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
240화
* * *
한편, 황궁무고에 숨어든 황제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황궁무고를 지키는 수호 무사들이 강하기는 하지만 이들만으로는 대장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
황제는 불안한 마음에 자신 곁을 지키는 석덕조에게 말했다.
“석 천호, 정 소감은 어찌 되었느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무사의 친우인 운청 공자께서 치료하고 있으니 곧 차도가 있을 것입니다.”
혈황은 정 소감을 구한 후 비밀통로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정 소감은 내상이 깊어서 정신을 잃고 말았는데,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이 황궁무고라는 것이었다.
황궁무고에는 영약이 다수 있어서 어지간한 내상은 치료가 어렵지 않을 듯했다.
더구나 황궁무고 구석진 곳에는 혈황도 말로만 들었던 만년음양청옥석이 있었다.
침상처럼 반듯한 형태였는데, 선반처럼 이런저런 물건이 그 위에 쌓여 있었다.
전에 청운과 들어왔을 때는 보지 못했던 기물이었다. 아마 그때 봤다면 청운의 무공 증진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뭐 이것도 다 이놈 복이지.”
혈황은 영약을 정 소감에게 복용시키고 만년음양청옥석에 눕힌 다음 자신의 기운으로 약효를 인도했다.
그가 공력을 일으켜서 정 소감에게 주입하자, 만년음양청옥석이 은은한 비취색을 발산했다.
만년음양청옥은 태고 때부터 천지의 기운을 품고 있는 신석으로 알려져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태곳적 황제 헌원이 동방의 신선에게 받은 물건이라고 전해지기도 했다.
전설로만 회자되던 물건이 황궁무고에서 물건을 올려놓는 선반으로 사용되고 있었다니, 기가 찰 일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요 녀석을 치료하기 쉬워졌군.”
혈황은 일단 자신의 진기로 소주천을 시킨 후 약효가 전신 세맥까지 퍼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웃통이 벗겨진 정 소감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이 점점 괴이하게 변했다.
“아무리 봐도 이건 구화보전 때문이 아닌 것 같은데.”
구화보전을 제대로 익히려면 여인이거나 남성을 제거한 자여야 한다. 여인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남성을 제거한 이는 여인같이 변한다.
그런데 이제까지 남성을 제거한 환관인 줄 알았던 정 소감의 가슴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정 소감의 상체가 여인의 것과 같았다. 가슴이 봉숭아처럼 먹음직스럽게 봉긋했다.
혈황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확, 바지를 벗겨서 확인해?”
하지만 말만 그렇게 할 뿐, 아랫도리를 벗기지는 못했다.
“에잉, 말자.”
궁금하기는 했지만, 괜히 못 볼 걸 볼지도 몰랐다. 환관 놈들의 흉한 상처를 보면 사흘은 밥맛이 없을지도…….
“그런데 이 녀석은 왜 안 일어나는 거야? 내가 혈황진기까지 불어넣었는데.”
이미 정 소감에 대한 치료는 끝났다. 세 가지 영약과 영단이 소모되었고, 자신의 진기로 약효를 극대화시켰다.
덕분에 자신은 막대한 공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이놈의 팔자는 어찌 이리 기구한 것인지. 내가 전생에 무슨 잘못을 그렇게 해서…….”
솔직히 하긴 했다. 한번은 수백 명을 단숨에 죽인 적도 있다.
그 생각이 들자 콧등만 씰룩거릴 뿐,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제길, 그게 언제 적 일인데…….’
* * *
푸르스름한 야명주가 빛을 발하는 통로에 일단의 무리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황궁무고로 통하는 통로를 새롭게 개척하는 자들이었다.
대장군의 명을 받은 그들은 최대한 조심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파고들었다.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했음에도 기관에 의해 수십 명이 죽어갔다.
하지만 대장군의 측근들이 뒤에서 칼을 들이대고 있으니 멈출 수도 없었다.
그렇게 며칠, 마침내 미로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황궁무고로 통하는 마지막 관문이 나온 것이다.
그 일을 지휘하는 대장군의 측근 장수가 길을 뚫고 있는 지휘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무사들을 보낼 것이니 그들과 함께 다시 일을 진행하라.”
“예! 장군.”
한편, 황궁무고에 숨어든 황제 일행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벌써 열흘 넘게 지났구나. 이대로라면 놈들에게 모두 사로잡힐 것이야.”
황제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의 대답에 함께하는 이들이 고개를 숙인 채 대꾸하지 못했다.
그때 꾀꼬리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폐하, 신이 있사오니 걱정하지 마시옵소성.”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일제히 향했다.
한 사람이 어둠 저편의 통로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정 소감이었다.
정 소감은 내상을 모두 치료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황제 앞에 섰다. 혈황이 그 곁에서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 정 소감, 이리 오너라.”
황제는 건강한 모습의 정 소감을 반갑게 맞이했다.
정 소감은 황제가 불안감을 느끼지 않도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청운 대인께서 도착하실 때가 다 되었습니당. 그때까지만 이곳을 지키면 되니 소인을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옵소성.”
“하아, 그래? 그래, 그래야지. 너에게 모든 것을 맡기마.”
황제가 힘없이 답했다.
그로서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만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이 아니었다.
정 소감은 황제의 마음을 안정시킨 후 서늘한 눈빛으로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았다.
황궁무고를 지키는 비밀 무사들이 석상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에게 눈을 맞춘 정 소감이 명령하듯이 말했다.
“기관진식만으로 놈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직접 움직일 것이니 준비들 하세용.”
“예.”
비밀 무사들의 수장이 고개를 숙였다. 직위는 소감이지만 황제가 전폭적으로 믿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황제가 모든 것을 맡긴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그의 명령이 곧 황제의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막아!”
“으윽.”
“병사들을 불러라! 어서 컥!”
길을 개척하던 자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통로가 무너져 내리며 길을 막았다.
벽이 갈라지며 황제를 따르는 비밀 무사들이 튀어나와 석공과 병사들을 죽였다.
정 소감은 비밀 무사들을 대동한 채 결전을 벌이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혈황이었다. 속으로야 하찮은 놈들을 상대하다 보니 속만 부글부글 끓었지만.
천하의 혈황이 지하에서 암습이나 하다니!
청운이 놈에게 이 빚을 단단히 받아내고야 말리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타나는 자들이 점점 강해졌다. 아무래도 대장군의 직속 휘하 무사들이 직접 관여하는 듯했다.
제법 손맛이 느껴졌다.
한 놈, 한 놈 때려잡는 것에 슬슬 재미가 붙었다.
“물러서라!”
대장군 휘하 무사들을 지휘하던 장수가 고함을 내질렀다.
피해가 너무 컸다. 너무 많은 무사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가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게 된다.
일단 무사들을 뒤로 물린 장수는 이를 갈며 통로를 노려보았다.
“흥! 우리가 안으로 못 들어가듯이 놈들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결국 식량이 떨어지면 굶어죽고 말 거다. 통로를 철저히 틀어막고 기다린다!”
더 이상 공격해오는 자들이 없자, 정 소감은 안도했다.
하지만 적을 막아내기만 했을 뿐 탈출을 한 것은 아니었다.
혈황이 정 소감에게 말했다.
“이대로라면 열흘이 한계다.”
“니예, 대인께서 곧 오실 것이옵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무사할 것이옵니당.”
정 소감은 청운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분은 반드시 올 것이다. 자신과 황제를 구하기 위해서.
그분은 삼원 이청운이니까.
하지만 혈황은 정 소감의 그런 절대적인 믿음이 못마땅했다.
“그 뺀질이 놈을 너무 찰떡같이 믿는 거 아니냐?”
“대인께옵서 늦지 않게 오신다고 하셨사옵니당. 조금만 힘을 내주시옵소성.”
“허.”
혈황은 기가 차서 헛바람을 뱉었다.
눈에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다. 왜 그런지 어렴풋이나마 알기에 더 어이가 없었다.
‘이걸 밀어줘야 돼, 말려야 돼?’
자신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제길, 고생은 내가 하고 있는데, 이 녀석은 그 녀석만 믿는군.’
뭐, 꼭 억울한 것은 아닌데, 조금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혈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마당에 이청운을 질투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이대로라면 전부 굶어죽고 말 거다.’
* * *
무림연합과 백가장 무사들은 황도인 북경을 향해 진격했다.
그런데 북경으로 진입하는 모든 길에 병사들이 배치된 채 통행을 막고 있었다.
그동안은 인맥과 회유, 협박을 해서라도 뚫고 왔는데 이곳부터는 상황이 달랐다.
대장군의 측근들이 군권을 가지고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말이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역도들이라며 수만 병사로 위협했다.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친 백철군이 직접 나서서 지휘하는 장수를 찾아갔다.
물론 정상적으로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하늘을 훌훌 날아가며 병사들의 머리를 징검다리 삼았다. 창을 뻗으면 발끝으로 창을 차며 날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장수 앞에 도착한 백철군은 가공할 무위로 일대를 휘저은 후 지휘 장수를 잡아 패대기쳤다.
그의 경천동지할 무위를 막을 수 있는 장수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무림연합이 백가장과 함께 북경을 향해 진격하자 천하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더구나 오왕야의 격문(檄文)이 황군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황제 폐하가 대장군과 사특한 무리에 의해 감금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황궁에서도 대신들이 황제를 보지 못한 지 열흘이 넘었다고 했다.
황군이 동요하더니, 대장군의 명령을 듣지 않는 자들마저 나오기 시작했다.
대장군은 결국 자신 휘하에 있는 척천일로군과 혈룡단으로 단련된 천황교의 정예무사들을 투입시켰다.
척천일로군의 숫자만 오만 명이 넘고, 천황교의 정예무사도 천 명이 넘었다.
그들은 이전까지 상대했던 황군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했다.
결국 무림연합과 백가장도 더 전진하지 못하고 한발 물러섰다.
힘이 없어서 물러선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들이 대장군의 무력을 붙잡고 있는 사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 * *
황도가 자리한 북경의 서쪽에는 커다란 태항산맥의 주봉이 자리했다.
소오대산(小五台山), 혹은 소오태산이라 불리는 이곳은 하북에서 제일 큰 산이다. 도자산(倒刺山)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야생화가 만발해서 시인묵객이 많이 찾는 천하십대명산 중 한 곳이었다.
바로 그 소오대산의 능선을 따라서 일단의 무리가 빠르게 달렸다.
청운과 마존령, 백야대 대원들이었다.
그들은 무림연합과 백가장이 대장군의 이목을 잡아 놓는 동안 황도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무림연합과 백가장이 유난하게 요란을 떨며 황군과 대치한 것도 바로 그 계획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목이 남쪽에 집중된 사이, 두세 명씩 짝을 지어서 북경으로 진입했다.
검문을 받으면 황궁에서 무사를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시험을 치르기 위해 간다고 했다.
실제로 대장군은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무사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검문을 하던 병사들도 숫자가 두세 명에 불과하니 별 의심 없이 통과시켰다.
청운도 백청청과 함께 북경성에 들어갔다.
그렇게 북경성에 들어간 청운과 마존령, 백야대는 황궁의 상황을 조사했다.
북경성까지는 겨우 들어올 수 있었는데, 황궁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황군이 황궁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아니, 황군이라기보다는 대장군의 직속 병사들이었다.
고민하던 청운은 아는 사람을 찾아갔다.
자덕대부(資德大夫) 이기.
그는 스승님이 황제 쪽 사람이라고 추려놓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 이후 그가 황제를 배신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에 대해서 조사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일단은 스승님의 안목을 믿는 수밖에.
자덕대부 이기는 갑자기 나타난 청운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누구야? 진무사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