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
241화
“안녕하셨습니까.”
정이품 자덕대부는 고위관료다. 무관으로 치면 표기장군을 넘어서는 품계를 지닌 실세였다.
“황상께서 자네를 많이 찾으셨네.”
“그 때문에 이리 달려왔습니다.”
“저 소저는……?”
이기가 백청청을 보며 물었다.
청운은 대충 둘러댔다.
“아, 저와 함께 온 소저입니다.”
“백청청이에요.”
백청청이 인사를 하자, 이기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간단한 인사가 오간 후 청운은 사정을 설명했다.
정 소감이 황제를 구할 때 보낸 연락이 마지막이었기에 현재의 황궁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이기는 청운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내가 알아보겠네. 쉬면서 조금만 기다리게.”
“감사합니다, 대인.”
이기는 식솔과 자식들도 내보내서 정보를 최대한 모았다. 자식들도 관리였기에 단순한 정보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병사들도 관복을 입은 그들을 건들지 못했다.
결국 황궁으로 들어갔던 둘째 아들이 중요한 정보를 전해왔다.
-황제께오서 환관들과 함께 황궁무고에 숨어들었다고 함. 워낙 철저히 단속해서 그 이상 자세한 상황을 알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음.
급히 썼는지 먹이 마르지 않아서 번진 곳이 많았다.
이기가 그 소식을 듣고 직접 나서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내가 황궁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네.”
“대인, 위험합니다.”
“아니, 황상을 구하는 일인데, 목숨이 아까울까!”
“송구합니다.”
청운은 이기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내 서둘러 다녀올 것이네. 진무사가 이처럼 고생하는데 제국의 대신이라는 자가 그냥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기는 의관을 정제하고 장원을 나섰다. 그 모습이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일각쯤 지났을 때였다.
백청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가가, 뭔가 좀 이상해요.”
“무엇이 말이오?”
“이 대인 본인은 물론, 자제들도 모두 밖으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잖아요. 아무리 우리를 돕기 위해서라지만,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어요.”
청운은 흠칫했다. 그는 백청청을 비밀리에 호위하는 백야대 대원을 불러냈다. 백야대 대원 다섯이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
“이 대인의 가족이 장원 안에 있는지 알아보시오. 밖의 정황도 알아보시고.”
“예, 령주.”
오래 걸릴 것도 없었다. 반각도 되지 않아서 백야대 대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장원 안에는 가솔 몇 명만 있을 뿐, 이기의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하인에게 물어봤더니, 잠깐 볼일이 있다면서 모두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었다.
다른 백야대원이 굳은 표정으로 들어와서 보고를 올렸다.
“황군과 수상한 자들이 이곳을 향해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를 악문 청운은 내공을 급히 퍼트리고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려서 일대를 살펴보았다.
‘젠장!’
백야대원의 말대로 사방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상당한 기운을 지닌 자들이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납시다.”
그가 백청청과 몸을 날리려는데, 장원의 정문이 거칠게 열리며 장수와 병사 십여 명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 중 선두에 서 있던 장수가 이청운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반역도 이청운은 순순히 무릎을 꿇어라!”
청운은 그냥 경공을 펼쳐서 장원을 벗어날까 했다.
장수나 병사들이 평범해 보이는 자들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힘으로는 자신과 백청청, 백야대 대원 다섯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병사들을 따라서 이기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가 득의한 표정으로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이청운! 모두 끝났다. 당장 무기를 버리고 포박을 받아라!”
이기는 대장군을 따르는 병사들이 함께해서인지 위엄 있는 모습을 보였다.
청운이 그런 이기를 다그쳤다.
“일국의 정이품 자덕대부라는 자가 황제 폐하를 구할 생각은 안 하고 역적들과 뜻을 함께하다니! 어찌 이럴 수 있다는 말이더냐!”
“닥쳐라! 네놈은 이미 봉고파직 당하고 수배중인 자가 아니더냐! 알량한 권력을 미끼로 전횡을 일삼던 놈이 누구에게 역적 누명을 씌우려는 것이냐!”
이기는 뛰어난 입담으로 정이품 자덕대부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청운의 다그침에도 주눅 들지 않고 거꾸로 쏘아붙였다.
청운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구나! 폐하의 은혜를 모르는 놈이 그동안 나라의 녹을 받아먹고 살았다니! 개도 너처럼 굴지는 않을 것이다!”
“흥! 너 같은 역적이 어찌 감히 나를 욕할 수 있단 말이냐!”
두 사람이 말싸움을 벌이자, 범같이 생긴 장수가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이 대부, 그만하시지요.”
이기를 말린 장수가 뜻 모를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청운에게 말했다.
“경공을 펼쳐서 빠져나갈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이곳은 사방에 포위되어 빠져나갈 수 없느니라. 살고 싶다면 순순히 무릎을 꿇어라, 이청운.”
청운은 그 장수를 노려보았다.
범상치 않은 자였다. 지닌 기운도 무척 강해서 결코 일반 장수라 할 수 없었다.
‘저놈, 대장군을 따른다는 자구나.’
대장군 하후경이 천황교와 연결된 만큼 측근 장수들 중에 천황교의 고수들이 있다고 봐야 했다.
앞에 있는 자도 천황교의 인물인 가능성이 컸다.
문제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잡으러 왔다면, 고수들을 대동했을 거라는 점이다.
그리고 청운의 예상대로, 지금 장원을 포위한 자들은 척천일로군과 함께 대장군 하후경의 손발이나 다름없는 팔황삼군(八荒三軍)이었다.
팔황삼군은 천, 지, 인 삼군으로 나뉘는데, 청운을 잡기 위해 온 자들은 인군(人軍)이었다.
그런데 앞의 장수를 바라보던 청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이었다.
체구도 눈에 익었다.
‘어디서 본 자지?’
청운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한참 동안 시간을 거슬러 가며 기억을 더듬던 청운이 눈을 치켜떴다.
“네놈! 그때 그놈이구나!”
청운이 일갈하며 살기를 일으켰다.
장수, 하후표가 피식, 조소를 지었다.
“밤인 데다 죽립을 썼었는데도 내 얼굴을 알아보다니, 역시 삼원을 한 놈답게 기억력이 좋군.”
청운은 이를 갈았다.
앞에 있는 자는 장원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산중에서 일행을 습격했던 자들의 수장이 분명했다.
“네놈을 그렇게 찾으려 했거늘, 대장군 휘하에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
“흥! 그동안 네놈 소식은 잘 듣고 있었다. 네놈이 살아나는 바람에 나는 변방으로 쫓겨나서 모래바람을 씹어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 다시 만났으니 그 비천한 목숨을 확실하게 죽여주마.”
장수, 하공표의 몸에서 강맹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족히 절정 이상의 경지에 오른 자만이 뿜어낼 수 있는 기운이었다.
금의위 백위장과 큰 차이가 없었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청운은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전에 비해 훨씬 강해진 걸 보니, 대장군이 개밥처럼 던져준 혈룡단이라도 왕창 먹었나 보군.”
하공표의 얼굴이 붉어졌다.
“목이 떨어져 나간 다음에도 그렇게 지껄일 수 있는지 보자, 이놈!”
“나 역시 너를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다. 그러지 않아도 네놈을 찾아서 천하를 뒤졌거늘,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오다니…….”
청운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금의위를 잊은 적이 없었다. 항상 그들에게 미안했었다.
그런데 마침내 그들을 죽인 자가 눈앞에 있었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은 금의위의 영전에… 네놈의 목을 베어 기쁘게 받쳐주마.”
청운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르릉.
하공표도 즉시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오냐! 이놈! 죽고 싶다면 죽여주마! 쏴라!!”
잠깐 사이 장원으로 들어온 병사들의 숫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 중 칠팔십 명이 활을 겨누고 있다가 명령이 떨어지자, 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화살 수십 발이 청운과 백청청을 향해 날아갔다.
“백 소저를 보호하시오!”
청운이 백야대 대원들에게 소리치고는 검을 빼어 크게 원을 그렸다.
직경 일 장이나 되는 검막이 방패처럼 형성되었다.
화살은 멧돼지조차 한 방 맞으면 꼬꾸라진다는, 강력한 위력을 지닌 철시였다.
하지만 청운이 강기로 펼친 검막을 뚫지 못하고 모조리 튕겨나가거나 부러졌다.
“놈을 쳐라!”
“우아아!”
“쳐라!”
화살 공격으로는 청운을 어쩌지 못하자, 병사들이 창을 앞으로 뻗은 채 달려들었다.
그들이 쓰는 창은 일반 병졸이 쓰는 창과 형태가 조금 달랐다.
창날 옆에 칼날이 붙어 있어서 옆으로 베는 것도 가능한 기형 창이었다.
철저히 살인을 위해 만들어진 창.
게다가 그들은 합공에 능수능란해서 마치 한 몸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청운과 백청청, 백야대원들을 곤란하게 할 수 없었다.
단 몇 초식을 펼치는 사이 칠팔십 명이 쓰러졌다. 개중에는 불같이 화가 난 백청청의 장력에 쓰러진 자들만 해도 이십 명은 되었다.
“어디서 감히 꼬챙이를 내밀어!”
그녀가 천강지존수를 펼칠 때마다 병사 서너 명이 훌훌 날아가서 널브러졌다.
백야대원들은 그녀를 보호하면서 적을 하나하나 쓰러뜨렸다.
그때 장원을 포위하고 있던 자들이 안으로 날아들었다.
“놈은 우리가 맡으마!”
그들은 복장부터가 무공을 펼치기 편한 무복이었다. 상당수가 절정급에 오른 고수였고, 대여섯 명은 그 이상의 경지처럼 보였다.
청운도 그들은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개개인이야 일초지적에 불과했다.
문제는 숫자가 많아서 백청청이 장안에서처럼 다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청운은 백청청의 뒤를 보호하면서 그들을 상대했다.
하공표는 싸움이 자신의 예상대로 흐르지 않자 이마를 찌푸렸다.
‘놈의 실력이 저 정도였나?’
청운의 실력에 대한 소문은 귀가 따갑게 들었다. 하지만 하공표가 아는 이청운은 무공의 무자도 모르던 애송이였다.
그 짧은 시간에 그런 고수가 되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직접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제길, 대장군과 필적할 고수 아닌가.’
하공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곧 자신이 몸을 떤 사실에 흠칫 놀랐다.
‘내가 저놈을 두려워하다니.’
하공표는 이를 악물며 부하들을 몰아붙였다.
“죽여라! 인정 봐주지 말고 놈을 죽여!”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늘어나는 건 수하들의 시신이었다.
수하들의 시신이 쌓일수록 그의 가슴에 쌓이는 두려움도 커졌다.
그때 청운이 흑마룡의 기운을 끌어올린 채 검을 크게 휘둘러서 칠팔 명을 단숨에 베어버렸다.
그 가공할 광경에 하공표는 물론, 병사와 인군의 고수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청운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면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 와중에도 청운의 시선은 하공표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놈은 어디 있느냐? 네놈 조카 휘 말이다.”
청운이 하공표를 보며 물었다.
혁련휘는 노룡회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천황교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결국 놈이 있는 곳을 알아내면, 비밀에 쌓인 천황교의 총단 위치도 알아낼 수 있을지 몰랐다.
하후표는 이를 악물며 비릿하게 웃었다.
“크크크, 공자께서 곧 네놈을 찾아갈 것이다. 그때까지 목을 잘 씻고 기다려라.”
그 순간, 청운이 검을 들었다.
허공이 일자로 갈라졌다.
서걱!
하공표가 입을 벙긋했지만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머리가 옆으로 미끄러져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먼저 가서 기다리거라. 휘도 곧 보내주마.”
털썩.
하공표의 머리 잃은 몸이 그대로 무너졌다. 피분수가 목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인군의 고수들이 몸을 날려서 장원을 빠져나갔다.
청운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원수 중 한 놈을 찾아내 목을 쳤는데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았다.
“혁련휘, 다음에는 네 차례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청운은 옆을 바라보았다.
백청청이 아직도 씩씩거리고 있었다.
이기는 싸움이 시작됨과 동시에 도망가서 보이지 않았다.
* * *
한편, 북경성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마존령과 백야대 대원들 중 일부가 발각된 것이다.
이기의 고자질로 청운을 따르는 마존령이 황도에 들어왔다는 게 알려진 터였다.
팔황삼군 중 지군 일천 명이 그들을 잡기 위해 직접 나섰다.
거기다 하후경은 최측근 고수들을 보내서 그들을 지휘하게 했다.
마존령과 백야대원들이 고수라 하나, 그들을 잡기 위해 나선 자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