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화산천검 1권(5화)
2장 타통(1)
“헉…… 헉…….”
검을 땅바닥에 늘어뜨리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똑바로 하지 못할까! 지금 장난하는 것이더냐?!”
녹색의 장삼을 입은 노인.
하지만 이마에 주름살 하나 없고, 머리카락 또한 검은 흑발이었다.
높은 성취를 이룬 무인이었다.
“하아앗!”
나는 검을 다시 들어 올린 뒤 노인, 내 사부님인 무진 사부에게 달려들었다.
검 병을 꽉 잡고 오른쪽 대각선으로 내리쳤다.
캉!
하지만 무진 사부는 손쉽게 막아 내며 내 명치를 향해 손을 내질렀다.
펑!
“우욱!”
강력한 내력이 들어 있는 장(掌)에 경력을 해소하지 못하고 뒤로 날아갔다.
“그게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느냐? 변화가 있어야지, 변화가! 그렇게 직선적으로 움직이면 삼류무인들이나 검에 맞지, 이류 정도만 되도 손쉽게 막고 반격할 수 있는 것을 아직도 모르느냐?”
사부의 호통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검 병을 잡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하아앗!”
이번엔 제대로 들어갔다.
검극이 흔들리고, 검신이 낭창낭창 휘어졌다.
연검과도 같이 흔들리는 검.
검첨에는 매화검로(梅花劍路)의 증거인 붉은색의 매화가 나타나 있었다.
“그래, 그거다.”
무진 사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중하게 내 검을 막아 갔다.
챙! 챙! 챙! 채채챙! 탱그랑!
무진 사부가 모든 변화를 파훼하고 내 손목을 금나수(擒拏手)의 수법으로 잡자 손에서 힘이 빠지며 검이 땅으로 떨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멈추거라.”
“허억…… 허억…….”
난 대답할 힘도 없기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곤 자리에 털퍽 하고 주저앉았다.
“오늘은 그래도 제법 성취가 있구나. 다섯 개의 매화라니, 저번보다 한 개가 더 늘었다.”
매화검로의 증거인 매화.
매화검로를 극성으로 익혔을 시에 나타나는 매화의 수는 열다섯.
현재 내가 최대한으로 그려 낼 수 있는 매화는 다섯 개.
매화검로의 삼분지 일 정도를 익혔다는 소리다.
“겨우 이 년 만에 잘도 이 정도 성취를 이뤘구나.”
내가 말하기는 뭐하지만, 난 천재는 아니지만 기재라고는 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무공을 극성으로 익히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어떤 무공은 평생을 걸려도 모자랄 수 있다.
그런 무공을 이 년 만에 사 성의 성취를 이뤄 냈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대단해 뿌듯했다.
“후우…… 후우…….”
내가 보평제자에서 직전제자가 된 지 겨우 이 년.
그 짧은 기간 안에 평생 동안 익혀도 모자랄 정도의 무공인 매화검로의 사 성의 성취를 이뤘다. 아무리 매화검로를 집중적으로 배웠다고는 하나 이 정도면 내가 생각해도 매우 만족할 만한 성취였다.
하지만 기쁜 마음도 잠시, 한계 이상으로 노동을 한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나는 서둘러 가부좌를 틀고 자하심법을 운기했다.
구결을 외우며 숨을 들이쉬고, 길게 내쉬었다.
청량한 기운이 몸속을 휘젓고, 반은 단전으로, 반은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온몸의 피로가 모두 풀리고, 몸이 푹 자고 일어난 것만 같이 쌩쌩해졌다.
난 현재까지 화산파의 수많은 심법 중 자하심법만을 배우고 운기해 왔다.
다른 뛰어난 심법, 예를 들자면 홍하심법(泓荷心法)이나 정청심법(正淸心法)을 배울 수도 있었지만, 나는 자하심법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또한 사부도 자하심법이 다른 심법보다 진기를 모으는 것이 느리기는 하지만 가장 정심하다고 하여 다른 심법을 권유하지 않았기에 보평제자들이 배우는 심법인 자하심법만을 배운 것이다.
“후우…….”
눈을 떴다.
그러자 눈에 보이는 사물이 조금 더 밝고, 선명하게 보였다.
“눈이 더욱 밝고, 깊어졌구나.”
사부의 말이 들렸다.
어느새인가 나도 모르게 하나의 벽을 뛰어넘은 것이다.
“다 쉬었으면 따라오거라.”
“예.”
대답하며 빠르게 걸어가는 무진 사부의 뒤를 따라갔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취운암.
내가 이 년 동안 살아온 거처이자 무진 사부의 집이었다.
“음식 준비.”
“예.”
음식 준비.
음식 준비는 내가 무진 사부의 직전제자가 되고 난 후에 내 일상생활이 되어 버렸다.
오늘의 요리는 취운암 뒤편의 밭에서 채소를 따서 만들기로 정하고 밭으로 걸어갔다.
“어?”
그때 누군가가 보였다.
“청우야.”
올해로 열넷이 된 내 친구, 홍연화였다.
“응? 무슨 일이야?”
직전제자가 되고 나서 잘 만나진 못했지만,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이상 꾸준히 만난 나와 제일 친한 친구 중 하나, 아니 유일한 한 명이다.
동문 중 친했었던 유정호도 있었으나, 유상필을 때려눕힌 이후로 나를 두려워해 멀어졌다.
그렇게 내 유일한 친구는 연화뿐이었다.
유일한 친구라, 찾아가도 내가 먼저 찾아간 것이지 연화가 먼저 날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기에 나는 호기심을 느꼈다.
“그냥 만나고 싶어서 왔어. 왜, 오면 안 돼?”
연화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 되겠다, 조금만 더하면 삐치겠어.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있겠어?”
손을 빠르게 내저으며 말하자, 연화가 얼굴을 풀며 소매춤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사실 말이야, 이것 봐라! 짜잔!”
눈앞에서 동색의 패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오각형 모양에 중앙에 매화가 그려진 패의 아랫부분에는 ‘매화선검수(梅花先劍手)’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우와! 매화선검수?! 오용 칠현을 통과한 거야?”
“응. 전술 부분이 아슬아슬했지만 그래도 평균점 이상으로 합격했어.”
연화는 자랑하듯이 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매화패를 흔들어 댔다.
“우와, 부럽다. 난 아직인데…….”
부러워하며 말했다.
난 아직 선검수가 되지 못했다.
아니, 보평제자로 시작해서 선검수가 된 연화가 이상한 것이다.
화산파의 후기지수들의 배분은 다음과 같다…….
보평제자(保平弟子). 무공을 배우고 싶어 하는 평범한 아이들에게 무공을 전수하는, 커서 대부분 강호에서 자리를 잡아 문파를 창건하거나 표국을 이끌어 가는, 강호에서의 화산파의 버팀목이 되는 최하위급의 제자.
속가제자. 유명한 가문의 자제들이 돈을 내고 들어와 무공을 배우고 하산하면 화산파와 연계하여 상업을 하거나 본래의 문파를 이끌어 가는 제자들.
직전제자. 보평제자나 속가제자 중 무공에 특출 난 자질이 있거나, 장로들의 마음에 든 아이들이 각 장로의 직전의 제자가 되어 무공을 배우는 제자들.
그리고 그 후기지수들의 지위는 이렇게 나누어진다.
육지검사(六智劍士), 육지권사(六智拳士). 육지(六智)의 관문을 통과한 제자들로서 이때서야 비로소 보평제자, 속가제자, 직전제자나 상관없이 화산파의 진정한 절기를 배우게 된다.
내가 육지검사이기에 매화검로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직전제자이기에 육지검사로서 배우지는 못하지만 사부에게서 많은 화산파의 절기들을 견식하며 안계를 넓히는 것이다.
선검수(先劍手). 오용(五勇) 칠현(七賢)의 관문을 통과한 제자들로서 이때에는 선검수를 관리하는 장로님에게 친히 매화선검수라고 쓰여진 패를 받는다. 육지검사, 육지권사보다도 뛰어난 절기를 배운다. 예를 들어 매화삼릉검, 태을미리장과 같은 것들을 말이다.
매화검사(梅花劍士), 매화권사(梅花拳士). 선검수를 넘어서 장로의 바로 아래에 있는 지위의 후기지수들. 이들은 매화이십사검수(梅花二十四劍手), 매화십팔권사(梅花十八拳士)로 불리며 강호에서는 나한전(羅漢展)의 소림승, 무당의 오행검사(五行劍士)와 더불어 구파의 삼대무력단체로 불린다. 아니, 그렇게 불렸었다. 지금은 조금 떨어져 종남파의 십검수보다 조금 높게 평가된다.
이것이 장로 이전의 제자들끼리의 지위다.
그중 나는 육지검사. 육지의 관문을 통과한 제자다.
그리고 연화가 선검수. 오용과 칠현의 관문을 통과한 제자다.
대부분의 선검수는 속가제자, 직전제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평제자들은 거의 다 육지검사나, 육지검사에서 끝으로 하산하기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선검수로 올라가기 전에 대부분 장로님들에게 선택받아 직전의 제자가 되기에 보평제자 출신의 선검수는 거의 없다.
그런데 보평제자로 시작한 연화가, 그것도 여자가 선검수가 되었으니 이것은 화산파에서도 거의 일대 파란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
뭐, 연화는 솔직히 조금 특별했다.
내 유일한 친구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 장로님들의 앞에서 자랑하지는 않았으나 뒤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친구였다.
그렇게 매일같이 노력했으니 이 정도는 당연하겠지.
“네가 취약한 게 어디였지?”
“음…… 칠현 중 진법 부분.”
난 다른 부분은 모두 평균 이상이지만 칠현 중 진법에 매우 약하다.
오죽하면 현재 무진 사부가 진법은 포기하고 다른 쪽에서 뛰어난 점수를 받아 선검수 시험에 합격시키려 들까.
“그래? 진법 부분은 사상(四象), 오행(五行), 육합(六合), 칠성(七星), 팔괘(八卦), 구궁(九宮), 음양(陰陽), 태극(太極)을 이해하는 부분이라서 내가 도움을 줄 수가 없네…….”
아쉽다는 듯 말하는 연화.
나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 그 마음에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괜찮아, 괜찮아. 다른 쪽에서 점수 보충하면 되니까.”
기쁘게 웃으며 말하였다.
그리고 이후론 밭에 가면서 수다를 떨었다.
다른 아이들은 수준이 어떻다느니, 어떤 제자가 새로 들어왔다든지 그런 얘기들.
소소한 얘기들을 하며 채소를 따고, 밥을 만들고, 죽을 끓였다.
이 년 동안 해 오다 보니 매우 익숙해져 다른 일을 하며 음식을 할 수도 있었다.
솥에서 끓는 죽을 휘휘 저으며 뒤쪽에 서서 구경하는 연화에게 말했다.
“근데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아, 오늘은 하루 종일 자유야. 우영 사부가 특별히 휴가를 준댔어.”
우영 장로님이라고 하면 무진 사부가 내 직전의 사부가 되고 나서 보평제자들의 새로운 스승으로 발령 난 그 장로님이다.
“그럼 먼저 사부님께 인사하는 것이 어때? 하루 온종일 여기 있을 거고, 또 장로님께 먼저 인사하는 것이 예의잖아.”
“응, 알았어.”
연화는 대답하곤 취운암으로 신법, 암향표(暗香飄)를 전개하며 달려갔다.
“우와. 대단한데?”
연화의 경공은 나와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었다.
경공으로 일절을 이룬 무진 사부에게 직접 사사받은 나와 비교해도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저것이 밤낮으로 매일 노력한 결과다.
저것을 보자,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절실히 느꼈다.
“다음번엔 비무나 한번 해 볼까?”
좋은 생각 같았다.
선검수에 이른 연화보다야 당연히 뒤떨어지겠지만, 승부에 관계없이 서로의 무공을 시험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 죽 다 됐다.”
죽이 팔팔 끓자 나는 그릇에 담고는 쟁반과도 같은 나무판 위에 얹었다. 그러곤 그걸 두 손으로 들고 취운암을 향해 걸어갔다.
취운암에 도착하자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와 ‘허허허’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연화와 사부의 목소리였다.
연화는 무진 사부와 잘 아는 사이다.
당연한 것이, 제자의 가장 친한 친구인 연화를 사부로서 모를 리가 없잖은가?
나는 떠들고 있는 그들의 옆에 조용히 서서 음식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