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화산천검 3권(2화)
1장 적은?(2)
저벅저벅.
연무장에 나의 발걸음 소리만이 울렸다.
그들의 앞에 서자 은우가 말했다.
“조금 빨리 왔군, 더 늦을 줄 알았는데.”
“용건이 일찍 끝나서 그랬다.”
“그런가? 뭐, 일찍 왔으니 좋은 일이지.”
은우가 으쓱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확실히 변해 버린 성격이다.
“오랜만이다.”
육언이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의미지?’
고개를 갸웃하자 육언이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내 손이 무안해지는군.”
육언의 말에 일단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그때의 일에 대한 사과다. 그때 제대로 사과하지 못했지 않나?”
“아직도 맘에 두고 있었나?”
“은원 관계는 확실한 편이라.”
피식 웃곤 금정일에게 고개를 돌렸다.
금정일이 시원스레 웃으며 말했다.
“더 강해졌군, 괴물 같으니라고. 역시 나의 맘에 든 남자야.”
“그런 취미는 없다.”
“하하하, 농담이다.”
금정일은 그때와 변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변한 것이 없는 것이 더욱 좋았다.
이 시원스런 성격은 변하지 않았으면 한다.
배운정에게 고개를 돌리자 배운정이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은 언제쯤 철이 들까? 저런 농담이나 해 대고. 얼마 있지 않아 금가장의 장주가 될지도 모르는데…….”
“그건 그때 일이지.”
금정일이 배운정의 이마를 툭 하고 쳤다.
고개를 돌려 패경욱을 쳐다보았다.
그때도 그렇고 별 교류는 없었던 패경욱.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고는 악소군에게 고개를 돌렸다.
악소군, 악연으로 만난 남자다.
하지만 은우가 변했듯이 이 남자도 조금 변해 있었다.
말없이 그저 손을 맞잡은 것뿐이지만 그때와는 달리, 얼굴과는 달리 온기가 느껴졌다.
그때와는 달리 조금은 정(情)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얼굴도 조금 부드러워져 있었다.
손을 풀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연화.
흔들리는 눈동자와 기묘한 표정.
일 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던 탓인지 연화는 무척이나 반가워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손을 흔들자 연화가 앞으로 다가서며 나의 배를 쳤다.
퍽!
“윽…….”
갑작스런 연화의 행동에 다른 사람들 모두가 연화와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 또한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인지 몰라 흔들리는 눈동자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일 년 동안이나 두문불출한 대가야.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밖으로 나왔어야지.”
“네가 오면 됐잖아.”
따지고 보면 연화가 오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격렬하게, 무언가에 빠져 있듯이 움직이는데 내가 어떻게 말을 걸어?”
“응? 왔었어?”
“그래. 것 봐, 눈치채지도 못했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말을 걸어?”
“아니, 왔었다면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았을 거 아냐. 근데 왜 때려?”
“몰라, 네가 알아서 생각해.”
이렇게 보면 어린 여자아이다.
삐져서는 토라진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알았어, 미안하다고.”
“흥,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
“약속은 못하겠네.”
“흥.”
“이봐, 이봐. 오랜만에 만났으면 즐거워야지 그 기묘한 분위기는 뭐야? 우리가 끼어들 수가 없잖아.”
금정일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시원스런 말투와 웃음에 조금 웃음이 났다.
“큭.”
“왜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분위기는 조금 풀린 건가?”
“그래, 풀렸다.”
“그거 다행이군.”
“그건 그렇고 다들 많이 변했군.”
모두의 얼굴을 쭉 훑어보며 말하자 육언이 말했다.
“일 년이라면 짧은 것 같아도,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 시간 안에 변화가 없을 리가 없지. 게다가 너와의 사건도 있으니 말이야.”
“내가 해 준 말의 의미는 깨달았나?”
제일 궁금한 것은 이것이다.
“다행히 조금은 깨달았다. 그러니 이렇게 모여 있을 수 있지.”
“하긴…….”
“하지만 화산파 내부의 사정은 아직 그렇게 좋아지진 않았다. 일단 선검수 쪽은 안정되었지만 보평제자들은 모르겠다. 장로님들도 다들 의견이 엇갈리는지라…….”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지.”
“그리고 좋은 쪽으로 해결되어야지. 아무튼, 너는 그럼 언제 떠나는 건가?”
다들 내가 무슨 행동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육언이 말하자 모두들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보면 부담되는데…… 아무튼 내일 떠나기로 했다.”
“일 년 만에 밖으로 나왔는데 바로 화산에서 하산하는 거냐?”
“…….”
“뭐, 이해는 한다. 그렇게 일 년이나 버틴 것도 대단한 일이지. 그럼 오늘이 마지막이겠군.”
“오늘이 마지막은 아니지. 철검파의 일이 끝나면 화산으로 바로 돌아와야지.”
“그렇군, 잘못 말했다. 그런데…… 무진 장로님의 현재 상황이 어떤지는 알고 있나?”
금정일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이런. 나오자마자 그게 가장 궁금했지 않았나?”
“사부는 강해.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혼자서 잘 극복해 내실 거야.”
“그래도 제자로서 이 정도는 예의인데…… 아무튼 모른다면 가르쳐 주지. 무진 장로님은 지금 화산파의 분타에서 고명하신 의원에게 치료를 받고 있다.”
“상태는?”
궁금해하지 않을 예정이었지만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 무척이나 궁금했다.
만일 더 듣지 못한다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일 년 전보다는 많이 괜찮아지셨다. 아직 의식불명이신 것은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뒤틀린 기혈이나 들끓는 내력은 바로잡았어. 더 이상 생명의 위협은 없다.”
“하아…… 다행이다…….”
금정일의 말에 가슴이 놓였다.
“그 의원이 보통 의원이어야 말이지…… 다름 아닌 성의라고.”
연화가 말했다.
“성의?”
왜 갑자기 그 이름이 나오는가?
악소군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무진 장로님이 계신 곳이 고릉현(高陵縣)이다. 그리고 그 고릉현의 옆, 섬서성의 중심인 서안에는 죽림현사 모청수의 죽림현학관(竹林賢學官)이 있다. 마침 성의께서 죽림현학관에 들렀고, 비매각이 그 정보를 입수해 재빨리 성의를 데리고 왔다. 성의의 의술은 수많은 의원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뽑히지. 심한 상세였는데도 일 년이나 꾸준히 치료를 해 주셔서 무진 장로님이 지금 이렇게 안정되신 거다.”
“그렇군…….”
성의께는 종남파와의 합동훈련 때 한 번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몸을 치료해 주신 의원.
그때에는 제자가 치료를 받고, 지금은 그 제자의 사부가 치료를 받는다.
은을 받기만 하여 가슴이 무거웠다.
“고릉현에 들를 거지?”
연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본래는 바로 우가장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예정이 바뀌었다.
이렇게 사부에 대한 얘기를 듣고, 성의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데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떠들고 있어도 돼? 준비할 것이 있지 않아?”
“준비할 건 없어. 그저 이 몸 하나와 세 자루 검, 그리고 가벼운 전낭(錢囊)만 있으면 되니까.”
“너무나 간단한 준비로군.”
“뭐 챙길 게 있어야지.”
어깨를 으쓱하자 연화가 툭 하고 치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쭉 있다가 내일 떠나면 되는 거야?”
“응, 그럴 예정이야. 피로야 운기조식을 한 시진 정도만 하면 되니까.”
“그래도 자 두는 것이 좋지 않아?”
“자는 것도 낭비야. 여기서 다시 취운암으로 가면 아마 또 검술을 훈련할걸?”
“그렇게 했는데도?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아?”
고개를 젓자, 연화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그건 그렇고. 너 평검수 유혁과 장일이 일주일 전에 들어왔다는 것은 아나?”
“응?”
유혁 사형과 장일 사형이?
“몰랐나 보군. 가 보는 것이 어때? 이미 화산파 내에서의 조사는 끝났어. 네가 가서 얘기를 해도 별 지장은 없을 거다.”
“알았다.”
“자, 그럼 모두 용건은 끝났으니 그만 헤어질까? 어차피 나중에 만날 건데 이렇게 계속 붙잡아 두기도 뭐하니까 말이야.”
금정일이 짝짝하고 박수를 치며 말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인사를 하고 연무장을 나왔다.
취운암으로 돌아가는 길을 따라 걷다 중간에 두 갈래 길에서 오른쪽으로 향했다.
왼쪽이 취운암, 오른쪽이 유혁 사형과 장일 사형이 있는 곳이다.
도우화 장로님과 소이련 장로님은 무척이나 친하시다.
그렇기에 거처도 매우 가까운 곳에 있다.
옛날에 처음 만나러 갔을 때 같이 훈련하고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가까운 거리에 비슷한 연배의 훈련 상대가 있으니 각자 제자를 데리고 훈련을 시킨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악동 두 명을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지만.
“거의 다 왔군.”
취운암과는 달리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얼마 걷지 않아 도착하였다.
예전에 만났던 그 연무장.
노을이 지며 구름이 주홍빛으로 빛나는 가운데 그 빛을 받으며 두 사람이 공터에 서 있었다.
아는 얼굴, 유혁 사형과 장일 사형이다.
다가가 인사를 하려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발걸음을 멈췄다.
검을 잡고 있는 유혁 사형과 장일 사형.
‘비무?’
기의 파장이 출렁거리며 뻗어 나왔다.
가운데서 맞부딪친 파장에 의해 모래 먼지가 휘날렸다.
‘대단하네.’
두 사형의 비무는 매우 오랜만에 본다.
몰래 풀숲에 숨어 지켜보았다.
시작은 유혁 사형부터였다.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서며 수직으로 내리긋는 검.
부드러우나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검신.
낙화검법이다.
장일 사형이 뒤로 일보 물러나며 검을 대각선으로 그었다.
그 일 검에 무수한 변화가 숨어 있었다.
조화검이다.
오랜만에 보는 낙화와 조화에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는지 두 사람의 검은 무척이나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고, 매서우면서도 여유가 있었다.
유혁 사형의 끊임없는 공격을 장일 사형은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방어해 내고 있었다.
보통 공격과 방어에 드는 힘의 비는 칠대 삼.
게다가 조화검은 방어가 칠, 공격이 삼인 검법이다.
저렇게 방어에 집중을 한다면 유혁 사형이 그 방어를 꿰뚫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혁 사형이 공격을 멈출 수도 없었다.
끊임없이 빈틈을 찾는 장일 사형의 눈과 공격을 흘러내며 빈틈을 유도해 내는 기묘한 검법 때문이다.
유혁 사형이 커다란 한 방을 노리려는 듯 뒤로 물러나 검에 기를 밀어 넣었다.
우우웅∼
터져 나오는 검명이 그 위력을 짐작케 했다.
장일 사형은 맞받아칠 의향은 없는지 끊임없이 움직이며 방위를 잡고 있었다.
“하앗!”
‘저건…….’
낙화검법의 마지막 초식, 낙천화다.
그 위력만큼은 그 어떤 사람도 무시하지 못하는 강렬한 초식.
장일 사형은 피해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는지 얼굴을 굳히며 검에 기를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