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
236화
‘네놈을 살려두고 쓸 수도 있겠지. 그러나 한번 배신한 놈은 또 하게 되어 있어.’
작심을 한 정 소감은 안에 들어온 무장과 병사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이청운 대인께서 하북에 들어섰사옵니당. 곧 흉악한 대장군을 잡기 휘해 황궁으로 진격할 것이오니 몸을 빼내셔야 하옵니다.”
“정말 진무사가 하북까지 올라온 것이냐?”
“니예, 폐하, 곧 놈들이 소란을 듣고 달려올 것이옵니다. 어서 몸을 피하시옵소성.”
“아, 알겠다. 어서! 어서 가자.”
황제는 어디서 힘이 생겼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 소감은 황제가 앉아 있던 자리 옆에 있는 사자상을 한 바퀴 돌렸다.
그그그긍.
굉음과 함께 사자상이 옆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사자상이 있던 자리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황궁에는 반란이나 위기가 생기면 몸을 피신할 수 있는 비밀통로가 여러 곳에 있다.
당연히 황제의 침소에도 존재했다.
그 존재를 아는 인물은 극히 적어서 정 소감 역시 정원 태감에게 듣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정 소감은 자신을 따르는 임 태감에게 눈짓을 했다. 임 태감이 그보다 직급이 높았지만, 예전부터 정 소감의 직급은 의미가 없었다.
이청운이라는 절대 권력자의 애인이라는 소문 때문에 감히 건드는 자가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임 태감은 황제의 앞에 서서 계단으로 들어섰다.
임 태감을 따라 비밀통로로 들어가려던 황제가 무엇이 떠올랐는지 정 소감을 돌아보며 말했다.
“황후는 어찌 되는 것이냐? 왕자들은?”
정 소감은 허리를 숙여 읍하며 말했다.
“이미 조치를 취했사옵니당.”
“그래? 내 정 소감을 믿을 것이야.”
“니예! 시간이 없사옵니당. 어서 움직이시지용.”
황제는 안도하며 비밀통로 안으로 몸을 완전히 숨겼다.
정 소감은 황제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송구하옵니당.’
황제에게 거짓을 고했다. 차후 목이 떨어지는 죄를 받겠지만 방법이 없었다.
모두를 구하면 좋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태후를 비롯해서 귀비는 물론이고 왕자들까지 철저하게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들이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 황제는 도망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잘 알기에 거짓을 고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정 소감은 비밀통로로 들어가지 않고 남은 다섯 환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각 궁에 연통을 넣어라.”
“니예!”
다섯은 곧장 황제의 침소를 나섰다.
그곳에 홀로 남은 정 소감은 두 눈을 스르르 감고 기를 넓게 펼쳤다.
저 멀리서부터 소란을 듣고 달려오는 병사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황제가 몸을 피신할 동안 시간을 끌어야 한다.
번쩍!
정 소감의 두 눈에서 거대한 빛이 폭발하듯이 뿜어졌다.
성큼 걸음을 옮긴 그는 건청궁을 나섰다.
이미 건청궁 앞뜰은 수백이 넘는 병사들로 가득했다.
정 소감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리도록 밝은 달이 휘영청 밝게 떠 있었다.
달이 청운의 얼굴 같았다.
‘대인,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인지도 모르겠사옵니당.’
“저기 역적 정 소감이 있다!”
“당장 저놈을 잡아서 꿇려라!”
장수들의 호통 소리에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정 소감에게 달려들었다.
정 소감은 기단 위에 오연하게 서서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오히려 측은한 눈길로 자신을 잡겠다고 달려드는 병사들을 보았다.
‘불나방 같으니라고.’
황궁 무공을 조금 익혔지만 이들은 일반 병사일 뿐이다.
절정 고수가 무더기로 공격해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을 자신을 저들로 잡으려 하다니.
한심했지만 한편으로는 잘된 일이기도 했다. 그만큼 더 시간을 끌 수 있을 테니까.
“예가 어디라고 감히!”
정 소감이 노성을 내지르며 오른손을 휘저었다.
후웅!
강맹한 기운이 폭풍처럼 병사들을 덮쳤다.
“황제 폐하께 반역을 한 무리는 죽어 마땅하당!”
연이어 정 소감이 소리치며 쌍장을 휘저었다. 강맹한 기운이 건청궁을 휘감았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병사들이 뒤로 날아갔다.
우당탕탕!
지휘하던 장수들은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어찌?”
“저 환관 놈이 동창 소속이었다더니, 실력이 제법이구나!”
빠드득.
이가 갈렸다. 설마 곱상하게 생긴 환관 나부랭이가 저리도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그러나 쳐다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정 소감을 잡기 위해서 출동한 우군도독 염상호는 휘하 천호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장 승전대 무인들을 불러라!”
“명!”
삐이이익!
긴 호각 소리가 건청궁을 넘어서 자금성을 휘감았다.
그 호각 소리가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건청문을 통해 백여 명의 무사들이 몰려왔다.
오군도독부의 최정예부대인 승전대의 병사들이었다.
고아들을 모아 어려서부터 극한의 수련과 실전을 경험시킨 자들.
승전대 병사들이 몰려오자 우군도독 염상호는 득의의 비릿한 시선으로 턱짓을 했다.
이에 부관인 천호가 호통을 쳤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 오만방자한 환관을 잡아들이지 않고!”
승전대 병사들이 서늘한 눈빛을 뿌리며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가서. 정 소감을 포위했다.
기단 위에 서 있던 정 소감은 차가운 눈빛으로 승전대 병사들을 보았다.
‘늑대 같은 자들이군.’
그는 자신을 포위한 자들의 가슴에 수놓인 백랑을 알아보았다. 승전대의 병사들이 어떤 자들인지 그도 익히 소문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정 소감은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리고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에게서 은은한 살기가 흘러내릴 때, 승전대 병사들이 일제히 정 소감을 덮쳤다.
후우웅!
정 소감은 기다렸다는 듯이 양팔을 휘저었다. 갈고리처럼 변한 쌍수가 채찍처럼 변하며 승전대 병사들을 낚아챘다.
빨려 들어가듯이 정 소감의 손아귀에 잡힌 자들은 지옥을 경험했다.
온몸이 감전된 듯 구음신경 특유의 내공이 상대의 기혈을 휘저었다.
붙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부러졌다. 팔이든 다리든, 심지어 무기도 버티지 못하고 동강 났다.
따당! 우드득!
“크억!”
“아악!”
썩은 나뭇가지 부러지듯 잡히는 모든 것이 부러지자, 정 소감에게 달려들던 승전대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거리를 벌렸다.
앳된 환관이 설마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고수일 줄이야!
허나, 명령을 받았으니 물러설 수도 없는 일.
“승혈만마대진을 펼쳐라!”
승전대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움직임.
팟!
기단을 박찬 정 소감이 승전대 병사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늦었당!”
정 소감은 일갈하며 구화보전을 극성으로 펼쳤다.
정 소감의 장력이 뿜어지며 천지를 가르듯이 승전대 무인들을 갈라놓았다. 그 틈을 구음신경의 강력한 기운이 찢어발겼다.
양 떼 무리에 뛰어든 승냥이처럼 날뛰기 시작한 정 소감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한편, 정 소감이 건청궁에서 모든 이목을 집중시킬 때 청운을 따르던 금의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폐하는?”
“이미 피신하셨습니다.”
“태후님과 황후님은 이곳에 계시니 되었고, 남은 건 왕자님들과 귀비들인가?”
“예! 건청육궁이 문제입니다. 지금쯤 병사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건청궁 옆에 자리한 후궁들을 위한 여섯 개의 별궁이 문제였다. 정 소감이 소란을 일으키는 곳과 담 하나 두고 자리한 곳이다.
석덕조 천호는 이를 악물며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나와 너희는 정면에서 치고 들어간다. 웅 백호는 비상 통로를 이용해 안으로 진입하고, 우리가 움직이면서 병사들의 이목을 끌면 귀비들을 구하라.”
“존명!”
석 천호의 명령에 웅천 백호와 금의위 위사들의 얼굴에 비장함이 어렸다. 석덕조가 내린 명령은 죽으러 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할 자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콰과과광!
거대한 폭발과 흙먼지가 사방에 가득했다. 고함과 비명이 하늘을 찔렀다.
단 한 명 때문에 쓰러진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피륙으로 된 인간이 어찌 이런 경천동지할 힘을 보여줄 수 있는지 경외감마저 들었다.
“허! 천신이군.”
“만부부당이 따로 없습니다.”
감탄이 절로 흘러나올 무위였다. 그러나 상대는 적이었다. 이대로 감탄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궁수를 불러라!”
“존명!”
뛰어난 장수를 잡기 위한 방법은 의위로 쉽다. 상대를 한쪽으로 몰아붙이고 포위한 뒤에 화살비를 내려서 고슴도치로 만들면 그만이다.
우 도독의 명령이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건청궁 담 위로 수십 명의 궁수가 나타났다. 그들은 화살을 시위에 메기더니 정 소감을 향해 쏘아댔다.
피비비비빙!
후두두두둑!
활시위 튕기는 소리와 함께 화살비가 쏟아져 내렸다.
궁수가 나타났을 때 예상한 공격. 정 소감은 당황하지 않고 온몸에 호신강기를 둘렀다. 그 상태에서 주변에 있는 적의 시체를 허공으로 띠워서 사방으로 휘저었다.
수백 발의 화살비도 정 소감을 어떻게 하지 못했다.
정 소감은 화살비가 뜸해지자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그러고는 궁수들 쪽을 향해 날아가며 쌍장을 쏟아부었다.
규화보전의 강맹한 기운이 궁수들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갔다.
그의 장력을 감당하지 못한 건청궁 담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담장의 잔해에 깔려죽는 이들마저 나왔다.
하지만 정 소감도 조금씩 지쳐 갔다.
병사들과 다툰 지 일각이 넘자 조금씩 호흡이 가빠왔다. 너무 많은 내공을 사용해서 이제는 오성의 공력도 남지 않을 듯했다.
‘지금쯤이면 모두 피신했을까?’
보란 듯 무리해서 요란을 떤 이유였다. 금의위가 황족들을 피신시킬 시간을 벌기 위해 미끼가 된 것이다.
덕분에 사방이 병사들로 가득했다.
‘도주? 어렵겠지.’
이미 목숨을 내놓지 않았던가.
정 소감은 건청문 입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피부가 따가울 만큼 살기를 뿜어내는 이들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경지를 알 수 없는 자들이었다.
‘대장군의 개들이군.’
최전방에서 싸우다가 대장군과 함께 들어온 자들. 조금 전 싸웠던 승전대와는 차원이 다른 진짜 대장군의 최측근들이었다.
“후우…….”
정 소감은 병사들을 공격하던 것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결전의 때가 왔다.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산화할 생각이다.
황제를 위해서가 아니다.
이청운. 대인을 위해서다.
‘대인, 부디 하고자 하시는 일 이루소성…….’
그때 건청문 앞에 있던 자들이 신형을 날렸다.
숫자는 전부 여덟.
강맹한 장력과 검강이 정 소감을 향해 쏟아졌다.
정 소감도 물러서지 않고 쌍장을 휘두르며 맞섰다.
콰과광!
정 소감 주위로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뿌옇게 변했다.
먼지를 뚫고 정 소감이 뛰어올랐다. 늑대 같은 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정 소감을 공격했다.
휘리릭!
정 소감이 몸을 회전시키며 상대의 공격을 흘렸다. 동시에 사방으로 장력을 뿌렸다.
서늘한 장력이 연달아 여덟 명을 향해서 쏘아졌다.
그동안 봤던 공격과 다르다는 것을 느낀 무장이 급하게 외쳤다.
“피해!”
장력을 맞받아치려던 자들이 급히 몸을 빼냈다.
하지만 가까이 있던 자들은 피하지 못하고 정 소감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극음의 기운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팔이 얼어붙은 듯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급히 내공을 끌어올려서 대항했지만, 정 소감이 멈춰버린 그들을 그냥 두지 않았다.
비천무영신법으로 번개처럼 다가간 정 소감이 수도처럼 펼친 손을 휘젓고는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쉬악!
툭! 대구루루.
둘의 머리가 목에서 분리되며 바닥을 굴렀다.
괴이하게도 잘린 자리에서 피가 뿜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자들이 살기 띤 눈을 번뜩이며 정 소감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 소감은 이를 악물고 그들의 흉흉한 공격을 막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