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화산천검 4권(21화)
8장 남궁세가(4)
혈천회라는 곳이 만만치 않다고 했는데 그곳에서 가장 강한 일곱 명 중 하나를 쓰러뜨렸다는 나의 말에 믿기지가 않는다는 눈빛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눈빛을 지우고 나에게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자네와 일대일로 싸운 것인가?”
“아니요, 그전에 살수와 궁수 집단과 싸웠습니다. 그들을 쓰러뜨리고 그가 나타난 것이지요. 아, 싸운 것으로 보자면 일대일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경사스러운 일이군. 그들의 수뇌부 중 하나를 쓰러뜨렸으니 말이지.”
“하지만 이겼어도 몸이 성치 못한데 좋아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씁쓸히 웃자 남궁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튼 그렇다면 자네는 혈천회와 싸우기 위해 이곳으로 왔고, 그와 싸웠다는 얘기가 되는군.”
“네…… 아, 아닙니다. 맞다! 창렴표국!”
벌떡 일어나려 했으나 또다시 상처가 쓰려 와 얼굴이 자연적으로 일그러졌다.
“창렴표국? 그곳은 대체 왜 찾는 건가?”
“제 본래 목적은 창렴표국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가는 길에 어느 괴상한 세 남녀의 미행을 받다가 그들이 저를 그 건물로 유인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자네의 그 몸을 보니, 창렴표국으로 가는 것은 그른 것으로 보이는데……. 화산파에 전서라도 쓰게 해 줄 수는 있네.”
“아닙니다, 겨우 오 일 정도가 지났다고 모든 흔적이 사라지진 않았겠죠. 아니, 잠깐만. 제가 떠난 때가 회담이 진행되기 일주일 전이었으니 현재 이틀이 남은 건가?”
“회담이라…… 구파일방의 무림맹 발동을 위한 회담인 건가?”
“예, 맞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불길한 느낌이 들지?’
무림맹 발동과 창렴표국.
왠지 모르게 관련이 있을 듯 보였다.
“어째서 우리는 부르지 않은 거지? 구파는 설마 우릴 견제하고 있기라도 하다는 건가?”
남궁대한이 갑자기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에 황급히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이쪽의 일은 제가 해결하고 있기에 구파에서 부르지 않은 겁니다.”
“네가 해결한다고?”
“황보세가와 당가에 이 일을 알려 준 것이 저라고 했잖습니까. 이미 그들과는 얘기가 끝났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이 무림맹에 협력한다고 맹세했다는 얘긴가?”
“예, 그렇습니다.”
사실은 의기통천과 독살성의 협력만을 얻은 것이지만, 그들이 세가에 되도록 무림맹에 협력하도록 하라고 얘기한다고 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흐음∼ 그렇다면 우리보고 협력하라는 얘기를 했던 것이었나?”
“예?”
“사실 그들이 우리에게 알려 준 것은 혈천회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그저 그런 집단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얘기한 줄 알았는데, 무림맹이 발동되면 그곳에 협력하라는 얘기였군.”
“아, 그렇다면 협력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모르지. 나는 장로일 뿐 가주가 아니니까.”
남궁대한이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거 성격도 참.’
“그렇다면 이 얘기는 조속히 가주님에게 알려야 되겠군요.”
“그렇지, 얘기가 이렇게 흘러갔으니 그래야 되겠지.”
“일단 이곳에서 쉬고 계십시오. 저희는 이 얘기를 다른 장로님들과 가주님에게 알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소식이 있기를 빕니다.”
그렇게 말하자 남궁성이 싱긋 웃곤 바깥으로 나갔다.
사실 나도 더 이상은 말하기가 힘들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기 때문이다.
‘후우∼ 일단은 좀 쉬자.’
이미 남궁세가에 얘기는 끝냈다.
좋은 소식이 들어올지, 나쁜 소식이 들어올지는 내일이 되어야 알 일.
일단은 걱정을 접어 두고 피곤을 풀려고 침상에 몸을 뉘이고 잠을 청했다.
9장 창렴표국(1)
“아, 일어나셨어요?”
눈을 뜨자마자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어제 나의 시중을 든다고 했던 시녀가 보였다.
해맑은 얼굴로 방긋 웃으며 불편한 내 몸을 부축해 주었다.
“고맙소.”
“아니에요.”
싱긋 웃곤 시녀가 바깥으로 나갔다.
왜 그런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가 남궁천과 남궁성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시녀는 인사를 하곤 바깥으로 나갔고, 남궁천과 남궁성이 나의 앞에 섰다.
“간밤에 별일은 없으셨나요?”
“예, 편의를 봐주셔서 그런지 무척이나 편안히 잠들었습니다.”
서로 겸양의 말을 주고받은 뒤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제의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예. 일단 말하자면, 반응은 무척이나 긍정적이었습니다. 가주께서는 삼백 년 만에 무림맹을 발동한다는 사실에 조금 긴장하셨는지 사정을 듣고 고민하시다가 흔쾌히 승낙을 하셨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하자 남궁천이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저에게 감사할 일이 아니죠. 같은 정도의 무인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현재의 평화로움을 위협하는 그런 세력은 조속히 처리되어야 할 악(惡)일 뿐이니까요.”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사실이었기에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제 할 일이 있다고 하셨는데, 창렴표국이라고 했던가요?”
“예, 맞습니다.”
“사실 그 몸으로 화산파의 명을 이행하기엔 힘들다고 생각되기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가지 않는 것을 추천드리겠습니다. 화산파에는 저희 남궁세가에서 전서구를 날리면 되니 말이지요.”
“아니요, 이 몸으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코앞까지 다가온 구파일방의 회담.
창렴표국에서 발견되었다는 기이한 징후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조금이라도 빨리 그곳에 도착하고 싶었다.
“후우∼ 고집이 세시군요. 하지만 그 몸으로는 창렴표국까지 가시지도 못할 것 같은데요?”
“절 너무 얕보시는군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몸을 일으켰다.
뻐근한 감이 있긴 했지만 어제처럼 고통스럽진 않았다.
뚜둑! 뚜두둑!
목을 꺾고 몸을 뒤집고 발을 휘두르며 몸을 풀었다.
그러자 어느새인가 뻐근함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이 정도라면 갈 수는 있지요.”
“그렇지만 아마도 잠입을 하실 것 같은데, 그만한 내공은 있으십니까?”
이것 또한 문제가 없었다.
단전을 가득 채우진 못하겠지만 내 자하심법은 보통의 심법보다 자연의 기운을 많이 끌어들인다.
보통의 심법보다 두 배 이상 빠르게 기운을 끌어들이기에 지금부터 계속해서 운기를 한다면 별 상관은 없었다.
“걸어 다니면서 운기를 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남궁천이 놀란 듯 말했다.
남궁성조차 놀란 듯 미미하게 얼굴을 굳혔다.
“아직 그 정도의 경지는 아닙니다.”
말을 듣자 남궁천과 남궁성이 ‘역시’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남궁세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희의 도움이라면 어떠한 것인지요?”
“마차가 있다면 태워 주십시오.”
“마차…… 라고요?”
“예, 마차에 탄다면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운기에 집중을 할 수 있잖습니까?”
사실 내 부탁은 남궁세가에서 들어주지 않아도 내가 할 말이 없다.
죽을 뻔한 사람을 이런 곳에 데려온 것부터 내 편의를 봐준 것까지, 이미 남궁세가는 나에게 할 수 있는 많은 호의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음…… 알겠습니다. 이 일은 남궁대한 장로님과 상의해 보지요.”
“아, 감사합니다.”
남궁성과 남궁천은 싱긋 웃으며 바깥으로 나갔다.
“후우∼”
침대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의를 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운기조식을 하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내공을 모으는 것이 창렴표국에 침입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 있지 않아 또다시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다.
남궁성은 들어오지 않았고 남궁천만이 홀로 들어왔다.
“장로님이 시원스레 허락하셨습니다.”
일어나 고마움을 표시하려 했는데, 남궁천이 나를 제지하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 말이오?”
“바로 제 사매를 데리고 가라는 조건입니다.”
“……?”
대체 무슨 저의로 말한 것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는데, 남궁천이 박수를 짝짝 쳤다.
그러자 문이 열리면서 한 여자가 들어왔다.
몸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 헐렁한 무복과 허리에 차여 있는 묵색 검집, 그 앞으로 보이는 녹색 수실이 매여져 있는 검병.
점점 위로 시선을 움직여 보았다.
만지면 묻어날 듯한 하얀 피부와 전체적으로 냉랭하다고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는 미인.
“제 사매인 남궁수련(南宮粹蓮)입니다.”
남궁수련이라 불린 여자가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했다.
차가운 분위기에 무척이나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한 인사였다.
“아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하려는 임무는 정보를 캐내는 것인지라 잘못되면 격투가 있을 수도 있는 임무입니다. 위험할 수도 있다고요.”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일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희 남궁세가에선 절대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임무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매는 도움이 됐으면 됐지 방해를 할 리는 없으니 말이지요.”
저렇게까지 말하니 내가 거절하기도 뭐하다.
게다가 남궁수련을 데리고 가는 것이 마차를 타는 조건이니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떨떠름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데려가야 하는 것이다.
“후우∼ 알겠습니다.”
“언제 출발하실 예정입니까?”
“아, 남궁세가에서 준비를 끝내셨다면 저는 어느 때든 상관이 없습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기는 하지만 말이지요.”
“이미 준비는 끝냈습니다. 자, 가시지요.”
남궁천이 싱긋 웃고는 길을 안내했다.
남궁수련은 내게 힐끗 차가운 시선을 보내더니 남궁천의 뒤를 따라다녔다.
바깥에는 적당한 크기의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마부가 남궁천과 남궁수련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내려서 문을 열어 주었다.
마차에는 휘장이 쳐져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을 볼 수 있었기에 우리에게 해는 없었다.
“목적지는 창렴표국의 근처이네. 창렴표국의 인물이나 수상한 인물에게 들키지 않도록 마차를 잘 몰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한두 번 하는 일도 아닌데요, 뭘.”
마부가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남궁천은 믿음직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우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잘 다녀오도록 하십시오. 위험하다면 곧바로 돌아오도록 하시고. 수련아, 이번 일은 다른 분들께 네 실력을 보여 주는 것이 목적이다. 네 실력이라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조심하길 바란다.”
“알고 있어요.”
남궁수련이 말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분위기로 보아 웃어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보였는데, 이렇게 웃으니 차가운 표정으로 있던 것보다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그래, 잘하도록 하거라.”
남궁천이 마차의 문을 쾅 하고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