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
235화
거대한 폭발과 섬광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눈부신 빛줄기가 노룡회 고수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름 화경에 도달했다는 고수들이 몇 초식 대항도 못 해보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이를 지켜보던 노룡회 측 무사들은 몸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맞서 싸우는 것도 어느 정도 상대가 될 때 이야기였다.
화경 고수들조차 상대가 되지 않는 판에 자신들이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그러나 도망치는 자들을 그냥 보내줄 백철군이 아니었다.
“추격하라! 놈들에게 중원 무림의 힘을 보여줘라!”
백가장과 무림의 고수들이 추격을 시작했다.
“포로는 필요 없다! 모두 죽여라!”
애초에 적에게 베풀 아량은 없었다. 놈들의 손에 너무도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다. 어린아이까지 죽이는 그 잔인함에 치를 떨었었다. 그런 자들에게 내밀 자비는 없었다.
한편, 본대가 앞을 막아서는 노룡회 고수들과 싸움을 벌일 때 청운이 이끄는 마존령 역시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다.
숨어 있는 자들을 하나둘 제거하며 본대가 나아갈 수 있게 주변을 청소했다.
그렇게 전진하던 청운과 마존령대는 뜻밖의 미친놈들을 만나고 말았다.
핏빛의 붉은 무복을 입은 자들이었다. 어딘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미친놈들처럼 보였다.
그런데 단순한 미친놈들이 아니었다. 놈들은 살인에 미친 악귀들이었다.
쓰러진 자들의 목숨이 붙어 있으면 팔다리를 자르고 복부를 헤집으며 낄낄댔다.
놈들과 처음에 마주친 마존령 사대 무사들이 그렇게 당하며 처참하게 죽어갔다.
“크아악!”
“이 악귀 같은 놈들!”
청운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개중에 살아남은 자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청운에게 간청했다.
“령주님, 으윽, 죽여주십시오.”
“이이, 이, 원한을…….”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넷, 그중 한 명을 제외하고 다른 셋은 가망이 없어 보였다.
“미안하구나.”
서걱!
청운은 피눈물을 흘리며 부하의 목을 베었다.
남은 한 명은 뒤늦게 도착한 마존령 대원이 안고 뒤로 물러섰다.
청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법 넓은 공터였다. 피칠갑을 한 놈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히쭉거리고 있었다.
반쯤 눈이 풀려 있는 자들. 그러나 그 흐리멍덩한 눈 속에 숨어 있는 흉포함과 잔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청운은 분노에 찬 일성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네놈들을 지옥으로 보내주마!”
쾅!
청운이 서 있던 자리가 뒤집어졌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땅거죽이 폭삭 주저앉았다.
곧바로 허공에 날아오른 청운은 날갯짓하듯 양팔을 펼치고 휘저었다.
우수의 검에서 거대한 강기가 뿜어졌다. 마치 용이 용틀임을 하며 뻗어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놈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희죽 웃으며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앙!
청운의 검첨에서 뻗어나간 강기가 청룡의 형상으로 뭉치며 놈들을 향해서 쏘아졌다.
“막아!”
한 사내가 외치자, 혈귀들의 몸에서도 붉은 기운이 폭사했다.
그들은 떨어져 내리는 청룡 형상의 강기를 막기 위해서 동시에 공격을 펼쳤다.
콰과과과광!
굉음이 터져 나왔고, 불꽃과 같은 강기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뒤이어 청운의 몸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수십 개의 강기로 만들어진 검이 생성되었다.
후광을 두른 듯 청운의 몸을 두르고 있는 검.
환우무상검의 환우천강폭이 펼쳐진 것이다.
번쩍!
슈슈슈슈슉!
빛이 다시 한번 번쩍이더니 그대로 폭사했다.
장대비 같은 환우천강폭의 강기우(罡氣雨)가 혈귀들의 몸을 휩쓸었다.
그제야 안색이 해쓱해진 혈귀들이 호신강기를 두르고 막아보려 했지만 그들의 능력으로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혈귀 십여 명이 일 초식의 환우천강폭에 휩쓸렸다.
팔다리가 잘리고 목이 잘리고, 심지어 몸이 두 동강 난 자마저 있었다.
환우천강폭을 펼치고 땅에 내려선 청운은 한 발을 들어 올려서 그대로 바닥을 찍었다.
우르르르릉!
땅거죽이 터져나가며 충격파가 살아남은 혈귀에게 쏘아졌다.
거대한 두더지가 땅을 파고 지나간 듯한 흔적을 남기며 나아간 충격파가 선두의 혈귀를 덮쳤다.
꽈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흙먼지가 사방으로 비상했다.
팟!
청운의 몸이 곧장 혈귀를 향해서 쏟아졌다. 그의 손에 들린 묵빛 장검에서 어둠처럼 검은 광채의 강기가 쭉 뻗어나갔다.
서걱! 서걱!
흑마룡의 기운인 묵빛 광채에 스친 것은 그 무엇이든 잘려나갔다.
“가거라.”
청운은 일갈과 함께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쉬아아악!
혈귀 서너 명이 두 동강 났다.
멀리 떨어져 있는 혈귀들의 얼굴에 처음으로 공포가 떠올랐다.
청운이 그들을 보며 소리쳤다.
“저놈들을 모조리 잡아서 지옥이 무엇인지 보여줘라!”
청운의 명령에 용화청이 포권하며 이를 갈았다.
“맡겨주십시오. 사파의 복수가 무엇인지 보여주겠습니다.”
마존령은 사파인으로 구성된 단체다. 이들은 정파와 다른 자들이다. 악독함을 논하거나 잔인함을 논할 때 어느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일가견이 있는 자들이었다.
“놈들을 잡으면 껍질부터 벗겨라!”
“소금 준비해 놔!!”
지옥? 지옥보다 더한 곳이 있음을 보여줄 작정이었다.
청운은 몇 명 남지 않은 혈귀들을 마존령에게 맡겨 놓고 중심지의 전각 쪽으로 몸을 날렸다.
전각 앞의 드넓은 마당에서 백가장과 남궁세가, 무림의 고수들이 노룡회 무사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구석진 곳 한쪽에서는 백야대가 흑야대 오십여 명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흑야대 무사들의 시신이 빠르게 늘어났다.
“젠장, 이놈들도 본대가 아니구나.”
백야대주는 노룡회의 흑야대 역시 정예가 아닌 걸 알고 이마를 찌푸렸다.
그렇다면 천황교 총단에 흑야의 본진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 * *
한편,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황궁.
죽음의 기운이 짙게 깔려서 숨쉬기조차 힘겨울 만큼 지독한 침묵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제의 집무실인 건청궁의 침소에 감금되어 있다시피 한 황제는 통통했던 볼 살이 홀쭉해져 있었다.
지독한 공포와 두려움에 그 좋아하는 음식을 제대로 입에 가져가지 못했다.
역대 황제를 죽음으로 인도했던 독살을 걱정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인지 모르지만, 눈앞에 놓인 수라상을 보며 퀭한 눈만 번들거릴 뿐이었다.
“폐하! 조금이라도 드셔야 하옵니당.”
곁에 있던 환관이 걱정되는지 허리를 숙이며 황제에게 음식을 권했다.
황제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정 소감, 내가 살 수 있겠느냐?”
“소인이 지키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옵서 중심을 잡지 않으시면 대장군이 이끄는 역도들이 천하를 집어삼킬 것이옵니다.”
환관은 놀랍게도 역용한 정 소감이었다.
정 소감은 황궁에 몰래 잠입한 상태에서 황제를 돕고 청운에게 정보를 보내고 있었다.
황제는 잘 돌아가지 않는 목을 겨우 움직여서 정 소감을 보며 측은한 눈길로 말했다.
“진무사는 어찌하고 있느냐?”
“조금만 기다리시옵소서. 곧 폐하를 구하러 달려올 것이옵니당.”
“짐이 부덕하여 그를 내쳤구나. 참으로 미안할 뿐이다.”
“대인께서 어찌 폐하의 마음을 모르시겠사옵니까.”
“허어…… 충신은 내치고, 역적을 곁에 두었으니 이리 당해도 싸지, 싸…….”
“폐하…….”
정 소감이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때였다.
쾅!
침소 문이 부서질 듯이 열리며 무장을 갖춘 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선두에 선 얼굴에 긴 검상이 있는 장한이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폐하! 잠시 우리와 함께 가셔야겠습니까?”
“히익!”
황제는 깜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그 앞을 정 소감이 막아서며 외쳤다.
“무엄하당! 여기가 어디라고 무장을 하고 들어서는 것이냥?”
정 소감은 바짝 긴장했다.
무장의 태도가 평소와 달랐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주었다. 그런데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열고 들이닥치다니.
‘아무래도 놈들이 몰리니까 막 나가려는 것 같구나.’
정 소감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공력을 일으켰다. 힘이 없는 환관의 모습으로는 더 이상 황제를 지킬 수 없을 듯했다.
오늘 끌려가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서 나가지 못할까!”
중년의 환관으로 변장한 정 소감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세가 뿜어졌다.
무장은 검상을 꿈틀거리며 정 소감을 노려보았다.
“환관 주제에 한 수 있다 이건가? 크크크크, 이거 어쩌다 이런 놈을 황제 옆에 붙여 놓았지?”
정 소감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혼자라면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위기의 상황에 도망치라며 청운이 자신의 독문신법인 비천무영신법을 알려주었지 않은가.
그러나 정 소감은 그리할 수 없었다.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정 소감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황제를 보며 말했다.
“폐하, 신이 지켜드릴 것이오니 몸가짐을 바로 하시옵소성.”
정 소감은 황제에게 깊이 읍했다. 그러고는 이내 몸을 돌려 무장을 노려보았다.
“자신은 있느냥?”
“뭐라? 일개 환관 나부랭이가 오군도독부 만호장인 나에게 자신이 있느냐고? 크하하하.”
장수는 정 소감의 말투가 우스운 것인지, 아니면 일개 환관이 자신에게 맞서는 것이 가소로운 것인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곧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놈을 죽이고 황제를 잡아라!”
“예이!”
“이놈! 어서 무릎을 꿇어라!”
“항복하지 않으면 바지를 벗겨서 저자거리를 끌고 다닐 것이니라!”
백호장 다섯이 농담처럼 정 소감을 겁박하며 앞으로 나섰다.
이곳은 황제의 침소였다. 당장 목이 떨어져도 이상할 것 없는 곳.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황제는 허수아비가 된 지 오래였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병사들을 보며 정 소감이 역용을 풀며 일갈했다.
“오만방자한 놈들 같으니라고! 감히 예가 어딘 줄 알고!”
정 소감은 너풀거리는 환관복을 펄럭이며 구화보전의 기운을 일으켰다.
이내 선녀가 날아오르듯이 옷자락을 펄럭인 그가 침소를 날았다.
정 소감이 허공에서 쌍장을 뻗었다.
퍼벅! 콰광!
그의 쌍장에서 빛이 번쩍일 때마다 백호장들이 뒤로 날아갔다.
쓰러진 백호장들은 단 일수에 심장이 파열되고 심맥이 끊어지며 절명했다.
정 소감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건청궁을 울렸다.
“폐하의 침소에 병장기를 들고 온 것만으로도 구족을 멸할 일이거늘, 감히 공격을 해?! 용서치 않겠다, 이놈들!”
정 소감은 쌍장을 춤추듯 휘둘러서 남은 백호장 둘마저 뒤로 날려버렸다.
만호장이라 칭한 자는 정 소감이 엄청난 무공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화들짝 놀랐다.
“감히! 환관 나부랭이…… 커억!”
만호장은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정 소감의 장력에 가슴을 얻어맞고 바닥을 굴렀다.
정 소감이 사용한 무공은 구음신경이었다.
천하제일을 논하던 전설의 무공을 청운의 도움으로 익혔다. 부족한 건 내공이었다. 그 내공은 황제가 황궁무고를 통해서 전해주었다.
덕분에 정 소감은 이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무공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척.
허공을 나비처럼 훨훨 날아간 정 소감은 만호장의 머리를 밟고 내려다보았다.
“네놈의 죄. 무엇인지 아느냥?”
“으윽,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만 주신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대장군은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위치를 약속했다. 그래서 그를 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죽으면 끝인 것을.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무장은 생긴 것과 달리 겁이 많았다. 얼굴의 검상도 적과의 싸움에서 도망치다가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생긴 상처일 뿐이었다.
정 소감은 귀엽게 생긴 얼굴과 달리 냉막하게 말했다.
“불가!”
과직!
퍽! 소리와 함께 만호장의 뇌수가 사방으로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