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7
247화
* * *
퍽!
삼 장이나 날아가서 널브러진 자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전에 모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숨 쉬는 것조차 조심했다.
화경에 이른 고수가 머리가 부서진 채 기괴하게 뒤틀려 있다. 황궁에 대한 처리를 어리석게 했다는 죄목으로 일격에 죽은 것이다.
“멍청한 것.”
천황은 높은 단상 위에서 파리를 쫓듯 손을 한 번 휘두르고 이마를 찌푸렸다.
분노를 털어내는 대가로 정보책임자를 쳐 죽인 그는 석상처럼 굳어 있는 장로와 간부들을 바라보았다.
나이 팔십이 넘은 노인부터 사십대까지 스물두 명이 긴장한 채 시립해 있었다.
“힘없는 황제 하나 처리하지 못해서 하늘을 뒤집는 일을 그르치다니. 쯔쯔쯔…….”
혀를 찬 그가 시립해 있는 사람 중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늙은 노인을 향해 물었다.
“인경, 하후경은 그대가 추천했지? 왜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보는가?”
하얀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진 노인이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하후경이 너무 안일했사옵니다. 총교주님 말씀대로 일단 황제의 팔다리를 잘라내고 감옥에 처박았으면 모든 걸 알아서 바쳤을 텐데…….”
천황교의 십이장로 중 태두이자 삼경(三卿) 중 하나인 황인역이었다.
황제의 팔다리 잘라내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를 보며 천황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내가 그러지 않았나? 하후경은 대가 너무 굵어서 부리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황제야 언제든지 죽일 수 있었다. 그래서 하후경을 뜻대로 하게 놔두었다.
대신 무림맹과 사도맹 놈들을 황도로 끌어 모아서 모조리 쓸어버리려 했다.
그런데 영웅심인지 만용인지 몰라도, 대장군 하후경이 직접 황제를 잡겠다며 황궁무고로 들어갔다가 죽으면서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이 늙은이가 미처 총교주님의 하늘을 꿰뚫는 심기를 헤아리지 못했사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천황은 혀를 놀리며 빠져나가려는 황인역을 짓눌러서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손을 쓰진 않았다. 그를 죽이면 귀찮은 일을 대신 해줄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어쨌든 황제가 다시 일어섰으니 귀찮게 되었어. 거기다 벌레 같은 무림 놈들까지 합세했으니…….”
그때 눈치를 보던 육순 노인 하나가 입을 열었다.
“총교주, 일단 이청운이란 어린놈부터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교활한 눈을 굴리며 입을 연 그는 십이장로 중 서열 아홉 번째인 남교익이란 자였다.
“놈은 분명 우리의 치기 위해 움직일 것이옵니다. 무림맹과 사도맹, 백가장까지 모두 그놈의 입김이 닿아 있으니, 현재로선 본교의 천하지대계에 가장 방해가 되는 자라 할 수 있사옵니다.”
“이청운. 이래저래 그놈이 문제군.”
신혈교, 노룡회, 그리고 이번에는 황궁.
일이 틀어진 곳마다 그놈이 안 낀 곳이 없었다.
그런데도 천황은 그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분노 대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대단한 놈이야. 그놈을 조금만 일찍 알았어도 내 사람으로 만드는 건데…….”
손자인 혁련휘와 얽힌 관계 역시 아쉬웠다. 혁련휘 때문에라도 놈은 절대 자신의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휘아가 신공을 완성하면 놈만큼 될 수 있을까?’
혁련휘는 현재 모종의 장소에서 천황교의 비전대법을 시행하는 중이었다. 천황의 호법인 천황삼로가 이 자리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대법만 성공한다면 혁련휘는 단번에 현경의 경지를 넘어서서 자신에 근접한 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철저히 짓밟아서 제거해야겠지.”
나직이 말을 뱉은 그가 발아래 시립해 있는 간부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남 장로 말대로 놈들은 본교를 공격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몰려올 거다. 놈들에게 본교의 위대함을 알려줘라! 이 기회에 놈들을 쓸어버리고, 본좌가 친히 황도로 가서 황제의 목을 칠 것이니라!”
시립해 있던 장로와 간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복명!”
“대천황의 명을 받드옵니다!”
* * *
황제는 청운이 출정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정녕 떠날 생각이더냐?”
“떠나는 것이 아니옵니다. 역도들을 치고 다시 돌아올 것이옵니다. 그들을 처단하지 않으면 또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사옵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황제는 같은 일이 또 벌어질 수 있다는 말에 몸을 가볍게 떨었다.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절대 안 되었다.
“알겠다. 그럼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돌아와서 나라를 지키는 일에 힘을 써라.”
“알겠사옵니다, 폐하!”
“오호평천대장군에 황군을 움직일 수 있도록 어검을 하사할 것이다. 십만 황군을 네 마음대로 움직여서 그들을 쳐라!”
“황공하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다음 날.
황도를 출발한 무림맹과 사도맹은 백 리의 거리를 두고 이동했다.
본래 사이가 안 좋던 그들은 황궁의 일이 마무리되자 다시 신경전을 벌였다.
할 수 없이 백가장이 그 사이에 끼어 완충 역할을 했다.
황제의 윤허를 받은 청운은 마존령만 데리고 백가장과 함께 움직였다.
혈황도 정 소감과 동행했는데,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다.
백가장의 장로 중 몇 사람이 그를 줄기차게 의심의 눈초리로 힐끔거리는 것이다.
‘흥! 제 놈들이 어쩔 거야?’
혈황은 옆에서 걷는 정 소감을 슬쩍 돌아다보았다.
평복을 입은 정 소감이 저 앞쪽에서 걷는 청운과 백청청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전히 남장이었는데 왠지 힘이 없는 표정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예?”
“나만 믿어. 내가 어떡하든 청운이가 너를 버리지 못하게 해줄 테니까.”
정 소감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저는 괜찮습니당.”
“괜찮긴 뭐가 괜찮아? 맨날 한숨만 쉬면서.”
“…….”
“그리고…… 이제는 그 빌어먹을 환관 목소리 좀 내지 마라.”
“죄송합니당.”
“끄응…….”
“…….”
청운은 거리가 상당한데도 혈황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혈황이 그만 들을 수 있게 고의로 전음처럼 목소리를 쏘아 보낸 것이다.
‘나는 진짜 정 소감을 동생처럼 생각했을 뿐인데…….’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러니 정 소감이 여자라 해서 갑자기 남녀 간의 정이 들 리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반감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저 환관으로 알았던 정 소감이 여자라는 걸 알고 받은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을 뿐.
‘가만? 그때 다 봤을 텐데…….’
문득 황궁무고에서 자신이 옷을 다 벗고 만났을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홀딱 벌거벗은 몸으로 정 소감을 껴안았지 않았던가.
그때를 떠올리니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알았나 뭐…….’
“가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청운은 옆에서 백청청의 목소리가 들린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응? 아, 아무것도 아니오.”
“근데 왜 두 번이나 물어도 대답이 없어요?”
“그, 그랬소? 내가 잠시 딴생각을 했나 보군.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 수 있겠소?”
“정 소감 말이에요.”
‘헉!’
청운은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심장이 멎을 뻔했다.
“참 안됐어요.”
“…….”
“동생처럼 생각하신다면서요. 잘해 주세요.”
참 마음씨도 고운 백 소저다.
그런데 진실을 알아도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 알았소.”
어쨌든 그건 나중 일.
청운은 굳게 마음먹고 당장 눈앞의 일에 충실하기로 했다.
‘혼나면 말지 뭐.’
* * *
우려했던 것과 달리 덕주에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대항은 없었다.
덕주에서 황하까지 삼백 리, 황하를 건넌 후 백 리를 가야 태산이다.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천황교를 치기 위해 나선 연합세력에 이상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무림맹 측에서 사도맹과 다른 경로를 통해 천황교를 공격하겠다고 나온 것이다.
제갈신기가 불가함을 역설했지만 무림맹 장로와 각 문파 장문들의 주장이 너무 완강했다.
-사도맹과 함께 싸우다 놈들이 등을 치면 어떡한단 말이오?
-사도맹을 신경 쓰며 싸우는 것보다는 단독으로 싸우는 게 낫소이다.
-천황교의 양팔이라 할 수 있는 신혈교와 노룡회가 무너졌는데, 우리 힘만으로 그들을 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소이까?
-천하는 우리 무림맹이 지켜야 합니다.
-사도맹의 사악한 놈들에게 공을 넘겨줄 수는 없습니다.
-이 대인도 사도맹의 마존령주 아닙니까? 더구나 혈황의 제자로 의심되는 자와 함께 다니던데… 아무래도 저들은 믿을 수가 없소이다.
무림맹 입장에서는 하나하나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다.
때문에 제갈신기도 강력하게 주장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그가 사도맹과의 협력을 계속 주장하자, 무림맹 인사들 중에서는 그를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다.
심지어 사도맹에서 뭔가 이득을 취했을 거라는 말조차 흘러 다녔다.
그러던 차에 사도맹에서도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분노를 터트렸다.
-흥! 우리도 무림맹과 함께하지 않을 거다.
-위선자 놈들이 하는 말마다 짜증나게 하는군.
-우리가 아니었으면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것 같아?
-당장 길을 따로 갑시다, 맹주!
청운이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서 사도맹 간부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사도맹 간부들도 그동안 쌓인 게 많았다.
무림맹은 자신들만이 정의라는 듯 사도맹을 깔보기 일쑤였다. 가끔은 바라보는 눈에 경멸의 빛이 역력해서 한바탕 붙어보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무림맹이 노골적으로 갈라져서 공격하자고 하자, 잘됐다는 심정이었다.
“이번에는 자네의 부탁을 들어주기 힘들 것 같네.”
용천관부터 무거운 표정으로 청운의 중재를 거부했다.
그동안 의외라 할 정도로 청운을 지지했던 맹천기조차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네, 령주. 아무래도 무림맹 놈들과 함께 작전을 펼치는 건 어려울 것 같군.”
청운은 그들의 뜻을 꺾기 힘들다는 걸 알고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좋습니다. 사도맹이 무림맹과 함께할 마음이 없다면 제가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서로 간의 연락망만큼은 유지시켜 주십시오.”
“그거야 어려울 것 없지. 무림맹 놈들이 우리 정보를 믿을지 모르겠네만.”
용천관은 흔쾌히 허락하면서도 무림맹에 대한 불신을 감추지 않았다.
“또 하나, 상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도맹에 여유가 있으면 지원을 보내주십시오.”
“무림맹에서도 그렇게 할 거라 생각하나?”
“그쪽에도 같은 조건을 내걸겠습니다.”
“신혈교 공격할 때의 일을 잊은 건 아니겠지?”
용천관의 계속된 말에 청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왜 모를까. 무림맹이 지원대를 늦게 보내는 바람에 사도맹의 피해가 더욱 커졌었지 않은가.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저들도 멍청이가 아닌데 같은 일을 두 번 반복하겠습니까?”
청운이 무림맹을 멍청이 운운하자 용천관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가 수염을 쓰다듬더니 넌지시 물었다.
“자네는 우리 사도맹의 마존령 령주네. 그런가, 아닌가?”
그렇게 묻는 이유를 청운이 왜 모를까.
-너, 우리 편이냐, 저쪽 편이냐?
그런 질문이다.
청운이 짐짓 발끈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치켜떴다.
“무슨 말씀입니까? 설마 저를 마존령주 자리에서 쫓아내려고 그런 말씀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그런 게 아니라…….”
“서운하군요. 제가 사도맹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의심을 하시다니요.”
“허어,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용천관이 난감한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맹천기가 그 모습을 보고는 재빨리 나서서 화제를 돌렸다.
“험, 령주께 하나 물어볼 것이 있네. 령주와 함께 다니는 운청이란 청년 말이야.”
청운도 그 말을 듣고는 더 이상 용천관을 다그치지(?) 못했다.
“말씀하시지요.”
“혹시…… 혈황의 제자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