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
232화
* * *
북경에서 칠백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석가장은 교통의 요지였다.
근방에 있는 조현(趙縣)의 안제교(安濟橋)와 삐죽삐죽한 산봉우리는 멋진 경관을 자랑하는 곳으로 많은 사람이 즐겨 찾았다.
특히 창암산(蒼巖山)의 융흥사에는 동으로 만든 큰 불상이 있는데, 하북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 창암산의 은밀한 협곡에 거대한 장원이 웅크리고 있었다.
항시 조용해서 인근 사람들은 그저 관직을 그만둔 고관대작의 장원이려니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조용하던 장원에서 한 줄기 피바람이 몰아쳤다.
“크윽!”
“왜?”
장원을 지키는 자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적의 습격이 아니었다. 어제까지 만해도 같이 웃고 떠들던 자들이 칼날을 거꾸로 쥔 바람에 영문도 모른 채 쓰러졌다.
혈겁을 일으킨 자들은 붉은 피풍의를 입은 자들이었다. 거침없이 움직이는 그들의 움직임에 장원 곳곳에서 피바람이 불었다.
“막아! 배신이다!”
“노야가 배신했다! 노야와 혈풍대를 막아라!”
경계를 하는 자들이 사태를 파악하고 고함을 질렀다. 어떻게든 노야와 혈풍대를 막고 시간을 끌어야 했다.
그러나 사자후처럼 터져 나온 노야의 음성에 혈풍대를 막아서던 이들은 절망해야 했다.
“헛된 희망을 품지 말고 투항하라! 네놈들을 도와줄 자들은 없다!”
우르릉!
장원이 부르르 떨릴 만큼 커다란 사자후에 싸움이 일순간 멈췄다.
혈풍대를 막아섰던 광살마존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노야의 말대로 묘수선생을 따르는 이들은 대부분 외부로 나간 상태였다.
마존령과 백가장이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내보낸 것이다.
더구나 묘수선생은 무인이라기보다는 책사에 가까운 자였다. 일신의 무공은 제법 강했지만 그를 따르는 이들의 실력은 노야의 사람들보다 조금 떨어졌다.
이번에 임시 회주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솔직히 무력보다는 머리 덕분이었지 않은가.
광살마존은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노야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노야, 교에서 문제를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네. 자네도 그만 아이들을 물리게. 집안싸움은 이쯤 했으면 되었지 않나?”
“젠장, 알겠습니다.”
광살마존은 탐탁지 않았지만, 임시 회주인 묘수선생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의리는 없었다.
묘수선생이 관리하는 혈룡단을 조금이라도 더 배정받기 위해서 줄을 그쪽으로 선 것뿐.
하지만 일이 이쯤 되었다면 모든 것이 노야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 뻔했다.
한편, 노야의 반란이 벌어질 때 장원의 중앙 건물 태사의에 앉아 있던 묘수선생은 이를 갈며 노야를 저주했다.
“어찌 이럴 수 있다는 말인가? 어찌!”
임시 회주에 오른 지 한 달밖에 안 되었는데 쫓겨날 판이었다.
‘교활한 늙은이! 어쩐지 부하들을 내놓지 않더라 했더니!’
묘수선생은 무림맹과 사도맹을 상대하기 위해서 노야가 이끌고 있는 고수들을 이용하려 했다.
그런데 노야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회주에 오르셨으니 스스로 한번 해보시고, 어려움이 닥치거든 그때 가서 말씀하시지요.”
무언가 찜찜했지만, 응당 치러야 할 진통이라 생각했기에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핵심 고수들을 내보내자마자 반기를 든 것이다.
‘설마 했거늘……. 죽일 놈의 늙은이!’
절로 이가 갈렸다.
회주가 되었을 때, 무리를 해서라도 바로 처리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말이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묘수선생은 두 눈을 이글거리며 대전의 입구를 뚫어지게 보았다.
이대로 도망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천황께서는 수하들 사이의 힘겨루기를 막지 않았다.
다만 승부가 나면 거기서 끝내야 했다.
목숨을 거둘 수는 없는 것이다.
그걸 노야가 모를 리 없다.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빚을 갚을 기회가 생기지 않겠는가.
그가 마음을 반쯤 내려놓고 있을 때, 누군가가 대전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노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체격부터가 달랐다.
“응?”
고개를 든 그는 안으로 들어선 자를 노려보았다.
중년쯤으로 보이는 잘생긴 사내였다.
조금은 냉막한 얼굴. 몸에는 갈색 비단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묘수선생은 사내가 가까이 다가온 후에야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귀, 귀하가 어떻게 이곳에……?”
그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거렸다.
눈앞의 사내. 오래전에 본 얼굴이었다.
이십 년 전쯤이던가?
그런데 그때 봤던 얼굴 그대로였다. 지금쯤 칠십은 되었을 텐데….
문제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의문도 잠시 묘수선생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설마… 귀하가 노야를 움직인 거요?”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자가 이곳에 나타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묘수선생의 시시각각 변하는 안색을 보며 예의 중년 사내가 말했다.
“내가 왜 곧 죽을 늙은이와 손을 잡는단 말이냐?”
“아,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물론이지. 내가 네놈들과 손을 잡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
사내의 말에 묘수선생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굳이 자신들과 손을 잡을 이유가 없다. 아니, 그럴 일은 천지개벽이 벌어져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내는 천황교 척살대상자 중 맨 위에 있는 천마 천태중인 것이다.
세상은 모르지만, 삼십 년 전, 천황교와의 싸움에서 패한 후 마교는 모습을 감췄다.
그런데 눈앞의 사내가 바로 그 마교의 주인이었다.
묘수선생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천마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지나가던 길에 볼일이 있어서 잠시 들렀다.”
“볼일이라 하시면……?”
묘수선생의 눈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광이 뿜어졌다.
뒤늦게 그의 출현을 눈치챈 삼십육천강대가 전각 안으로 뛰어 들어와서 무기를 빼들었다.
그중에는 망설이지 않고 천태중을 향해서 출수한 자마저 있었다.
슈슈슈슉!
매섭고 날카로운 검기 세 줄기가 벼락처럼 천태중을 베어갔다.
천태중은 보지도 않고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퍼버버버벙!
달려들었던 자들이 뒤로 튕겨나가서 바닥을 뒹굴었다.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니 목숨은 살려주마.”
천마의 말에 묘수선생과 삼십육천강대는 귀를 의심했다.
‘천마가 주먹을 쓰지 않고 말로 해결하겠다고?’
믿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별거 아니고…… 나랑 같이 가줘야겠다.”
“예?”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지금 이렇게 마주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려서 죽을 맛인데.
묘수선생이 무슨 생각을 하든 말든 천마는 자신의 할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곳에 있어봐야 네 녀석은 죽든 쫓겨나든, 둘 중 하나일 거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자.”
“제가 방금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요?”
묘수선생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천하의 천마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것도 직접 찾아와서 말이다.
그런데 천마가 품속에서 붉은 무언가를 꺼냈다.
“이 물건 잘 알지?”
묘수선생의 눈이 커졌다.
“혈각룡?”
“맞다. 혈기룡, 혹은 혈각룡이라 부르는 물건이지.”
천마의 품에서 나온 물건은 혈룡단의 주재료인 혈각룡이었다.
묘수선생이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할 때 천마가 말을 이었다.
“네가 만든 물건, 우연히 하나 얻었는데, 상당히 좋더구나.”
“어디서 구하셨는지 모르지만 제가 필요한 이유는 알겠군요.”
묘수선생은 그제야 천마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의 짐작을 확인시켜주듯 천마가 말했다.
“이 녀석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은 천하에서 자네가 유일하더군.”
“맞습니다. 혈각룡으로 혈룡단을 제조한 건 저니까요.”
어느 누구에게도 아직 혈룡단 제조방법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 줄이나 마찬가지니까.
누구든 혈룡단을 원한다면 자신을 절대 죽이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는 천마를 따라갈 경우 영원히 천황교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건데…….’
그렇다 해서 거부하면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혈룡단이 아무리 아쉽다 해도, 천황교가 번창하는 꼴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을 테니까.
‘외통수로군.’
진퇴양난이었다.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혈룡단을 만들려면 혈각룡이 많이 필요합니다.”
“이미 확보해 놓았으니 그런 건 걱정할 것 없다.”
“알겠습니다. 그러하시다면 교주를 믿고 따르겠습니다.”
묘수선생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요절할 판이었는데 명줄이 늘어났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하아, 마교라니…. 나도 참…….’
마교에 간다고 해서 예전만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 혈룡단 제조방법만 지킨다면 존중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렇게 묘수선생은 삼십육청강대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와하하하하. 이놈! 어디 갔느냐!”
뒤늦게 대전 안으로 뛰어든 노야는 앙천광소를 터트리며 승리를 자축했다.
“겁쟁이가 회주 자리를 버리고 도망쳤다! 앞으로 노룡회는 내가 다시 이끌 것이다!”
* * *
노룡회의 회주 자리가 한 달여 만에 다시 바뀌었다.
반란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얼마 전까지 회주였던 노야인지라 별다른 말썽은 없었다.
그런데 어수선한 장원을 정리할 때였다.
급보를 알리는 전령이 뛰어들었다.
“무림맹과 사도맹이 양천(陽泉)에서 만나 하북에 들어왔습니다. 현재 요양(饒陽) 근교까지 올라왔다는 첩보입니다.
노야는 노룡회 임시 회주로 복귀하자마자 날아든 뜻밖의 급보에 화들짝 놀랐다.
“뭣이야? 황군은 무엇을 했기에 놈들을 막지 않은 것이냐?"
“막긴 막았습니다만, 일각도 버티지 못하고 길을 열어주었다 합니다.”
“이런 젠장!”
노야는 묘수선생에게 확 짜증이 났다.
‘빌어먹을! 놈들이 이렇게 가까이 올 동안 왜 말을 하지 않았단 말인가?’
문제는 또 있었다.
“사도맹의 마존령을 이끄는 이청운이 석가장까지 올라왔다는 보고입니다.”
대전을 가득 메운 전령의 목소리에 노야는 벌떡 일어섰던 그대로 다시 주저앉았다.
전 중원이 노룡회를 노리고 있었다.
노야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당장, 간부들을 모두 불러들여라. 놈들을 상대할 대책을 마련해야겠다.”
회주로 복귀한 지 한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자리를 내놓게 생겼다.
‘이를 어쩐다.’
하지만 이대로 눈뜨고 당할 생각은 없었다.
회의는 금세 벌어졌다.
다시 잡은 권력을 놓고 이야기를 하던 중에 불려 와서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생각들 하시는가? 이곳을 버리고 나중을 기약할 건가, 아니면 끝까지 싸워서 지킬 건가?”
노야가 전후사정을 전부 말하고, 간부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 장년인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어려운 싸움이 될 것입니다.”
“맞습니다. 현재 노룡회 전력의 절반 이상이 마존령과 백가장을 막기 위해 나갔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죽어줄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니 노야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지막 말한 인물은 광존보다는 작지만 일반인보다 큰 덩치를 가진 사내였다.
그의 말을 끝으로 모두의 의견을 들은 노야는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