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화산천검 5권(18화)
7장 네 신룡(3)
턱!
다시 한 번 일보 내디디는 명도.
조금씩 강해지는 압박.
그리고 그와 함께 명도의 송문고검에서 발하던 미미한 진동도 점점 실체를 보이기 시작했다.
또다시 원이다.
하지만 이번의 원의 크기는 손톱만 했다.
원의 안에 빨려 들어간다.
시야가 원을 그리는 검첨을 따라서 계속해서 움직였다.
빙글빙글 빙글빙글 움직이는 검첨을 따라가는 눈동자.
한순간, 꺾인다.
파카캉!
“크으윽!”
위험하다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검을 내친 것이 다행이었다.
내친 검에 맞부딪치는 엄청난 강함을 내포하고 있는 무언가.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보이지 않았다.
움직임은 그저 원을 그리다 꺾인 태극의 문양을 그린 것일 뿐.
태극이 끝남과 동시에 어떠한 무언가가 나를 공격한 것이다.
어떠한 소리도, 색도, 진동도 없었던 공격.
이것이 바로 명도의 공격이었다.
“무리해서 전개한 것인데, 막아 냈군.”
명도가 머리를 흔들며 납검했다.
명도의 이마에선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손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아직 완벽히 다룰 수 있는 초식은 아닌 것인지 자신도 힘들어하는 것이다.
“위험했소.”
자하검이 계속해서 진동했다.
경력은 모두 해소했건만 무슨 조화인건지 검이 계속 진동하는 것이다.
“뭐였소?”
“무당의 태극혜검은 깨달음의 무공. 자신이 어떤 것을 깨달았고, 어떤 삶을 살아왔나에 따라서 변하지. 태극혜검의 구사자들은 근원은 똑같으나 모두들 다르다 해도 과언이 아닌 무공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깨달은 나의 태극혜검이다.”
“그렇군.”
깨달음.
내가 명도와 같은 것을 깨닫지 않는 이상 아까의 공격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까의 보(步)는 무엇이오?”
이것 또한 궁금했다.
“나의 사부님이 만들어 주신 보법이다. 그분의 모든 깨달음의 정수가 녹아든 보법. 허보(虛步)라고 부르고 있다.”
“사부님?”
“허정(虛正)이라는 도호를 쓰고 계시다.”
‘……!’
허정.
현 무당의 태극검사이자 소림의 불타승과 비교되어 천하제일의 무인이라 암암리에 칭해지는 도인이다.
그렇다면 아까의 압박감이 이해가 간다.
허정은 천하제일인이라 암암리에 칭해진다.
그런 분의 깨달음의 총화라 할 수 있는 보법이니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묻지. 그대의 사부는 누군가?”
“무진이라는 도호를 쓰고 계시오.”
“무진이라……. 이사도를 패퇴시켰다고 하는 그 화산파의 장로인가?”
“그렇소.”
알고 있는 것이 놀랍긴 했지만 표를 내진 않았다.
“호사가들은 거짓이라고 떠들어 대고 있는데, 진짜였나 보군.”
고개를 끄덕이자 명도가 가까이 다가왔다.
“심판은 필요가 없게 되었군.”
“뭐, 실력들을 보니까 내가 심판을 보기엔 너무 수준이 높아. 너무 수준을 낮게 본 것 같다고.”
우승빈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것 같다만 놀라움이 너무나 큰 것인지 웃음이 어색했다.
“대단하군.”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북초이와 남문기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칭찬을 하고 있다만 표정이 굳어 있었다.
“과찬이오.”
“아니, 이거 우리가 같은 신룡이라고 하지만 너무 수준의 차이가 많이 나잖아?”
이것은 명도를 보며 한 북초이의 말.
“신룡은 우리가 아니라 너였군.”
이것은 나를 보며 한 남문기의 말.
“사일신검, 점창파의 사일검법을 익힌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해룡 또한 해남파의 남해삼십육검을 익힌 것을 잘 알고 있다. 모두 구파를 대표하는 절기이니 절대 우리에 비해서 달릴 리가 없으니 열심히 하기만 한다면 된다.”
명도가 무심하게 조언했다.
“뭐야? 네 앞에선 사일검법을 쓴 적이 없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지.”
거기서 더 할 말은 없다는 듯 명도가 딱 잘라 말했다.
“하, 거참 딱딱하구먼.”
“솔직히 구파의 제자라는 사람이 이렇게 능글맞은 것이 이상한 것 아닌가?”
우승빈의 능글맞은 목소리.
“너야말로 너무 능글맞아. 종남의 반룡보단 못하지만 나보단 더하다고.”
“그 사람이야 실력에 맞게 오만한 것이잖아?”
“그쪽 얘기는 집어치우고 주변이나 정리해라. 비무라곤 했지만 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 위쪽에서 무척이나 궁금해할 테니까.”
“아아, 그건 그렇지.”
파사삭!
남문기가 말하곤 주변을 돌며 발을 움직였다.
그러자 내가 밟았던 보로, 경력의 여파로 인해 휘몰아쳐 부자연스럽게 배치된 돌덩이들, 검흔이 사라졌다.
“그건 내 전문인데.”
우승빈이 입맛을 다셨다.
“잘한다고 너한테만 맡기면 우리 실력은 언제 늘겠냐?”
“장로님들을 속이기엔 너무 조잡하다고요.”
우승빈이 말하며 남문기가 지웠던 흔적들을 다시 한 번 발을 움직여 지웠다.
그러자 미세하게 남아 있던 흔적들도 모두 사라졌다.
“칫.”
“나이 먹고서 뭘 삐치고 그러는지 모르겠네.”
우승빈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였다.
“오신다, 조용히 해라.”
명도의 말에 모두 조용해졌다.
삭!
풀을 밟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내가 아는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철검파에서 만났을 때와 별 다를 것이 없는 얼굴.
시간은 지나는데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은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만청풍 사형의 사부.
화산파 도문의 장로, 청도 장로님이셨다.
“무림맹의 자랑인 신룡들이 이곳에 모두 모여서 뭣들 하는 것이냐?”
보자마자 우리를 향해 하신 말씀이다.
“그냥 심심해서 잠깐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냐? 그…… 음!”
청도 장로님이 나를 보았다.
무척이나 놀란 듯 동그랗게 뜨여진 눈.
청도 장로님의 손가락이 나를 향해 뻗어졌다.
“청……우야.”
“오랜만입니다, 장로님.”
깊이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장로님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반가움이나 놀라움 같은 것이라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장로님의 말을 들음과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인자한 표정.
감정은 모두 정리했는지 포근하게 나를 반겨 주었다.
“어째서 화산파에 먼저 알리지 않은 것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저 아이가 이곳에 있는 것을 보아 예상은 가는구나.”
청도 장로님이 우승빈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저한테 그러십니까? 전 아무것도 안 했다고요?”
우승빈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각자 하던 일을 마저 하도록 하고, 청우 너는 따라오너라.”
“그럼.”
그 말에 우승빈과 명도, 북초이와 남문기에게 포권을 취하고 청도 장로님을 따라갔다.
8장 화산파(1)
청도 장로님을 따라가는 길에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색하여 말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곳에 있음으로써 편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약 일각 정도를 걷고서야 장로님은 입을 여셨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아마 화산파에 알려진 나는 남궁세가에서 일사도의 일격에 패하고 어딘가로 사라졌다고 되어 있을 것이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
내가 죽었다고 알고 계셨을 장로님의 말.
공천패에 대한 얘기를, 자하십육검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일까?
“그저, 건강히 잘 지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로구나.”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걸 알고도 장로님은 나에게 그저 다행이라고 말하셨다.
배려였다.
“네가 남궁세가에서 사라졌다고 들었을 때는 정말 놀랐었다. 일사도와 검을 나누다 쓰러지고 사라졌다고 하니 말이다. 그것도 오대세가의 수좌인 남궁세가에서 말이지.”
남궁세가, 아마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혈천회의 사람들과 싸워 많은 피해를 입은 것도 모자라 화산파의 책임 추궁을 받았을 테니 말이다.
“그것 때문에 잠깐 남궁세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었지. 장문인이 이해하고 넘어가지 않았다면 아마 반목이 일어났을 것이다.”
“겨우 저 하나 때문에 반목이 일어날 리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문하라고는 하지만 겨우 하나의 제자가, 그것도 싸우다 지고 사라졌다는 것 때문에 남궁세가의 수좌와 반목을 할 것이라는 건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일어났을 것이다. 세간에 너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수뇌부들은 모두 네 이름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네 활약에 대해서는 모두가 감탄을 하고 있다. 너의 존재감은 이제 우리 장로들과 비슷한 정도다.”
“과찬이십니다.”
“뭐, 겸손도 좋긴 하지.”
살짝 웃으며 말하곤 청도 장로님이 손가락을 들으셨다.
“이곳이다.”
장로님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무척이나 커다란 전각이었다.
이곳에 있는 많은 고루거각 중에서도 가장 커다랗고 고풍스러워 보이는 전각.
“이곳이 바로 구파의 장로들과 장문인들이 모이는, 무림맹의 중심이다. 이번에 새로 지은 건물이지.”
“그래 보이는군요.”
“조금 더 축소시키고 싶었다만 그러면 위엄이 서지 않는다고 천기자(天機子)가 얼마나 난리를 피우던지.”
나의 말을 어떻게 알아들은 것인지 청도 장로님이 씁쓸하게 웃으셨다.
“이제 도착이다.”
커다란 거각의 앞에 도착하였다.
수뇌부들이 있는 곳이건만 호위무사나 문지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실력에 대한 자신감일까?
‘뭐, 어차피 누군가 습격을 해도 절대 피해를 입힐 수 없겠지만. 호위무사를 놓아도 인력낭비일 뿐이지.’
혈천회의 호법들이나 회주가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에야 이곳의 사람들을 쓰러뜨릴 인물은 혈천회에 없을 것이다.
똑똑!
청도 장로님이 문을 몇 번 두드렸다.
안에선 대답이 없었다.
“청도 장로입니다.”
말하자 얼마 후에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자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몇몇은 아는 얼굴, 몇몇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는 얼굴들.
내 사문, 화산파의 장문인이신 검선, 종남파의 장문인인 천수신검, 개방의 용두방주인 천풍걸개가 그들이었다.
모르는 얼굴들.
이마에 계인이 있는 인자한 얼굴의 노승, 비슷한 느낌의 비구니, 그리고 도복을 입은 강인한 인상의 도인이 그들이었다.
“허허, 청도 장로께서 모르는 아이를 하나 데리고 오셨구려.”
노승이 부드럽게 말하였다.
“…….”
검선과 천수신검, 그리고 천풍걸개는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검선께서는 당연하다는 듯 그저 고개를 끄덕이셨고, 천수신검은 놀란 표정을, 천풍걸개는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