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
253화
청운의 몸에서 은은한 묵광과 청광이 피어나더니 뒤섞이며 어우러졌다.
모든 무공은 한계에 다다르면 벽을 넘을 깨달음이 필요하다. 벽을 넘은 무공과 넘지 못한 무공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엄청난 차이가 있다.
지금의 청운은 이미 현경의 벽마저 넘어서서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는 구두룡의 무공을 자유자재로 융합할 수 있었다.
거기다 암흑의 대지에서 얻은 새로운 검이 더해진 순간!
쿠오오오!
묵직하고 장엄한 기운이 검에 맺혔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 환음천군이 먼저 선공을 가했다.
콰아아아아!
붉은 회오리가 청운을 으깨버릴 것처럼 휘돌며 밀려들었다.
찰나였다.
청운이 묵검을 뻗자 벼락이 한 줄기 쭉 뻗어나갔다.
시선으로 쫓을 수도 없고 몸으로 반응하기에는 더더욱 어려울 만큼 빨랐다.
환음천군도 전력을 다해 대항했다.
환음천군의 몸 주위에 혈기가 뭉치면서 둥근 호신강막을 형성했다.
팡!
호신강막은 벼락에 맞고도 출렁일 뿐 뚫리지 않았다.
청운은 재차 검을 뻗었다. 호신강막이 뚫리지 않았다 하나 아무런 충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콰-앙! 콰광!
귀청을 찢어버릴 것 같은 굉음이 두세 번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마침내 호신강막이 터져나가면서 벼락이 환음천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환음천군 역시 자신의 호신강막이 뚫린 걸 알고는 마지막 힘을 모아 장력을 쳐냈다.
쩌적! 떠더덩!
환음천군은 가슴이 쩍 갈라진 채 튕겨져 나가고, 청운도 뒤로 주르륵 물러선 뒤 멈춰 섰다.
청운은 울컥, 목구멍에서 피가 솟구치는 걸 참고 앞을 노려보았다.
가슴이 쪼개진 환음천군이 쓰러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가 몸을 떨 때마다 가슴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이겼어.’
진정으로 강한 자였다. 대장군보다도 더 강한 듯했다.
청운은 그 자리에 서서 운기를 하며 들끓는 진기를 진정시켰다.
환음천군이 죽으면서 용음사의 격전도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괜찮으냐?”
그제야 혈황이 다가오며 물었다.
청운은 괜찮다고 말하면서 혈황의 위아래를 살펴보았다.
어디에서 얼마나 싸웠는지 옷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제 발 저린 혈황이 먼저 변명을 했다.
“어떤 놈들이 정 소감을 죽이려 하지 뭐냐. 그래서 정 소감을 지키려다 보니 이렇게 피를 많이 묻혔다.”
그러고는 청운이 더 묻기 전에 돌아섰다.
“네가 무사하니 정 소감에게 가봐야겠다. 부상을 당했거든.”
“많이 다쳤습니까?”
“많이는 안 다쳤는데, 그대로 놔두면 흉터가 생길지 몰라.”
청운은 혈황을 붙잡지 않았다. 당분간은 정 소감 곁에 두는 것이 나을 듯했다.
근데 정 소감이 정말 많이 다친 걸까?
걱정이 되었다.
청운은 쓴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돌려 태산의 깊은 계곡을 바라보았다.
‘뇌불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자신과 마존령, 무림맹이 용음사를 치는 동안, 백가장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고, 사도맹은 뇌불사를 공격하기로 했다.
뇌불사는 혈승들이 있던 곳이어서 천황교와 관계가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알아본 바에 의하면 인원이 이백여 명에 불과했고, 혈승 수십 명이 죽어서 이제는 백오십여 명이 전부였다.
그들 정도라면 사도맹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듯했다.
* * *
용천관도 청운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상당수의 혈승들이 죽은 만큼 남은 힘이 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사도맹 단독으로 공격했는데, 막상 공격하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저항이 거셌다.
단순히 저항이 거센 것만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용천관조차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고수가 있었다.
“아미혈타불! 어리석은 중생들을 이 혈불님이 지옥으로 인도하겠노라!”
미친 소리를 내뱉으며 등장한 승려는 승복만 붉은 것이 아니라 얼굴과 온몸이 붉었다.
그 승려를 본 용천관은 경악해서 눈을 부릅떴다.
“혈뇌불?”
한쪽에서 혈승들과 싸우던 팽천기도 경악성을 발했다.
“혈뇌불이 맞소이다, 맹주!”
혈뇌불은 오십 년 전 죽은 것으로 알려진 극악한 마승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들을 동자승으로 받아들인 다음 자신의 보신과 공력 증진을 위해 정혈을 갈취했다.
그 진실이 밝혀졌을 때는 혈뇌불이 동자승 일백 명의 정혈을 갈취한 후였다.
무림은 정사를 가리지 않고 혈뇌불을 공적으로 지목하고 추적해서 죽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십 년의 추적 끝에 천자산의 단애에서 마침내 그를 죽였다.
다만 죽어가던 그가 단애 밑의 폭류 속으로 떨어져서 시신을 찾지 못했는데, 수십 년 동안 나타나지 않다 보니 죽은 것이 기정사실처럼 된 터였다.
그런데 이곳 뇌불사에 있었다니!
더구나 그의 나이 구십이 다 되었을 텐데도 겉으로는 오륙십 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동자승의 정혈을 갈취해서 자신의 젊음을 연장한 듯했다.
그렇다면 그러한 생활을 이곳에서도 했을지 모른다.
“이 극악한 혈승아! 내가 네 목을 쳐서 어린 동자들의 한을 풀어줘야겠다!”
용천관도 이십대 때 혈뇌불을 쫓는 추적대에 몸을 담은 적이 있었다.
그때 죽은 것이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죽여야 했다.
검을 움켜쥔 그는 십성 공력을 끌어올리고 혈뇌불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맹주! 저도 함께 손을 쓰겠소이다!”
부맹주 팽천기가 큰 소리로 외치며 날아들었다.
용천관은 그의 도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도맹의 맹주라 하나 상대는 오십 년 전에도 적수를 찾기 힘들었던 혈뇌불이다.
지금은 비록 나이를 먹어 어떨지 모르지만, 외모가 오륙십 대로 보이는 걸 보면 전보다 더 강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하세!”
용천관과 팽천기는 혈뇌불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존심을 뒤로하고 협공을 결정했다.
혈뇌불은 화경을 넘어 현경에 들어선 고수 둘이 협공해오자 이마를 찌푸렸다.
“아미혈타불! 원한다면 함께 지옥으로 보내주마!”
용천관과 팽천기의 합공을 단독으로 받아낼 수 있는 자가 천하에 몇이나 되라.
그런데도 혈뇌불은 두 사람의 협공에 대등하게 맞섰다.
세 사람이 싸우면서 발생한 광폭한 기운은 일대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심지어 옆에 있던 불당마저 산산이 부서져서 폐허가 되어버렸다.
멋모르고 그들 근처로 다가왔던 자들 역시 엄청난 기운에 몸이 터져서 핏덩이로 변해 죽고 말았다.
용천관은 혈뇌불의 가공할 무공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혈뇌불이 손을 뻗으면 크기가 두 자나 되는 붉은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그 손바닥에 스친 것은 바위든 나무든, 모든 것이 가루로 부서졌다.
팽천기는 십여 초식을 겨룰 때쯤 이미 내상을 입어서 안색이 창백한 상태였다.
이대로 흐른다면 자신들이 이기기는커녕 혈뇌불에게 죽을지도 모른다.
용천관은 사도맹주만이 익힐 수 있는 마지막 무공을 꺼내들기로 했다.
본래는 천황교주와 싸울 때 비장의 무공으로 써먹으려고 했던 것인데, 혈뇌불에게 당하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놈! 마승아! 이것도 받아봐라!”
노성을 내지른 그는 검과 하나가 된 채 혈뇌불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가 잡고 있는 검에서 휘황한 검기가 솟구쳤다.
마검폭참공.
자신의 기운을 응집해서 배 이상 강력한 검강을 펼칠 수 있는 무공이었다.
단점이라면 삼 초 이상 펼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마검폭참공을 삼 초나 펼치고도 상대를 이길 수 없다면 애초에 자신의 적수가 아니란 말이었다.
콰아아아아!
날아드는 검강을 바라본 혈뇌불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곧 눈을 치켜뜬 혈뇌불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아미혈타불!”
순간, 혈뇌불의 번쩍 든 두 손에서 붉은 강기가 소용돌이처럼 휘돌았다.
혈뇌불은 소용돌이처럼 휘도는 붉은 강기를 용천관을 향해 밀어냈다.
천둥소리가 일대를 뒤흔들었다.
콰르르르릉!
날아가던 용천관의 몸이 허공에 멈춰 선 채 후들후들 떨렸다.
충격이 큰지 안색이 창백해지고, 입술 사이에서는 피마저 흘러나왔다.
“맹주!”
팽천기가 그 모습을 보고는 전 공력을 끌어올린 채 신형을 날렸다.
혈뇌불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용천관을 상대하는 것이 중요하긴 하나 자신의 하체를 향해 달려드는 팽천기도 무시할 수 없었다.
혈뇌불은 할 수 없이 한 손을 내려 팽천기를 향해 쭉 뻗었다.
막 혈뇌불의 허리를 베어가던 팽천기가 쾅!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날아가는 팽천기의 가슴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동시에 방어가 약해진 혈뇌불의 기운을 뚫고 용천관의 검이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혈뇌불은 용천관의 검에 조금 전까지보다 배 이상 강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는 걸 눈치채고 눈을 부릅떴다.
“이놈이!”
혈뇌불은 날아드는 검을 보며, 다시 좌수로 용천관을 향해 장력을 뻗었다.
퍽!
하지만 용천관의 검이 그의 이마를 꿰뚫고는 머리마저 터트려버렸다.
동시에 혈뇌불의 좌수도 용천관의 몸을 강타했다.
혈뇌불은 머리가 반쯤 터져나간 채 쓰러지고, 용천관은 삼 장이나 날아간 뒤 떨어졌다.
“맹주!”
사도맹 간부들이 소리치며 달려왔다.
안간힘을 다해 상체를 세운 용천관이 팽천기 쪽을 보며 소리쳤다.
“나는 괜찮다. 부맹주부터 살펴봐라! 어서!”
* * *
용음사가 무너졌다는 소식은 일각도 되지 않아서 천황에게 전해졌다.
“방금 뭐라 했느냐?”
권태로운 천황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질문을 받은 전령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미 그의 머리는 천황의 일장에 산산이 부서졌기 때문이었다.
천황은 그자의 옆에 시립해 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말해봐.”
“예!”
시립해 있던 자가 혼신의 힘으로 떨림을 막으며 말했다.
“환음천군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놈들이 기습해서 싸움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환음천군이 그곳에 갔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마저 이청운에게 패해서 죽었다고 합니다.”
설명을 다 들은 천황은 미간을 찌푸렸다.
“환음천군이 이청운과의 대결에서 패하고 죽었단 말이지?”
“예, 천황이시여.”
“그놈, 일취월장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강해지는구나.”
두어 달 전만 해도 그렇게까지 강하진 않았다.
대장군과의 싸움에서도 가까스로 이겼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대장군보다 월등히 강한 환음천군이 이청운에게 패하고 죽었다.
“뇌불사 쪽은 어떠하냐?”
“사도맹에서 뇌불사 쪽으로 은밀히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사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싸움이 붙었을 것이옵니다.”
뇌불사는 혈승들이 드러나는 바람에 포기했다.
물론 그냥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아마 사도맹만 갔다면 그들은 그곳에서 많은 피를 흘려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쯤 놈들이 월광장과 이곳 총단까지 모두 찾아냈을지도 모릅니다.”
“하긴 여태 그것도 모르면 병신이지.”
톡톡톡.
천황은 짜증 난 표정으로 한마디 하고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깊은 생각에 빠졌던 천황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숨긴다고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들어오도록 놔둬라.”
“하오나…….”
십이장로 중 하나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다가 바로 닫았다.
천황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있다가 공격받는 것과, 철저히 준비를 하고 있다가 상대하는 것과 어느 쪽이 나을 거라 보느냐?”
“그거야 당연히 준비하고 있는 쪽이…….”
“어차피 놈들은 여기저기 공격하다가 힘이 절반은 빠질 거다. 그럼 상대하기가 그만큼 쉬워지겠지.”
사실 단순한 병법이었다.
그런데도 십이장로는 세상에 다시없는 병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감탄하며 허리를 숙였다.
“천황의 말씀이 백번 맞사옵니다!”
“참으로 하늘이 놀라고 땅도 놀랄 계책이시옵니다!”
“과연 천황이십니다! 놈들은 곧 천황의 발아래에서 벌레처럼 죽어갈 것이옵니다!”
천황은 그들의 아부에 가까운 찬양을 들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 칠흑 같은 어둠이 꿈틀거렸다.
‘그래, 언제까지 줄다리기만 할 순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