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마존-246화 (246/257)

# 246

246화

* * *

청운은 위진천의 말을 듣고 고민에 빠졌다.

원칙대로라면 눈 딱 감고 이 기회에 처리해버리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들을 처리한다고 해서 복마전 같은 황궁이 깨끗해진다는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너무 맑은 물에서는 고기가 살기 힘들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후우, 다 핑계일지 모르지만, 스승님 말씀대로 그들을 모두 죽일 수도 없는 일…….’

청운은 결심을 굳히고 위진천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대신 스승님께서 보셨을 때, 살려 백성에게 득이 될 자와 해가 될 자를 가려주십시오. 그럼 제가 황상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진천은 한시름 놓고 편안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가린다는 것 또한 어렵고 지난한 일이지만, 최소한 안타까운 죽음만은 막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알았다. 그리하마.”

* * *

청운은 역모사건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혈황과 마주앉아서 그동안 가슴에 담아놨던 일을 따졌다.

“아니, 어쩌자고 혈황신공을 펼치신 겁니까? 지난 며칠 동안 제가 몇 사람에게 혈황신공에 대해 질문을 받은지 아십니까?”

싸움 와중에 혈황이 펼친 무공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나왔다. 청운은 모른 척했지만 의심의 눈초리가 완전히 거두어지지 않았다.

혈황도 할 말은 있었다.

“그럼 그 자리에서 죽으랴?”

뚱한 표정으로 반박한 혈황이 고개를 돌렸다.

청운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후우……, 일단 우기지요.”

“뭐? 뭘 우겨? 그럴 거면 이참에 내가 혈황이라고 밝혀버리자.”

“그런다고 누가 믿기나 하겠습니까? 지금도 혈황의 제자 아니냐고 묻고 있는 판인데.”

“제자는 무슨…….”

“그것만으로도 무림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올지 모릅니다.”

“흥! 한번 해보라지.”

혈황은 콧방귀를 뀌며 물러서지 않았다.

“이것들이 목숨 걸고 도와줬더니 나를 무림공적으로 몰려고 해?”

“그들이 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일없다. 내 보자 하니까. 백가장이 제일 따지는 같은데 맞지?”

“…….”

청운은 말을 잇지 못했다.

혈황의 말대로 백가장이 꼬치꼬치 캐묻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전 혈황이 이끄는 혈사천교가 백가장을 공격했었다. 결국 물리쳤지만 수많은 식솔이 죽었다. 그때의 원한을 백가장은 잊지 않고 있었다.

“너 청청이랑 헤어져라.”

“예? 아니 거기서 왜 백 소저가 나옵니까?”

“왜? 싫어?”

“저는 평생 백 소저와 함께할 것입니다.”

청운이 마음을 준 여인은 백청청뿐이었다.

지금 세상에 삼처사첩을 두는 일이 흠은 아니다. 그러나 청운은 백청청 한 명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혈황이 콧방귀를 뀌며 혀를 찼다.

“너 청청이 말고 다른 여자 있잖아.”

“무슨 말씀이세요. 여자라고는 백 소저 말고는 만난 적이 없는데.”

생각해보면 몇 명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녀들과 인연이 그리 깊지 않을뿐더러 애초에 여자라고 생각도 안 했다.

“이런 눈치 없는 놈! 이놈아 있잖아 한 명!”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요?”

“정 소감.”

“예?”

“그 애, 알고 봤더니 여자다.”

청운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머, 뭐라고요?”

“귀먹었느냐? 정 소감이 여자라고.”

“아니,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청운은 따지듯이 혈황에게 물었다. 그러나 혈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 녀석 가슴이 절벽인 건 맞아. 등가죽에 붙었지. 그런데 무공을 익힌 뒤로 이만해졌다니까?”

혈황은 자신의 가슴에 양손을 대고 무언가를 움켜쥔 듯한 흉내를 냈다. 청운의 얼굴이 붉어지며 확 구겨졌다.

‘정 소감이 사실은 여자였다고?’

이 무슨 짓궂은 장난이란 말인가.

그런 청운의 반응에 신이 난 듯 혈황이 청운 곁에 딱 붙어서 말했다.

“넌 좋겠다.”

“조, 좋긴 누가 좋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말이 안 되잖습니까.”

인정할 수 없었다. 동생이라 생각한 정 소감이 사실은 여자라니.

하지만 혈황은 청운을 놀리듯이 반문했다.

“뭐가?”

“여자가 어떻게 환관이 될 수 있습니까?”

“있다던데.”

청운의 반문에 딱 잘라 말하는 혈황이다. 청운 역시 그런 예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젠장, 그러고 보니 환관 중에 여자도 있었지.’

어린 남성의 성기를 제거하고 궁에서 일을 하는 자들을 환관이라 불렀다. 그런데 남자가 아닌 여아를 환관으로 들여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궁에서 필요한 숫자를 구하지 못할 때.

그런 경우 문책을 걱정한 환관들이 특별히 여아들 중 남자같이 생긴 이를 가려 뽑았다.

후일 들키게 되면 문책이 따르지만 그건 후일에 벌어질 일이다. 또한, 특별히 큰 문책도 따르지 않기에 암암리에 거세한 남자 아이인 듯 여아를 환관으로 밀어 넣는 경우가 있곤 했다.

할 말을 잃은 청운을 향해서 혈황이 쐐기를 박았다.

“알았으면 가서 협상 잘해라. 확 나서서 까발리는 수가 있다.”

그건 아니 될 말이다.

정 소감을 환관으로 만든 이는 큰 잘못이 없지만, 정 소감은 나라를, 황제를 속였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다.

청운은 혈황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무 치사하신 것 아닙니까?”

“이 상황에서 치사하다는 말이 나오냐? 너도 좋지 않으냐? 네 녀석이 그토록 아끼던 정 소감이 사실은 여자라는 것이.”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를 어떻게 아시고!”

“아, 몰라. 아무튼 백가장 그 빌어먹을 놈들에게 말 잘해라. 확! 엎어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혈황은 짐짓 화가 난 듯 몸을 획 돌렸다.

청운은 그런 혈황의 등을 노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게 무슨 일이야…….’

* * *

혈황과 헤어진 청운은 그 길로 정 소감을 찾아갔다.

“정 소감은 어디 있느냐?”

“니에, 정원 태감과 함께 있으시옵니다. 소인을 따라오시지요.”

지나가는 환관을 붙잡고 정 소감의 행정을 물은 청운은 그 환관을 따라서 정 소감이 있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정원 태감과 정 소감이 담소를 나누는 곳에 도착한 청운은 정 소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흠, 확인할 게 있어서 왔다.”

“니에, 말씀하시지용.”

“흠흠…….”

청운은 당당하게 말을 꺼냈지만 곧장 물어보지 못했다. 곁에 정원 태감이 있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쉽게 꺼낼 말은 아니었다.

청운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건 정원 태감이었다.

“에잉, 알게 되었는가?”

“예? 설마 태감께서도 아시고 계셨습니까?”

“물론이지. 내가 궁에 들인 아이니 알지.”

“그 무슨?”

청운은 정원 태감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환관들의 수장이 어린 환관들을 뽑는 일에 관여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정원 태감은 한숨을 깊이 쉬며 정 소감을 보았다. 정 소감은 여전히 두 눈을 반짝이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사실 길재는, 아! 정 소감의 원래 이름이 길재네.”

“알고 있습니다. 첫 만남에서 들었습니다.”

정 소감을 처음 만나서 구해주었던 객잔에서 들었던 이름이다.

정원 태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내 어렸을 때 동무가 있었네. 나는 환관이 되었고 그 친구는 학사였지. 늘그막에 결혼을 해서 낳은 아이가 여기 정 소감이네.”

정원 태감은 옛일을 회상하듯이 말했다.

죽마고우인 친우가 관리가 되어 다시 만났는데 그만 사화에 연루되어서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할 처지였다.

그렇게 되면 남자아이는 죽임을 당하고 여아는 노비로 끌려간다.

정 소감이 태어나는 해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정원 태감은 길재라는 남자 이름을 붙여 정 소감을 보살폈다.

그렇게 정 소감을 몰래 돌보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정 소감을 궁으로 들였다.

“내가 나서서 꼼수를 좀 부렸네.”

“아!”

사화에 연루되었다면 삼족을 멸하는 중형에 처해진다. 노비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아갈 정 소감을 정원 태감이 구한 셈이었다.

정원 태감은 청운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이제 이 아이는 자네가 돌봐주게.”

청운은 이렇다 할 확답을 주지 않고 정 소감을 보았다. 해맑은 눈동자가 두 눈에 가득 담겼다.

‘그러고 보니 태감께서 정 소감을 각별히 아낀 이유가 있었군.’

친우의 마지막 남은 후손이 정 소감이었다. 그러니 남색을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청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 소감은 여전히 제게는 친아우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돌볼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청운의 대답에 정원 태감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뭣이라? 동생?’

실컷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했더니 돌아온다는 말이 동생이란다.

‘역시 마음에 안 들어.’

학사라는 족속들은 이런 부분이 문제다. 고리타분하고 앞뒤가 꽉 막힌 생각 말이다.

“크흠. 아무튼 이 일은 비밀이니 그리 알게.”

정원 태감은 일단 한발 뒤로 물렀다.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사실을 알았고,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 수작을 부리는 일은 일도 아니다. 자신이 괜히 환관의 우두머리겠는가?

* * *

며칠이 빠르게 흘렀다.

그동안 청운은 황제를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칼을 휘둘렀다.

스승이 부탁한 자들 외에는 가차 없이 역도를 처단했다.

이왕야와 그의 측근들에게도 사약이 내려졌다.

다만 왕야의 핏줄은 황족이라는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전과 같은 권력과 재산은 모두 빼앗겼다.

그들에게 주어진 건 작은 장원 한 채와 약간의 땅이 전부였다.

천하를 휩쓸었던 역모사건이 정리되자, 청운은 무림세력의 대표들과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진행했다.

청운은 처음부터 칼을 뽑아들었다.

“이제 천황교를 치지요.”

선전포고와 같은 그 말에 다른 이들 역시 동의했다.

“드디어 시작인가?”

무림맹주의 말에 앞에 앉아 있던 사도맹주 용천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백철군이 물었다.

“놈들의 위치는 알아냈는가?”

청운은 제갈신기를 바라보았다.

제갈신기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동안 조사한 바에 의하면, 태산 인근에 천황교의 총단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태산이 넓다 하나 현재 일천 명의 무사가 그물을 치듯 훑어가고 있습니다. 며칠만 지나면 확실한 위치가 밝혀질 것입니다.”

“태산이라…….”

청운이 그쯤에서 다시 말했다.

“일단 무사들을 태산 인근으로 이동시키면서 소식을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백철군이 제일 먼저 찬성했다.

“나는 찬성이네.”

어차피 백가장으로 돌아가려면 남하해야만 했다.

무림맹주 양조생과 사도맹주 용천관도 반대하지 않았다.

현재도 함께 있는 것이 껄끄러웠다. 차라리 그 핑계를 대고 따로따로 떨어져서 이동하는 게 나았다.

그런데 용천관이 청운에게 물었다.

“령주도 함께 갈 건가?”

그는 청운을 령주라고 불렀다. 마존령과 청운이 사도맹의 일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청운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저도 함께 갈 겁니다.”

천황교의 교주가 어느 정도 고수인지, 그곳에 얼마나 많은 고수가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저 신혈교와 노룡회를 비교해서 짐작하는 게 전부일 뿐.

현경의 경지를 넘어선 청운은 천하를 뒤흔든 천황교 교주와 승부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혁련휘만큼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죽일 작정이었다.

‘기다려라, 혁련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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