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
239화
모두의 시선이 청운에게 모였다.
청운이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고 말을 꺼냈다.
“이번 일을 예측하고 오왕야와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습니다.”
“오왕야? 서경왕부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제갈신기가 모르는 척 청운에게 질문했다. 이미 그도 오왕야와의 일을 알고 있었다.
“예, 현재 상황에서 오왕야는 대장군을 견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 중 한 분이시지요. 연락을 넣으면 군을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남경왕부와 서경왕부는 황제에게 인정받아 자체적으로 군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휘하에 십만 정병이 있기에 언제든지 황도로 진격할 수 있고 대장군을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모두가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 중년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남색의 긴 장옷을 입고 있는 그는 하남성 순가의 인물로 거룡칠자의 한 사람이었다.
순현은 두 눈을 빛내며 제갈신기와 청운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보며 입을 열었다.
“오왕야께서 나서신다면 우리에겐 좋겠지만 천하가 전쟁터가 될 것입니다. 서경왕부에서 병사를 일으키면 남경왕부의 이왕야가 가만있겠습니까? 대장군도 그냥 있지는 않겠지요. 자칫 후한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삼국시대라 불리는 후한시대는 영재가 죽자 십상시가 난을 일으켰고 황건적이 창궐하며 지방 세력이 군권을 쥐게 되었다.
조조, 유비, 손권이 황제를 자청하며 중원은 삼국으로 나뉘었다가 하나로 겨우 통일되었다.
전란의 시대로 수많은 백성이 피를 흘렸던 과거로, 당시 순현의 조상인 순욱과 순유는 위나라의 승상을 지냈었다.
청운은 제갈신기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순현에게 말했다.
“황제 폐하만 무사하다면 전란의 시대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대인, 폐하는 불경스럽게도 대장군의 손아귀에 놓여 있소이다. 더욱이 황족들도 모두 역적들에게 볼모로 붙잡혀 있지 않소?”
“폐하는 지금쯤 구출되었을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사실이오?”
순현의 두 눈이 동그라지며 반문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렸다.
청운이 마저 말했다.
“문제는 우리가 발걸음을 늦추면 겨우 구한 황제 폐하께서 놈들에게 다시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때 입을 닫고 있던 제갈신기가 앞으로 나섰다.
청운이 순현의 입을 막았으니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누군가 다시 꼬투리를 잡는다면 회의가 길어질 수 있었다.
“이 소협의 말대로 서둘러 무인들을 재정비하고 황도로 진격해야 합니다. 하루빨리 역도를 몰아내고 천하의 안녕을 되찾아야 할 것 아닙니까?”
입을 꾹 닫은 채 앉아 있던 백철군이 손을 들었다.
“찬성!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소이까?”
무림맹주 양조생도 고개를 끄덕였다.
“옳소이다.”
“본 맹주 역시 마존령주의 의견에 찬성하네. 반대할 사람은 알아서 떠나게.”
사도맹주 용천관까지 눈을 부라리며 청운의 의견에 찬성하자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못했다.
무림연합은 곧장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을 빼내서 재정비했다.
부상자는 노룡회 총단에 남아서 치료를 하기로 했다.
다음 날, 삼천에 이르는 무사들이 세 갈래로 나누어져서 황도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무림맹과 남궁세가 등이 일로를 맡고, 사도맹과 마존령이 이로를 맡았다.
그리고 백가장과 백야대, 정파의 중소문파 무사들이 삼로를 맡았다.
* * *
중원의 무사들이 황도를 향해 올라온다는 것이 알려지자 황궁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놈들이 움직였다고 하는군.”
대장군 하후경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무엄하게도 황제가 앉는 용상에 앉아 있었다.
그의 발아래에 수십 명의 무장과 대신들이 늘어서 있었다.
일부 대신들은 대장군 하후경이 용상에 앉아 있는 걸 보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숙였다.
하후경도 대신들의 불만을 모르지 않았다.
조소를 지은 그가 거만하게 입을 놀렸다.
“대신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혹 나에게 불만이라도 있나?”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그저 대장군의 우국충정에 고개를 조아릴 뿐입니다.”
“흥! 말이라도 못 하면.”
대장군은 뻔히 보이는 대신들의 작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더 따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일이 끝나면 모두 죽을 놈들이었다.
하후경은 비릿한 웃음을 입가에 드리운 채, 아래쪽에 서 있는 무장 중 한 사람을 보며 말했다.
“사마영.”
“예, 대장군.”
사십대 중반쯤 되는 중년 무장이 대답했다. 그는 사마가의 책사로, 젊어서부터 대장군과 함께 전장을 누빈 군사였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놈들이 어떻게 공격해올 것 같은가?”
“최소한 세 방향에서 포위를 하고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틈이 보이면 별동대를 이용해서 기습을 하겠지요.”
“십만 황군이 놈들을 막을 수 없을 거라 보는가?”
“숫자만 본다면 그깟 강호의 무뢰배들이 어찌 상대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모두가 무공의 고수라는 점입니다. 일당백의 실력을 갖춘 자들이 상당수 될 터이니 황군만으로는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대장군께서 기른 척천일로군이 나선다면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척천일로군은 모두 삼천으로 이루어진 최강의 정병이었다.
변방의 적들은 그들이 나타났다 하면 도망가기 바빴다.
심지어 삼천 병력이 십만 군사를 정면으로 쳐서 무너뜨린 적도 있었다.
“결국 척천일로군이 나서야만 한단 말이지?”
“현재로서는 그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할 수 없지. 그 아이들이 필요하다면 부르는 수밖에. 사마영, 즉시 전서를 보내서 그들을 불러들여라.”
“예, 대장군!”
사마영은 상대가 중원 무림을 양분하고 있는 무림맹과 사도맹의 고수들이라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대장군을 상대할 수 있는 무인이 누가 있겠는가?’
천신과 같은 무위를 지닌 대장군 하후경은 그에게 있어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장군은 고개를 돌려서 대신들 중 내각의 수장인 왕인봉을 보며 말했다.
“왕 수보. 새 옥새는 다 만들어졌는가?”
수보(首輔)는 내각의 수장인 대학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대학사 왕인봉은 하후경의 질문에 눈치를 보며 말했다.
“거의 완성했다고 하옵니다. 며칠 말미를 주시면…….”
“닥쳐라!”
우르르릉.
건청궁이 크게 흔들릴 만큼 거대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그 기세에 왕인봉은 뒤로 벌러덩 자빠져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대장군의 기세가 하늘로 향했기에 대전 안에 있는 자들이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벌써 몇 번이냐? 그까짓 옥새 하나 만드는 게 뭔 큰일이라고 이처럼 뜸을 들이는 것이냐?”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왕인봉을 대신해서 곁에 있던 차보(次輔) 상관백이 나섰다.
“대장군. 잠시 화를 거두시지요. 제국을 이끄는 데 가장 중요한 신물이 옥새입니다. 길일을 택해서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시일이 걸리는 것뿐, 왕 수보의 잘못이 아니옵니다.”
상관백은 하후경의 기세에 몸이 떨려왔지만 다른 대신들과 달리 대장군의 기세에 맞섰다.
그 모습에 대장군이 같잖다는 듯 말했다.
“흥! 꼴에 상관세가 사람이라는 것인가?”
상관백은 무림세가인 상관세가의 일원이었다. 어려서부터 수재로 소문난 인물답게 높은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현재 무림 출신 중 황궁에서 가장 출세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하후경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오늘 내로 임시 옥새라도 만들어 와라. 그러지 않으면 너의 목부터 벨 것이다.”
“알겠사옵니다.”
상관백은 대답하며 뒤로 물러섰다.
지금까지 시간을 끈다고 끌었지만 더 이상은 어려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다. 나머지는 하늘과 이청운 대인에게 맡기는 수밖에.’
* * *
길게 이어진 통로의 벽, 중간중간 박혀 있는 야명주가 어둠을 밀어냈다.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는 시간. 병사들이 통로를 헤매며 길을 찾고 있었다.
“여기는 막혔다! 돌아간다!”
“젠장, 아까 왔던 곳이잖아!”
“갈림길에서 헤어졌는데 어떻게 만났지?”
미로에 빠진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며 통로를 뛰어다녔다. 그러나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데도 좀처럼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아내지 못했다.
황제가 감쪽같이 사라진 후 비밀통로를 찾아내서 뒤를 추적했다.
이곳을 드나들던 관리의 말에 의하면 황궁무고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미로가 있다는 말은 없었다. 그저 길을 따라 죽 걸어가면 도착한다고 했을 뿐.
하지만 하루를 꼬박 돌아다녔는데도 나타나야 할 황궁무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밖에서는 안에 들어간 병사들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할 수 없이 병사들을 또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소식이 두절되었다.
추적을 지휘하던 장수는 죽을상이 되어서 하후경에게 보고했다.
“아무래도 지하의 통로가 미로로 바뀐 것 같습니다, 장군.”
하후경은 인상을 찡그렸다.
“통로가 미로로 바뀌었다고?”
“예, 관리자들 말에 의하면, 통로를 따라서 이동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하후경이 신경질적으로 손을 저었다.
퍽!
보고를 올리던 장수는 머리가 터져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죽었다.
하후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서 곁에 있는 사마영을 바라보았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소장 생각에는 역도들이 기관을 움직인 것 같습니다.”
“기관?”
“예, 황궁무고는 유사시 용담호혈로 바뀐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황제가 안으로 들어간 후 기관을 움직여 통로를 미로로 만든 것처럼 보입니다.”
하후경이 그 말에 눈을 치켜떴다.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기관을 움직여 미로를 만들었다면 억지로 뚫고 들어갈 경우 천장과 벽이 붕괴될지 모릅니다. 그럼 황제를 잡는다 해도 시신만 건질 수 있을 것이옵니다.”
“죽일 놈들.”
이를 간 하후경이 옆에 서 있던 부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비밀통로에 대해 알 만한 놈들을 하나하나 죽여라. 그러다 보면 길을 열 수 있는 놈이 나오겠지.”
“예, 대장군.”
“그리고 궁을 중심으로 십 리를 황군으로 에워싸라. 황제가 어디론가 나온다면 발견될 것이다. 아니면 저 안에서 굶어죽을 테니까.”
“즉시 시행하겠사옵니다.”
부장이 밖으로 뛰어나가자, 하후경의 시선이 다시 사마영에게로 향했다.
“왕야들은 어찌 하고 있는가?”
“오왕야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연락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사옵니다. 오왕야를 따르던 자들이 대장군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사옵니다. 하여 이왕야에게 오왕야를 막으라 하였습니다.”
“후후후, 욕심만 많은 그놈은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겠지.”
“문제는 총교주님의 의중입니다.”
“무슨 말인가?”
“총교주께서는,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의 목을 모조리 치라 하셨는데, 황제도 예외가 아니라 하셨사옵니다.”
“끄응, 그분은 황궁의 생리를 너무 모르네. 난들 황제를 살려주고 싶어서 살려주었겠는가? 황제의 목을 치는 것은 최후에 선택할 일이야.”
“속하도 그리 말씀드렸사옵니다.”
황제를 죽이면 대신들은 물론이고 병사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게다가 왕야들에게 공식적으로 군을 일으킬 수 있는 빌미를 주게 된다.
황제의 위에 오르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다.
“자네는 가서 옥새가 언제 완성되는지 알아보게.”
“예, 대장군.”
사마영을 보낸 하후경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용상 깊숙이 몸을 묻었다.
천황교의 총교주는 하후경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해서 맹목적으로 그에게 충성만 바칠 생각 또한 없었다.
꼭두각시가 되더라도 황제의 자리는 자신의 것이 되어야만 했다.
‘교주 영감, 나를 사냥개로 쓰고 버릴 생각이라면 잘못 생각하신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