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
230화
청운은 개방의 방어망이 무너지기 직전에 나타났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벼락같은 빛줄기가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청운과 마존령은 노룡회의 후위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뒤늦게 강력한 적이 나타난 것을 안 노룡회 무사들은 당황해서 우왕좌왕했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고 죽여라!”
우르르릉!
천둥처럼 울려 퍼진 청운의 사자후에 개봉의 쥐새끼들마저 벌벌 떨었다.
백철군과 그의 수신호법, 개봉으로 오면서 합류한 백가장 무사들도 그동안 쌓인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들의 앞을 막는 노룡회 무사들은 무기도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고 썩은 짚단처럼 쓰러지며 지옥으로 달려갔다.
광분해서 날뛰며 개방과 중소 문파 제자들을 죽이던 노룡회 무사 삼백여 명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일방적인 학살이나 다름없는 싸움이었지만 누구 하나 적을 안쓰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노룡회 무사들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후퇴하던 개방과 중소 문파 제자들이 반격하며 뒤로 처진 적을 추살했다.
개봉성 외곽의 거리가 시신으로 뒤덮이고 수로는 붉게 물들었다.
청운 일행이 나타난 지 일각 만에 싸움이 그쳤다.
청운은 시신과 피로 뒤덮인 전장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참혹하군.’
양측 합해서 죽은 자만 해도 천 명이 넘었다. 부상자는 셀 수도 없었다.
그중 개방 제자가 삼백 명은 죽었고, 노룡회 무사들도 육백 명 넘게 죽었다.
아마 자신이 늦게나마 도착하지 못했다면 시신의 대부분은 개방과 중소 문파 제자들이었을 것이다.
“왜 이리 늦은 거야!”
염악이 빽 소리쳤다.
안 그래도 넝마인 옷이 피로 물든 그의 모습은 혈귀가 따로 없었다.
“미안하게 됐다. 빨리 온다고 왔는데, 조금 늦은 것 같군.”
청운은 사과부터 했다.
염악이 왜 후퇴하지 않고 노룡회 공격에 정면으로 맞섰는지 그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아마 일찍 후퇴를 했다면 최소한 백여 명의 목숨은 건졌을 것이다.
대신 적들이 천향서원을 덮쳤을 것이고, 어쩌면 스승님도 해를 입었을지 몰랐다.
“씨바, 겁나서 뒈질 뻔했잖아.”
염악이 그 말을 하며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개방의 독귀 같은 방주 염악이 울다니.
청운이 생경한 그 모습을 보고 넌지시 물었다.
“지금… 우는 거냐?”
“울긴 누가 울어! 피가 눈으로 튀어서 닦는 거지! 씨바!”
염악은 무안함을 모면하기 위해서 툭툭 쏘아댔다.
솔직히 그도 자신이 눈물을 흘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런데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철군이 말했다.
“그놈, 입이 꽤 걸군.”
염악의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당신 뭐야! 당신이 뭔데 내 입을 판단질이야? 조까.”
백철군은 난데없이 튀어나온 염악의 욕설에 잠깐 할 말을 잊었다.
수신호법들도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할 수 없이 청운이 말해주었다.
“인사드려라. 강서 백가장의 장주님이시다.”
“백가장이고 뭐고…….”
다시 불퉁불퉁 소리치려던 염악이 절간 뒷마당의 이끼 낀 석상처럼 굳었다.
그러고는 곧 자신이 지금 누구에게 욕을 했는지 깨닫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배, 배, 백가…장……?”
“그래, 장주님이시다. 인사드리라니까?”
털썩!
염악은 그 자리에 쓰러지듯이 넙죽 엎드렸다.
개방 제자들이 쳐다보고 있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일단은 살고 봐야 했다.
살아야 개뼈다귀도 뜯을 수 있고, 싸구려 화주라도 마실 수 있다.
뒈지면 소용없다.
하지만 곧 자신이 대개방의 방주라는 걸 다시 떠올리고 후다닥 일어났다.
상대가 백가장의 장주라면, 자신은 대개방의 방주다.
꿀릴 거 뭐 있어?
“뭐… 이 정도면 인사는 드린 것 같고…….”
힐끔, 백철군의 표정을 훔쳐본 그가 바로 말을 이었다.
“개방 방주인 염악이우.”
백철군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변하는 그를 보고 실소를 흘렸다.
“흣, 정말 재미있는 놈이야.”
“거, 놈놈 하지 마쇼. 듣는 놈 기분 나쁘니까.”
이제는 제법 반격까지 하는 염악이다.
청운도 말리지 않았다.
한 번쯤 혼이 나봐야 저놈의 주둥이가 제대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때 피식, 웃은 백철군이 말했다.
“꼴에 자존심은 있다 이거지? 흠, 오늘 개봉에 온 기념으로 개봉의 거지들이나 청소해볼까?”
염악이 움찔하더니, 청운에게 눈짓을 보내며 도움을 요청했다.
상대는 백가장이다. 개방의 힘으로 백가장을 상대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다.
더구나 지금은 노룡회와 싸우느라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
거기다 개방의 장로들마저 그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왜 방주의 방정맞은 입 때문에 자신들이 죽어야 한단 말인가!
여차하면 백철군이 아니라 개방의 장로들이 그를 잡아서 백철군에게 바칠 판이다.
-이, 이봐, 청운! 저 양반 좀 말려줘!
청운은 쓴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도와주었다.
“장주님, 저 친구가 비록 입은 걸지만 의리 하나는 죽여줍니다. 봐 주시죠.”
최근 들어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백철군은 의리에 약했다.
“의리가 있다고? 거지가?”
“그러니까 도망가지 않고 여길 지킨 거죠. 친구인 제 스승님을 보호하기 위해서요.”
백철군은 뻘쭘하게 서 있는 염악을 쓱 훑어보고는 몸을 돌렸다.
“흠, 그래? 좋아, 그럼 거지 청소는 다음으로 미루지.”
그제야 바짝 굳어 있던 염악의 어깨가 처졌다.
‘휴우우, 괜히 자존심 세우려다가 목이 달아날 뻔했네.’
그때 청운이 그에게 물었다.
“염악, 스승님은 아직 서원에 계시나?”
“어? 어. 가세.”
* * *
개봉 성내로 들어선 청운은 곧장 천향서원으로 향했다.
청운의 스승인 묘청선생 위진천은 자신의 집무실인 천향각에서 청운과 일행을 맞이했다.
“스승님, 무탈하셨사옵니까?”
“너도 별고 없었느냐?”
“예, 걱정만 끼쳐드린 것 같아 송구하옵니다.”
간단한 인사가 오갔다. 마음을 전하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알기에 구구절절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청운은 함께 자리한 백철군과 혈황, 그리고 백청청을 소개했다.
특히 백청청을 소개할 때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이를 놓치지 않은 위진천은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저 아이가 청운이 이야기하던 아인가 보군. 가문도 좋고, 인물도 좋고, 품행도 단정한 것이 청운의 짝으로 나무랄 데 없어.’
위진천은 백청청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백철군은 탐탁지 않았지만 딸 가진 부모의 마음이 되어서 그저 인상을 굳힐 뿐이었다.
다행히 그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위진천이 백철군에게 말했다.
“부족한 제자를 어여삐 여겨주신다 들었습니다. 회초리를 들어서 좀 더 바르게 키웠어야 하는데 송구합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천하에 선생의 제자만 한 인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저…….”
둘은 천하의 안위는 뒤로 미루고 청운과 백청청 문제만 거론했다.
이대로 뒀다가는 아이를 몇 명 낳을 것인지 마저 거론할 판이었다. 청운이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날이 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웠을지도 모른다.
“저, 말씀 중에 송구하옵니다. 저희 둘 문제보다 황실의 안위가…….”
“크흠, 알았다. 그럼 아이들 일은 따로 상의하시지요.”
“그게 좋겠습니다. 허허.”
둘은 할 말을 남기고 헛기침을 했다.
청운은 또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곧장 현 정세를 말하며 황실 문제를 거론했다.
“스승님, 황궁 상황은 어떻습니까?”
위진천의 표정이 바로 구겨졌다.
“으음, 생각보다 좋지 않다. 한 달 전에 바른 말을 하던 대신들이 숙청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덕분에 나서려고 하는 이들이 없어.”
위진천은 연줄이 닿는 이들과 은밀하게 연통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을 같이 했던 일부 대신들이 부당함을 외치다가 숙청당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지금은 입을 닫고 은밀하게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네 서찰대로 당분간 나서지 말고 사태를 주시하라고 전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신들에게 감시하는 자들이 따라붙었다고 하더구나.”
“그럼 황궁은 이미 놈들 손에 넘어갔다고 봐야겠군요.”
“하아, 그래서 문제다. 금의위는 해체되었고, 동창의 주요 간부들 역시 뇌옥에 갇혔다. 거기다 얼마 전에는 배신자마저 나오는 바람에 피바람마저 불었다.”
함께하기로 한 이들 중 배신자가 있었다.
그로 인해 십여 명이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위진천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관리들도 문제지만, 이대로 시일이 조금 더 흐르면 군권이 모두 넘어갈 수도 있다.”
“지방군은 아직 괜찮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조사한 바로는 절반 이상이 넘어간 것 같다. 다행히 하북에 자리한 지휘사는 무림 출신 장수들이 많은데, 그들이 하북 위지휘사의 명령에 반기를 들었다.”
“놈들이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당연하지. 그런데 황제께서 재가하지 않고 있으시다. 아니, 재가를 못 하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하겠군. 옥새의 행방이 묘연해졌거든.”
“예?”
“옥새가 없으니 어명을 내리지 못하는 거지.”
황제의 명령이 적힌 어지를 전하려면 옥새를 찍어야 한다.
그런데 그 옥새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만일 옥새가 대장군 손에 들어갔다면 이미 황실은 물론이고 무림도 수십만 황군에 의해서 무너졌을 것이다.
위진천은 한숨을 쉬며 청운을 보았다.
“시간이 없구나. 군부에서 얼마나 버텨줄지 모른다. 더욱이 옥새를 다시 제작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하더구나.”
어쩌면 이미 제작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위진천은 인상을 굳히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그놈들이 새로운 하늘을 열 수도 있다.”
“놈들이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말씀이십니까?”
“권력을 손에 쥐었고, 많은 장수들이 놈들에게 포섭되었다. 다행히 우리 쪽과 연이 있는 장수들이 반발하고 있어서 버티고 있지만 얼마나 갈지 모르는 상황이다.”
스승의 말에 청운도 표정이 굳어졌다.
‘왕야 가운데 한 명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아예 나라를 다시 세운다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놈들은 처음부터 개벽을 노린 것일지 몰랐다.
사실일 경우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질 것이다. 얼마나 많은 피가 대지를 적실지 모른다.
“서둘러야겠군요.”
놈들의 계획은 이미 실행으로 옮겨져서 황제마저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더 늦으면 천추의 한을 남길지 몰랐다.
“이곳은 걱정 말고 네가 생각한 대로 해라.”
* * *
다음 날, 안휘에서 올라온 백가장 무사들과 남궁세가 무사들이 개봉에 도착했다.
청운과 백철군은 의논 끝에 전력을 둘로 나누어서 북상하기로 했다.
신혈교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그동안 조사한 결과 노룡회의 총단이 태행산맥 자락인 창암산에 있다는 게 밝혀졌다.
그런데 창암산은 북경으로 가는 길목에서 멀지 않았다.
무림맹과 사도맹에서도 정예 무사들이 창암산을 향해 은밀하게 이동하고 있는 상황.
이번 기회에 노룡회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북경에서의 일도 처리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개봉 도착 사흘째 되던 날.
청운은 아침부터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백철군이 청운 옆에 있는 백청청에게 말했다.
“청아야, 아비와 가지 않을 것이냐?”
둘로 나누어진 전력 중 일군은 백철군이, 일군은 청운이 이끌기로 했다.
그래서 자신과 함께 가지 않을 거냐고 물었는데, 백청청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해요. 전 가가와 함께 갈 거예요.”
“쯧쯧, 딸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백철군은 혀를 차더니 고개를 돌려서 백야대주를 보았다.
“대주께서 청청이를 지켜주십시오.”
“걱정 말게. 어떤 놈도 청아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할 거네.”
백철군은 한숨을 쉬고는 청운을 째려보았다.
“청아에게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가만두지 않을 거다.”
“걱정 마십시오. 제 목숨보다 앞서서 백 소저를 보호하겠습니다.”
“킁.”
콧소리를 낸 그는 잠시 청운을 째려보고는 휑하니 몸을 돌렸다.
멋쩍어진 청운은 쓴웃음만 지었다.
‘어르신도 성격 참…….’
청운과 마존령, 백야대는 사시 초가 되자 개봉을 나섰다.
청운은 고개를 돌려서 검은 피풍의를 걸친 사내에게 전음을 보냈다.
-먼저 황궁으로 가게. 가서 정 소감을 만나면 할 일을 알려줄 거네.
-존명!
사라져가는 청운의 뒤를 한참 지켜보던 사내는 눌러쓴 방갓을 살짝 들었다. 금의위 백호 웅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