야 마땅하지. 그렇지만 암중에서 엄청난 세력을 키웠다고 해도 전통의 구파일방은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로서는 곤란할 뿐이니 네가 나서야 한다.”
“제가 말입니까?”
“나머지 신룡들은 이미 드러났다. 신룡들은 그 무위가 장로들보다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부 맞는 말이지. 그들이 있으면 혈천회의 사도들이 모습을 드러낼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제가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는 것을 이용하자는 것입니까?”
“네가 육사도를 쓰러뜨렸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때보다 두 배 정도는 더 강해진 것 같으니 사사도, 오사도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단 하나의 사도라도 줄어든다면 현 전장의 상황을 갈아엎을 수 있다.”
“그렇…… 군요.”
한마디로 기습을 하라는 얘기다.
모습을 숨기고, 실력을 숨겨 적들에게 드러나지 않게 한 뒤 사도를 쓰러뜨리라는 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선봉에 나서 호쾌하게 싸우며 진격하다 보면 회가 위험하기 때문에 어차피 모습을 드러낼 터인데 그러지 말고 기습을 하라니.
힘을 원했고, 원하던 힘에 이미 많이 다가갔다.
몇 걸음 정도만 더 걸으면 원하던 곳에 도달할 정도인데 또다시 몸을 숨겨야 한다니.
‘후우∼’
하지만 사문의 명이다.
사부의 장로직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며, 또한 사부의 복수를 하기 위한 싸움이다.
위험을 줄이고 철저히 안정성만을 추구하는 싸움.
장문인의 말대로 싸우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안 삼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음의 싸움은 운가장이다. 비조각과 비매각, 그리고 개방이 조사한 결과, 그곳에 사사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사사도…….’
“이틀 후에 그곳으로 점창과 해남의 무인들을 보낼 예정이다. 관일공과 남해신검에겐 얘기해 둘 터이니 그때 같이 운가장으로 향하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잠시의 침묵.
그 침묵을 뚫고 장문인의 날카로운 말이 귀를 후볐다.
“또다시 몸을 숨기고 싸워야 돼서 풀이 죽은 것이냐?”
“예? 아, 아닙니다.”
또다.
독심술이라도 쓴 듯 마음을 읽는다.
“그렇게도 공명을 탐하고 싶더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암중에서 싸우는 것은 싫고, 드러난 곳에서 싸우고 싶다면 그것이 공명을 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