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화산천검 2권(6화)
2장 격돌(3)
챙! 채앵!
“하앗!”
캉!
마지막 한 자루의 겸이 왕정치의 손을 벗어나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끝이군.”
마진천이 중얼거리며 검을 늘어뜨리고 땅에 주저앉은 왕정치에게 다가갔다.
여유가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는 태도였다.
지이익∼ 지이익∼
마진천이 검을 땅에 끌며 왕정치의 앞에 섰다.
“재미는 없었지만, 살잠사나 독을 맛볼 수 있어서 그래도 괜찮은 경험이었다. 잘 가거라.”
왕정치를 일단하려 내려치는 검.
왕정치가 부들부들 떨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크하하하.”
왕정치의 손이 빠른 속도로 들리며 소매 춤에서 무언가가 마진천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마진천의 얼굴이 굳어져 갔다.
‘위험해…….’
시간이 느려진다.
세상이 마치 정지된 듯 보였다.
왕정치가 손을 들어 올리는 것에서부터 소매 춤에서 유엽비도(柳葉飛刀)가 날아가는 것까지.
모든 것이 느려진 세상에서 선명하게 보였다.
상단전을 통해 기가 빠져나갔다.
상단전에서부터 빠져나온 무형의 기운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 마진천의 목을 향해 날아가는 유엽비도에 다다랐다.
‘움켜쥐어.’
느릿느릿 날아가는 유엽비도를 무형의 기가 붙잡았다.
하지만 나의 무형기, 염력은 왕정치가 모든 기력을 쥐어짜서 던진 유엽비도에 실린 기보다 약했다.
‘그렇다면 방향을…….’
하지만 방향을 바꿀 능력은 있었다.
유엽비도의 날을 격했다.
탱!
유엽비도의 날의 끝 부분에서부터 서서히 방향이 바뀌어 갔다.
정확히 마진천의 목을 노렸다만, 나의 무형기와 부딪침에 의해서 유엽비도는 마진천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진천의 목에서 피가 튀었다.
하지만 즉사할 정도의 치명상은 아니었다.
크게 대소하던 왕정치의 얼굴이 푸른색 검영(劍影)에 가려졌다.
검영이 사라지고, 왕정치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광기 어린 얼굴.
“크아아!”
왕정치의 정수리에서부터 시작되어 다리 사이로 이어진 혈선.
혈선을 타고 왕정치의 몸이 양분되어 갔다.
촤아악!
내장이 흘러내리고,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잔인한 광경이지만 눈을 돌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것이 내가 무인으로 살아가면서 보아야 할 장면이다.
그리고 내가 죽이진 않았지만 내가 죽였어야 했고, 죽이는 데 일조한 자의 끝이다.
영혼의 무게.
복면인을 죽였을 때와는 다르다.
싸움이 끝나고 그것을 느끼자 새삼 살인의 무게가 느껴졌다.
왕정치의 영혼이 가슴을 파고 들어와 마음을 짓누른다.
이후로 내가 사람을 죽이면 언제나 이렇게 가슴이 무거워질 것이다.
그들에게도 그들의 삶이 있었고,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부수고, 무너뜨렸다는 것에 죄책감을 가지고 힘들어할 것이다.
하지만 극복해야 한다.
눈을 돌리지는 않는다.
그들의 영혼의 무게를 무시하고, 지나치지 않는다.
모두 내가 살아가며 짊어져야 할 것들이다.
마음을 다잡으며 왕정치의 영혼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마진천이 목 부분을 부여잡으며 주저앉았다.
“크으윽…… 독이 발라져 있었나…….”
마진천이 양분된 왕정치의 시체에 다가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해독단(解毒丹)…… 여기 있군.”
왕정치가 초염산을 뿌릴 때 먹었던 붉은 단.
마진천이 깨물어 먹고는 운기조식을 취했다.
잠시 후, 마진천의 모공에서 붉은 독이 빠져나왔다.
치이익! 치익!
땅이 녹아내릴 정도로 강력한 독이었다.
“후우…… 위험했군.”
마진천이 가부좌를 풀고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풀면 안 된다…… 이런 뜻이었군.”
싱긋 웃으며 마진천이 왕정치의 겸과 나의 검에 다가갔다.
검의 수실에 묶여 있는 살잠사를 끊어 버리고는 검을 나에게 던졌다.
“받아라.”
“읏!”
던져 준 검을 받아 들고는 허리춤의 검대에 찼다.
“이 겸은 저자, 왕정치가 무인으로서 강호에 초출할 때부터 쓰던 물건. 적이었고, 악랄한 자였지만, 이 정도 예의는 차려 주마.”
마진천이 축 늘어진 양분된 왕정치의 시신에 다가가 왼쪽과 오른쪽에 두 겸을 꽂아 넣었다.
“잘 가라.”
이제 미련은 없다는 듯 마진천이 시원스럽게 등을 돌리며 다가왔다.
“자, 가자.”
마진천을 따라 몸을 돌려 녹청산을 빠져나왔다.
총검문에 도착하자 이미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정문은 수문장과 문지기들이 지키고 있었다.
“정문으로 가서는 안 되겠지?”
“당연한 소리를. 장로들이 총검문 바깥에 나가지 말라고 했었을 텐데?”
“하아, 그럼 담장을 넘는 것밖에는 답이 없군.”
사사삭!
발을 스치는 풀잎의 소리가 크게 다가왔다.
문지기들이 조용히 속닥속닥하는 소리만이 들리는 정적 속이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담장의 아래에서 뛰어올라 벽을 박차고 다시 한 번 올라가려는 순간, 마진천이 외쳤다.
“위험!”
마진천의 경호성에 올라가던 중, 기지를 발휘해 벽을 발로 박차며 허리를 숙였다.
담장의 위에서 흑의의 복면인이 검을 내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악!
간발의 차이로 볼을 스쳐 가는 복면인의 숯 칠을 한 어둠 속에 동화된 듯한 어두운 색의 검.
“쳇, 방심했군.”
열 명의 복면인이 담장에서 뛰어 내려왔다.
“우리가 도망친 줄 알았나?”
“그럼. 주인을 버리고 도망칠 정도로 충성심이 넘쳐 나는 개인데 당연히 그럴 줄 알았지.”
마진천의 비꼬는 모욕적인 언사에 가운데에 서 있던 복면인이 움찔했다.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도발에 걸리지 않는다니. 그새 지능이 조금은 발달했나 보군.”
이번엔 참을 수 없었는지 맨 오른쪽의 복면인이 검을 뽑아 들며 달려들었다.
“아니었나 보군. 역시 멍청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마진천을 향해 달려드는 복면인에게 검을 내찔렀다.
휘릭!
몸을 뒤집으며 피하는 복면인이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된다.
퍽! 퍼억!
검을 위로 올려쳐 피할 방위를 선점한 뒤,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복면인의 얼굴을 가격하고, 발차기로 가슴을 가격했다.
날아가 아홉 명의 복면인 앞에 떨어진 복면인.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눈이 뒤집어져 있었다.
조금 과한 면도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이런 것이 나았다.
저들에게는…….
“무슨…….”
스걱!
날아간 복면인의 앞에 서 있던 복면인이 검을 들어 올려 내리쳤다.
피가 땅을 적시며,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었다.
“또…….”
부글부글 끓는다.
대체 동료를 무엇으로 아는지…….
마진천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살아 있었을 수도 있는데, 왜 죽였지?”
“패한 자는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 너희가 무사히 총검문에 도착한 것으로 보아 왕정치도 죽은 것 같은데?”
“흐음, 주인이었을 텐데 그렇게 마음대로 불러도 되나?”
“패한 자는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고 말했을 텐데. 우리의 주인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
“도망친 것은 패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나?”
“자신의 한계를 알고 싸우지 않고 도망쳤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
“좋은 자기 위안이다.”
마진천이 비웃었다.
복면인은 동요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다면 만약에 우리가 왕정치에게서 도망쳤다면?”
“그럴 가능성은 없다.”
“잘 알고 있군. 그럼 왕정치를 죽인 우리가 너희를 못 이길 것 같나?”
“우리 열 명, 아니 아홉 명이 합쳐도 왕정치는 이기지 못한다. 너희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렇다면 앞길을 막은 이유가 뭐지?”
“조금은 골려 주고 싶어서 말이야…….”
아홉 명의 복면인이 품속에 손을 집어넣고 무언가를 꺼냈다.
“투망(投網)? 그리고…….”
“큭큭. 벽력탄(霹靂彈)이다.”
“벽력마장(霹靂魔匠)의 벽력탄 말이냐?”
“당연한 것 아닌가? 어디 받아 보라고.”
푸화악!
아홉 명의 복면인이 순식간에 주변을 둘러싸곤 투망을 던졌다.
“이런!”
투망이 날아오는 속도가 빠르다.
복면인의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투망을 자르고 도망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탱!
“이건……?”
쇳소리가 나며 투망이 검을 튕겨 냈다.
당황하는 사이, 순식간에 투망이 마진천과 나를 덮었다.
“이건 대체…….”
투망의 비정상적인 단단함.
마치 금강석을 때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금강쇄망(金剛鎖網)이라는 물건이다. 회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물건이지.”
치이익∼
복면인들이 벽력탄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잘 가거라. 크하하!”
대소하며 벽력탄을 우리에게 던지곤 복면인이 순식간에 자리에서 벗어났다.
콰아앙!
눈을 멀게 하는 섬광과, 마치 천둥이 내리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벽력탄이 폭발했다.
3장 죽림현사 모청수(1)
복면인이 벽력탄을 던졌다.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느려져 갔다.
날아오는 아홉 개의 벽력탄.
왕정치와의 싸움으로 활성화된 상단전을 통해 기를 발출했다.
염력(念力).
상단전을 통해 발출된 기는 세 방향으로 나뉘어져 세 개의 벽력탄을 둘러쌌다.
손으로 잡고 누르는 상상을 하자 벽력탄의 타들어 가던 심지가 꺼졌다.
하지만 날아오는 힘은 그대로였다.
심지가 꺼져 놔두면 터질 일은 없지만, 다른 벽력탄이 터지면 같이 폭발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무리해서라도 복면인들을 뚫고 달아나야 했다.
잘못된 상황 판단에 의해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전장에서 잘못된 한 번의 상황 판단에 의해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좋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벽력탄에 의해 죽을 마당이니 아무런 소용이 없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마진천이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내달렸다.
하얀색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밝은 빛이 검에 감돌았다.
‘검기(劍氣)인가?’
아니었다.
복면인들에게서 보았던 그런 불안정한 검기가 아니었다.
완전히 유형화된 하나의 색(色)과 형(形)을 띤 기(氣).
강력한 기의 집약체.
‘아니다, 저건…….’
검강(劍|).
검기를 무 베듯 자르고,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 칭해지는 검강.
마진천이 그것을 발현해 냈다.
보는 것만으로도 베일 것만 같은 예기를 뿜어내는 기.
금강쇄망을 무 베듯 가뿐히 잘라 버리고, 날아오는 벽력탄 세 개를 잘라 버렸다.
마진천이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려 나를 쳐다봤다.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검강에 정신이 팔려 탈출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자책하며 모든 기를 다리로 모아 용천혈을 통해 발출시켰다.
단전에서 내려가 용천혈을 통해 발출된 기는 땅에 닿자 폭발하며 순간적인 추진력을 높여 주었다.
순식간에 마진천의 뒤를 따라잡고, 금강쇄망의 그물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심지는 눈 깜빡할 사이면 타들어 갈 정도로 매우 조금 남아 있었다.
달린다고 해도 폭발의 여파에 등이 찢어질 것이다.
마진천과 눈이 마주쳤다.
눈빛을 교환하고 자리에 멈추어 서며 기수식을 취했다.
아니, 기수식을 취할 시간도 없었다.
순식간에 마지막 절초를 전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