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화산천검 3권(18화)
7장 철검파(2)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
바람 소리조차 날카로워 베여 버릴 것만 같은 산.
그런 산의 한 꼭대기에 커다란 전각이 있었다.
낡은 것 같으면서도 무척이나 고풍스럽고도 웅장한 전각.
어두운 전각의 안.
열려진 창문 사이로 벌레 소리만이 들려오는 적막의 공간이었다.
끼익∼
그 방 안으로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두운 방의 안에서 남자의 눈은 마치 유등(油燈)과도 같이 은은하고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
방 안에 원래 사람이 있었던지, 남자의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대답이 없지, 공천패?”
공천패. 부리부리한 눈썹에 호안, 산적과도 같은 인상의 남자.
공천패가 입을 열었다.
“도사가 되고, 속세에 관여하지 않으려 한 지 어언 삼십 년. 지금까지 관여를 했던 것은 너와의 의리와 그에 대한 보답 때문이었다.”
공천패의 말에 남자가 창문을 열며 답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그건 갑자기 왜 말하는 거지?”
“점점 때가 다가오는구나, 너와의 연이 끊어질 때가.”
“보이는 건가?”
밝게 빛나던 공천패의 눈이 점점 그 빛을 속으로 갈무리해 갔다.
“그때가 되면 나는 아무런 미련 없이 다시 공동산(쭧칹山)으로 들어갈 것이다.”
“무당파와는 예전의 일 때문에 더 이상 다가갈 수 없고, 아미와는 그 길이 다르기에 가지 못한다. 상황이 이러하고, 공동산에서 몇 십 년을 도를 닦았는데 그곳이 아니면 어디로 돌아갈 건가? 당연한 말을 하는군.”
“하지만 그전에 너를 도와주는 것에 요즘 무척이나 많은 회의가 드는구나. 대체 어디까지 나아갈 셈이냐?”
공천패의 말에 이번엔 남자의 눈이 반짝이듯 빛났다.
“나의 목표와 야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언제까지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일 셈이냐?”
“나의 목표와 야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때의 그 아이, 얘기해 주는 것이 아니었다.”
공천패가 슬픈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조용히 살 수 있는 아이에게 언제까지 무거운 짐을 지울 셈이냐?”
“나의 목표와 야망이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나의 명을 다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공천패. 그것은 내가 태어난 이유이기도 하며, 더 이상 제대로 된 길로 갈 수 없게 된 나의 운명에 대한 체념이기도 하다. 네 그 눈으로는 잘 보일 것이다.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 헛수고라는 것도, 나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도.”
“…….”
세 번의 물음과 세 번의 답.
마지막 말에 무언가 느낌이 있었던지 공천패의 눈에서 다시 반짝이듯 빛이 나고, 공천패가 아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망은 무척이나 헛된 것. 한단지몽(邯鄲之夢), 황량몽(黃梁夢)일 뿐. 모래로 쌓은 성 정도는 커다란 파도에 힘없이 무너질 뿐이고, 쌓인 낙엽은 약한 미풍에도 흔들릴 뿐이고, 시야가 안개에 가려져도 언젠가는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트이기 마련이거늘.”
“그게 하늘을 뚫고 올라갈 정도의 높이라면 다르겠지. 모두의 생각을 바꾸고, 모두의 시선을 가릴 정도의 안개라면 몇 십, 몇 백 년 정도는 거뜬하지.”
“나는 너의 선택을 존중하기에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너의 부탁이 도의(道義)에 어긋나지 않는 한 나는 들어줄 것이다. 허나 도를 벗어났을 때는 나는 그 업(業)을 없애기 위해 나의 일을 할 것이다. 너의 천명(天命)이 그것이라면, 나의 천명은 이것이다. 그것을 막지 마라.”
“…….”
“알아들었으리라 믿는다, 오랜 친우여. 자네의 선택이 올바른 길로 가는 하나의 갈림길이기를 빈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공천패가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갔다.
돌아앉은 공천패와 대화를 하던 남자.
스며 들어오는 달빛에 남자의 모습이 살짝 비쳤다.
하얀 머리카락의 남자.
“지금의 나에겐 모든 것이 그저 도구일 뿐. 이용 가치가 없어질 때에는 베어야지. 그것이 너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공천패.”
음산하게 말한 남자가 창문 사이로 드러난 만월을 바라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
서안에 도착했다.
종이에 쓰여 있던 합류 장소는 서안의 한 커다란 장원.
그런데 도착하여 아무리 살펴봐도 문지기조차 없는 텅 빈 장원이었다.
‘어찌 된 일이지?’
게다가 길을 걷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객잔에는 사람들이 있으려나?’
근처의 유명한 객잔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객잔 안은 시끌벅적한 것이, 사람들이 많았다.
“어서 오십시오.”
점소이가 나와 인사하며 자리를 안내하려 했다.
“잠시 뭣 좀 물어보려 한 것이오. 자리를 안내할 필요는 없소.”
“그렇습니까?”
친절하게 얘기하곤 있지만 나의 얘기를 듣자마자 점소이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저기 있는 장원, 안에 있던 무인들은 어찌 되었소?”
“아니, 아직 그것도 모르는 겁니까?”
“대체 어찌 되었기에 그렇소?”
“지금 철검파에서 자포자기를 했는지 종남파로 움직였다고 합니다. 화산파에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았는지 문파를 포기하고 하인들을 제외한 싸울 수 있는 무인들 전원을 데리고 종남파로 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원이라고 해 봐야 적검대와 비검대의 무인들뿐이지만 말이지요.”
“흑영대는 어찌 되었소? 그리고 철검파를 도와주던 다른 협력 문파들은?”
“하나씩 하나씩 물읍시다. 아무튼 흑영대는 어찌 된 일인지 일주일 전부터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비매각에서 모두에게 공표했습니다. 비매각의 정보 능력은 화산파가 구파의 최약세일 때에도 거의 으뜸이었으니, 지금 같은 성세를 이루고 있는 때의 공표는 당연히 사실이란 뜻이겠지요. 흑영대는 아마 사라졌을 것입니다.”
‘일주일 전이면, 우승빈이 흑영을 죽였을 때다.’
그때 흑영은 자신이 곧 흑영대라고 얘기했었다.
‘그것이 이런 의미였나?’
흑영대는 대(隊)이기는 하지만 흑영 혼자만이 활동하는 대(隊)였다는 소리가 된다.
“그리고 철검파와 협력했던 다른 문파들은 화산파가 철검파의 분타들을 모두 괴멸시키고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지레 겁을 먹었는지 화산파에 잘못을 빌고는 다시 화산파의 아래로 들어가거나, 심지어 몇몇 문파는 봉문까지 선언했습니다. 쯧. 그러니까 알아서 줄을 잘 설 것이지 괜히 신흥문파를 도와준다고 나섰다가 불똥이 튀게 생겼잖습니까?”
‘그랬군, 그렇다면 철검파는 거의 끝난 거로군.’
“그렇다면 하나 더 물어보겠소. 어째서 철검파가 종남파로 진격하는 것이오?”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화산파가 바로 앞에 있다니까 그 공포심에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봅니다. 쯧. 그래 봤자 종남파도 화산파에 꿇리는 문파는 아닌데.”
“친절히 대답해 준 점, 감사하오.”
꾸벅 인사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종남파로 갔다고?’
종남파.
섬서성에 있는 또 다른 구파이자 나와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세 무인이 있는 곳.
‘현파, 탑희윤, 그리고…… 마진천.’
현파와 탑희윤은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궁금하고, 마진천은 내가 얼마나 따라잡았는지 궁금하다.
‘어찌 보면 철검파가 잘 움직여 주었군.’
내가 강호로 출도한 목표, 철검파의 황신. 그리고 그전에 내가 목표한 무인인 마진천.
현재 두 목표 모두 종남파의 근처에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철검파가 잘 움직인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비매각에서 나에게 정보를 보내왔을 텐데?”
근처에 있는 철검파의 전각들에 갈 것인지 철검파의 무인들에게 갈 것인지, 그것은 화산파의 명령에 따라 달라진다.
서안에 있는 비매각의 분타에 들어가자 이립(而立) 정도로 보이는 청수한 무인이 나의 얼굴을 보고는 다가와 말을 걸었다.
“우가장에서 온 선검수 청우가 맞는가?”
“맞습니다.”
“당장 철검파로 가게나.”
“철검파로 말입니까?”
“그렇네, 어서 가게나. 즉시 이행하라는 화산파의 명이네.”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한숨이 나왔다.
무인들이 모두 모여 있는 종남파, 사실 그쪽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런데 철검파로 가라고 하자 한숨이 나온 것이다.
‘빨리 끝내면 된다.’
가서 어떤 임무를 이행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철검파로 가라는 것이 임무인 것이다.
그렇다면 철검파에 가면 어떤 임무를 이행해야 할지 저절로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어서 가자.’
얼마 가지 않아 도착할 거리다.
관도(官途)가 아닌 숲속을 지나 도착한 문파.
휘잉∼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는 듯 조용했다.
보통의 문파라고 한다면, 문 앞을 지키며 문파를 대표하는 문지기들도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랑 식솔들이 있어 아무리 조용하더라도 근처에 소리가 들릴 정도인데, 이곳은 조용함의 범주를 넘어섰다.
‘모든 싸울 수 있는 무인들을 데리고 종남파로 갔다고 했지. 하인들만 남았다고 했고, 하인들이 이곳에서 기다릴 리가 없을 테니 아무도 없는 건가?’
그렇다면 할 일이 없어진다.
이 철검파를 방화(放火)하라는 임무만 아니면 말이다.
‘일단 들어가 봐야 알 수 있겠지.’
커다란 대문을 밀어 열자, 무척이나 넓은 철검파의 정경이 보였다.
그저 대문의 앞에서 본 것이건만 우가장의 세 배 정도의 크기는 될 것만 같았다.
‘이런 부(富)를 축적할 정도면, 솔직히 화산파에 싸움을 건 것이 이해가 갈 법도 하군.’
세간의 사람들은 진정한 구파의 힘을 모른다고 난 생각한다.
구파의 진정한 힘은 세간에 알려진 후기지수들도 아니고, 강호에서 활동을 했었던 장로님들도 아니다. 바로 세간에 알려져 있지 않은 고수들이다.
그중에서도 도문의 사람들. 그들은 세간에서 여간해선 활동을 하지 않기에 숨겨진 고수들이었다.
‘아무튼, 그렇다 하면 그렇게 겁먹을 이유가 없는데?’
뒤에는 비밀집단이, 그리고 앞에는 이렇게 엄청난 부(富)가.
화산파의 진격에 겁먹어 종남파로 갈 이유가 없었다.
‘일단 나중의 일.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렇게 오래 걸었건만 아직도 겉을 둘러본 것일 뿐이다.
더욱 깊숙이 들어가 봐야 했다.
그런데 그때, 무언가 익숙하지 않은, 머리를 띵∼하게 만드는 냄새를 맡았다.
‘이건 무슨 냄새지?’
맡아보지 못했던 냄새다.
하지만 조금씩 뜨거워지는 화끈한 열기에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기름! 그리고 불!’
왼쪽 끝에서 보이는 옅은 주황색과 붉은색의 향연.
퍽! 하는 소리가 들리며 불길이 더 거세지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기름을 뿌리고 있군. 철검파의 무인인가? 아니면 회라고 했던 비밀집단?’
보면 알게 되겠지.
점점 불길이 커져 가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커져 가는 불길,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올라 더욱 위험하게 보였다.
와르르!
불길에 의해 전각들이 무너져 내리고, 불똥이 튀었다.
장포 자락을 휘둘러 불똥을 걷어 내고, 불타서 무너져 내리는 전각의 잔해를 검으로 베어 내거나 절묘한 신법으로 피해 내며 수상한 기척이 느껴지는 곳에 도착을 했다.
“너는!”
온몸을 가린 어두운 색의 옷.
복면인이 나를 보자마자 삿대질을 하며 크게 소리쳤다.
“누구지?”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인가?
하지만 저런 복면인과 딱 달라붙는 검은 옷은 요즈음 무척이나 많이 봤고, 또 그 안의 사람을 구별하지도 못하기에 알아보지 못한다.
“어째서 네놈이 이곳에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잘됐군. 마침 그때의 여덟 명도 이곳에 있으니 말이다.”
“그때의 여덟 명?”
왠지 알 것만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