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
237화
정 소감은 입술을 깨물고 공방을 벌였다.
한번 뜨거운 맛을 본 놈들이 직접적으로 맞받아치지 않고 거리를 둔 채 공격해오고 있었다.
상대는 여섯 명으로 줄어든 상태.
정 소감은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면서 빈틈을 노렸다.
그때 귀비가 있는 육궁 쪽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순간적으로 흠칫한 정 소감을 향해 늑대들의 공격이 쏟아졌다.
아차한 정 소감이 다급히 방어를 했지만 완벽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아악!”
정 소감의 입에서 다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휘청거린 정 소감은 뒤로 물러서며 적의 공격을 받아냈다.
찌이익.
옷자락이 금나수에 걸려 찢겨나갔다.
정 소감은 찢어진 가슴 옷자락을 움켜쥐고 뒤로 물러섰다.
정 소감을 공격하던 자들 중 두엇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설마 여자였어?”
“사내놈 가슴이 달덩이군.”
봉긋하게 솟아오른 정 소감의 가슴이 달덩이처럼 컸다. 사내 가슴이 여자 가슴처럼 봉긋하게 솟아 있다니.
“진무사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니, 이유가 있었군. 흐흐흐흐.”
저벅. 저벅.
늑대들이 한 발 한 발 정 소감을 향해서 다가갔다.
정 소감은 입술을 꼭 깨물고 구음신공을 끌어올렸다.
치욕스러웠다. 오른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등 역시 땀인지 피인지 모르는 무언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건 두 다리와 좌수뿐.
정 소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내가 쓰러지면 귀비들과 왕자님들이 위험하다.’
자신이 처음 모셨던 귀비가 있는 곳에서 폭음이 들렸다. 덕분에 정신이 흐트러지며 놈들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
정 소감은 바닥에 쓰러진 자들 중 한 사내의 옷자락을 움켜쥐더니 접근하는 자들을 향해서 던졌다.
퍽! 찌이익!
길게 상의가 찢기며 시체가 날아갔다.
정 소감에게 다가가던 자들이 시체를 피했다.
그사이 정 소감은 길게 찢어낸 옷자락으로 가슴을 감쌌다.
그 모습이 사내들을 더욱 미치게 했다.
“흐흐. 고년인지 고놈인지 모르지만 사로잡아 주마.”
“어딘 환관 맛 좀 볼까?”
오랜 세월 전장에서 야차로 살았던 자들이다. 전리품으로 상대의 여자를 노리개로 삼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무언가 특별한 맛을 선사해줄 것 같은 정 소감을 보자 두 눈이 뒤집혔다.
“쳐!”
“먼저 잡는 게 임자다!”
후아악!
여섯이 폭풍 같은 기세를 터트리며 정 소감에게 달려들었다.
정 소감은 구음신공이 실린 좌수를 뻗어서 사내들을 상대했다.
하얀 손이 뻗어나갈 때마다 사내들이 흠칫하며 물러섰다.
그러나 상대는 여섯이나 되었고, 정 소감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연신 뒤로 물러서는 정 소감의 움직임이 점점 둔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구음신공을 끌어올리는 것조차 버거워졌다.
그 와중에도 상대의 강력한 공세에 상처가 두세 곳 더 늘어났다.
정 소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제는 서 있는 것조차 힘들 정도인데 놈들은 여전히 희죽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 이대로 끝인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대인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게 한스러울 뿐.
‘대인, 부디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소서…….’
정 소감은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자는 심정으로 사내들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눈앞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퍼버버버벅!
가죽부대 두들기는 소리가 나고,
달려들던 사내들이 절벽에 부딪힌 것처럼, 달려들다 말고 뒤로 날아갔다.
날아가는 그들의 몸에서 피가 뿜어졌다.
정 소감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자신을 덥석 안아드는 것 아닌가.
“아악! 죽어! 개새끼……!”
비명을 내지른 정 소감은 반사적으로 왼손을 휘둘러서 상대의 뺨을 때렸다.
철썩!
정 소감의 귀에 한 줄기 음성이 파고들었다.
“손이 꽤 맵네. 근데… 너 여자였냐?”
어디선가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차갑고 서늘한 목소리 속에 다정함이 묻어났다.
상대의 얼굴을 본 정 소감의 두 눈이 한껏 커졌다.
“대, 대인. 으아앙!”
청운의 친우인 운청이 자신을 안고 있었다.
전이었다면 조금도 반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잘생겨 보였다.
“사내자식이 울기는. 그만 울어! 그나저나 가슴 크네.”
자신을 내려다보는 혈황의 모습에 정 소감은 흠칫 몸을 떨더니 왼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그 모습에 혈황이 발끈했다.
“사내끼리 볼 수도 있지. 왜? 가리는 건데?”
어디서 되지도 않는 짓거리인지.
자신을 어떻게 알고.
투덜거린 혈황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 소감을 덮치던 자들을 혈황신공으로 기습처럼 공격해서 모조리 죽였다.
수백 쌍의 눈이 지켜보고 있지만 상관없었다. 혈황신공은 이미 과거의 신공과 모습이 많이 달랐다. 비슷한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우기면 그만이었다.
어디 비슷한 무공이 한둘이겠는가. 무림은 그저 힘 있는 자의 목소리가 정의다.
그런데 그때,
“응?”
혈황은 눈을 치켜뜨고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거대한 기운이 빠르게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대장군이란 놈인가?’
자신의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기운이었다.
‘지금 싸워?’
피가 끓었다. 한판 붙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의 품에 안긴 채 기절한 정 소감을 보고 입맛만 다셨다.
“쩝, 다음에 봐야겠군.”
혈황은 그대로 바닥을 차며 건청궁을 벗어났다.
* * *
정 소감이 황제구출작전을 펼치던 그 시각, 청운은 노룡회의 본대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무림맹과 사도맹 본대의 발목이 잡혔지만 백가장과 강남 무림의 힘은 노룡회를 압도했다.
문제는 천황교에서 파견 나온 혈살귀마대였다.
천황교에서 이들을 가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들이 익힌 무공이 문제였다.
혈살귀마대는 마교에서 금지할 만큼 인성을 마비시키는 마공을 익히고 있었다.
그들의 무공을 알아본 남궁명이 검병을 움켜쥐며 외쳤다.
“마교의 저주받은 마공을 익힌 놈들이다! 조심하라!”
사자후처럼 터진 그의 말에 무림인들이 눈을 빛냈다.
마교나 사파인 중에는 강해지기 위해서 반인륜적인 방법으로 무공을 익히는 자들이 있다.
특히 단기간에 강해지는 방법 중에는 사람의 원정이나 피를 흡수하는 방법도 있다.
무공을 익히는 도구로 전락한 사람은 목숨을 잃게 된다. 피가 마르고 생기가 빨려서 고통스럽게 죽는다.
동남동녀 천 명의 생혈을 뽑아서 익히는 마공.
갓난아기를 잡아다가 생기를 빨아들이는 마공.
숫처녀의 극음지기를 흡수하는 마공.
이러한 마공을 거리낌 없이 익힌 자들이 눈앞에 있었다.
무림인들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혈살귀마대를 상대했다.
그러나 마공을 익힌 자들은 하나같이 강했다. 팔다리가 끊어져도 쉽게 죽지 않았다. 인성마저 상실했는지 미친놈처럼 실실 웃으며 공격하는 모습은 공포였다.
그들의 손에 정파의 무사들이 죽어갔다.
그나마 백가장과 남궁세가가 선전을 벌여서 그들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물러서지 말고 공격해!”
“창궁검대는 우측을 지원하라!”
“태극검대는 무얼 하느냐! 당장 저 악귀들에게 무당의 힘을 보여주어라!”
백철군은 선두에 서서 적을 베며 우렁차게 사자후를 터트렸다.
“태허무량대검진을 펼쳐라! 정면을 막고 무림인들을 보호하라!”
“명!”
태허무량검진을 여러 개 펼쳐서 하나로 묶은 것이 태허무량대검진이다. 백가장의 상승절학을 한데 묶은 검진으로 개개인 무력을 하나로 해서 상대하는 최고의 검진이었다.
백가장 무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개새끼들, 더럽게 몰려드는군.”
혈살귀마대 대주 구양흥은 눈을 치켜뜬 채 욕설을 퍼붓다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뭐해? 우리만 싸우라는 거야?”
뒤에는 노룡회 간부들이 서 있었다.
구양흥은 뱀눈을 하며 노룡회 간부들을 쓸어보았다.
“그럴 리가 있나? 우리도 시작해야지.”
노룡회 중앙 본대를 이끌고 나온 삼절마검(三絶魔劍) 야율척이 말했다.
그는 피에 미친 살귀들과 함께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이 미친놈들은 적아를 가리지 않고 손을 쓸 게 분명했다. 함께 싸우다가도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아군의 등에 검을 박는 놈들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벽안의 눈을 빛내며 명령을 내렸다.
“홍의존불(紅衣尊佛)은 백인불마대를 이끌고 좌측을 맡아주고, 우측은 잔결검마(殘缺劍魔)가 맡아주시오. 나머지 분들은 저와 함께 중앙을 칩니다.”
야율척의 명령이 떨어지자 노룡회의 본대가 본격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노룡회 본대가 합류하자 싸움이 더욱 거칠어졌다.
피아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수천이 한데 어우러져서 싸움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병사들이 벌이는 전장보다 더욱 거칠고 파괴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야율척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들이 합류했으면 조금씩이라도 밀고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반대로 밀리고 있었다.
야율척은 곧 그 이유를 알고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 미친 새끼들이!”
함께 싸우던 혈살귀마대가 슬금슬금 물러서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서 뒤를 보니 이미 혈살귀마대 상당수가 전장을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사이 적은 더욱 거세게 밀고 들어왔다.
그 선두에 백철군이 있었다.
현경에 이른 그의 무위는 천신이 강림한 듯 엄청났다. 일검에 땅이 갈라졌고 이검에 하늘이 뇌성벽력을 동반한 울음을 토했다.
기세가 오른 무림인들도 그냥 있지 않았다. 백가장 뒤를 따르며 노룡회 무인들을 베어 넘겼다.
둑이 한번 무너지자 거침없이 물이 쏟아졌다.
야율척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퇴각하라! 어서 퇴각하라!”
이곳이 밀리며 바로 본거지다. 여기서 막아야 하건만 혈살귀마대가 발을 빼는 바람에 무림인들에게 밀리고 말았다.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거늘.’
가슴이 답답했다. 놈들이 무슨 소리를 할지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분노한 야율척이 눈을 치켜뜨고 달려가자, 구양흥이 혀를 차며 말했다.
“힘들어서 잠시 쉰 것뿐인데, 그새를 못 참고 밀리다니. 쯧쯧.”
미칠 일이었다. 머리가 불이라도 난 듯 뜨거워졌다.
“그렇다고 지금 물러서면 어쩌자는 건가!”
야율척이 버럭 소리쳤지만 구양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일단 퇴각하세. 총단의 입구에서 진을 활용해 놈들을 상대하는 게 좋겠어.”
야율척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혈살귀마대주는 비릿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백가장과 무림인들이 노룡회 본대와 대치할 때 청운은 마존령과 백야대를 이끌고 노룡회 본거지를 향해서 우회했다.
앞을 막는 자들이 나타나면 가차 없이 제거했다. 선두에선 청운을 막을 자는 없었다.
잠시 후, 청운과 마존령, 백야대는 노룡회 본거지가 내려다보이는 능선에 올라섰다.
능선 안쪽에 거대한 분지가 있고, 드넓은 대지 위에 수십 채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청운이 뒤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우리의 목적은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거요. 시간은 일각. 그 안에 백가장과 남궁세가가 입구를 무너뜨리고 들어오지 못하면 즉시 후퇴하시오.”
오대사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야대주와 백야대 조장들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청운은 분지 위의 노룡회 총단을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입구 쪽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저들이 제때에 진입하지 못하면 죽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갑시다.”
청운이 먼저 노룡회 총단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마존령과 백야대가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