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
229화
한 명, 한 명이 화경을 넘어 현경에 이른 고수였고, 그중 한 사람은 검왕 목유자와 쌍벽을 이룰 만큼 대단한 무위를 선보였던 인물이었다.
제갈유문은 포권을 하며 백철군을 맞이했다.
“제갈세가에 잘 오셨습니다. 제갈유문입니다.”
“반갑습니다. 강서 백가의 백철군입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백철군이 한쪽에 서 있는 청운을 노려보았다.
-본 가가 공격받았다는 말은 들었을 거다. 아직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마라.
청운은 백철군의 마음을 눈치채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 가주.
제갈세가와 백가장의 주인, 그리고 청운이 한자리에 앉았다.
제갈유문은 무림 정세에 대해 이야기했다.
청운 역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아는 부분과 모르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무림 정세를 이야기한 제갈유문이 백철군에게 물었다.
“백 가주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백철군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일정이 달라질 것이다.
백철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서 청운을 바라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냐?”
“이제 쳐야지요. 항상 뒤만 쫓아다닐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동안 무력이 부족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백가장이 합류한 이상 무력은 충분했다.
그런데 백철군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동안 네가 상대한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수들이 많다.”
의외였다. 백철군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백가장을 습격한 자들이 생각보다 강했나 보다.
“놈들 중에는 검왕보다 강한 자가 최소한 셋 이상이다. 그 아래에 있는 놈들도 현경에 도달한 자가 대여섯 명 이상은 되지 않을까 싶다.”
백철군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 정도라면 이번 습격에서 백가장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청운은 적의 정체를 짐작하고 미간을 구겼다.
‘천황교 총단에서 직접 나온 자들인가 보군.’
청운은 백철군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그를 넘어섰다고 생각지 않았다. 잘해야 백중지세?
백철군도 뭔가를 느꼈는지 청운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많이 달라졌군. 그동안 기연이라도 있었느냐?”
“예, 작은 기연이 있었습니다.”
백청청 때문에 탐탁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봐줄 만한 구석이 두 가지 정도는 되었다.
‘아니 잘난 상판대기까지 합치면 세 가진가?’
삼원을 했으니 머리는 좋을 것이다. 그러니 손주가 태어나면 똑똑할 것이다.
무공도 강하니,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얼굴도 쓸 만했다.
백청청과 청운 사이에서 손녀가 태어난다면 여간 귀엽지 않을 것이다.
백철군은 아직 씨도 뿌려지지 않은 손녀를 떠올리고,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를 본 청운은 의아했지만 감히 함부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저 양반이 왜 저러지?’ 그 정도 의문만 품었을 뿐.
두 사람 사이에 낀 제갈유문은 눈치 아닌 눈치를 보았다.
끼어들고 싶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랄까, 두 신선이 바둑을 두고 있는데, 옆에 서 있는 구경꾼의 입장이랄까?
기묘한 기류가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철군이 입을 열었다.
“백가장의 일대가 안휘로 향했다. 남궁세가와 대치하던 놈들부터 쓸어버릴 생각이야.”
“아…….”
“오……!”
제갈유문과 청운이 동시에 탄성을 발했다.
“이대는 하남으로 들어갔고, 백야 역시 앞으로는 그들과 함께 움직일 거다.”
“한데 장주님께선 왜 이곳으로…….”
“나야 내 딸을 데려가려고 왔지. 혹시라도 어떤 도둑놈이 중간에서 날치기 해가면 안 되니까.”
“…….”
청운은 움찔했지만 모른 척했다.
백철군이 그런 청운을 노려보고는 콧방귀를 뀌며 말을 맺었다.
“킁, 어쨌든 이대가 각기 임무를 마치면 개봉에서 만나기로 했다.”
백철군은 통보하듯이 말을 한 뒤에 제갈유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주께서는 무림맹에 연락을 넣어주십시오. 백가장이 개봉에 나타나더라도 놀라지 말라고 말이오.”
그제야 겨우 입을 연 제갈유문이 벌게진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장주.”
백가장이 개봉에 있으면 노룡회든 그 배후인 천황교든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무림맹에는 엄청난 도움이 된다.
“굳이 함께 움직여 달라고는 하지 않겠소이다. 대신 우리 백가장이 하려는 일을 막지만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은 조용조용하게 했지만, 협박에 가까운 뜻이 숨어 있었다.
제갈유문도 그 점을 간파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지요. 백가장이 간악한 무리들을 치기 위해서 앞장서 주시겠다는데, 무림맹이 왜 막아서겠습니까?”
“허허허, 이해해주셔서 고맙소이다.”
삼자회담이 끝난 후 밖으로 나온 청운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당에서 혈황과 백철군의 수신호법들이 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녀석, 제법 단단하게 생겼는데? 너, 내 제자가 되거라.”
그 말을 한 사람은 혈황이 아니라, 수신호법 중 한 사람이었다.
혈황은 얼굴이 벌게져서 고개를 홱 틀었다.
“일 없소.”
“그러지 말고 내 제자가 되라니까.”
“싫다고 했잖소?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쇼.”
마음 같아서는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꺼져!’라고 빽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은 ‘혈황’이 아닌, 이십대 청년 ‘운청’이었다.
이판사판 어떻게 되든 말든 성질대로 해버려?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아니, 때보다는 자신의 혼자 힘으로 앞에 있는 놈들을 모두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빌어먹을!’
백철군의 수신호법들이 혈황에게 그런 말을 한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혈황을 살펴보고는, 새파랗게 어린(?) 혈황이 의외로 대단한 실력을 갖추었다는 걸 바로 알아보았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너, 스승이 누구냐?”.
그러자 혈황이 대답했다.
“스승? 그런 거 없소.”
제법 괜찮은 몸뚱이와 실력을 갖춘 놈에게 스승이 없다고?
혈황의 말을 들은 수신호법 사이에서 신경전이 벌어졌다.
쓸 만한 제자를 찾는 일은 바닷가에서 바늘을 찾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런 면에서 혈황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금덩어리였다.
사실 수신호법들은 겉모습과 달리 모두 일흔 살이 넘은 노인들이었다. 환골탈태를 여러 번 해서 젊어 보일 뿐.
그들은 더 늙기 전에 괜찮은 제자를 들이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쓸 만한 몸뚱이를 앞에 두었으니 욕심을 내는 것도 당연했다.
거기다 놈은 톡톡 튀는, 까칠하면서도 제법 맛깔난 성깔도 지니고 있었다.
‘암! 자고로 이런 제자를 들여야 손맛도 보고 그런 것이지.’
‘이놈을 어떻게 굴리지?’
‘보란 듯이 두들겨 패서 천하에 우뚝 솟게 만들어주마.’
‘제자야, 원래 수련이란 피와 땀이 흐르는 것이란다.’
그들의 마음이야 어떠하든, 혈황은 머리가 김을 뿜어내다 못해 터질 것만 같았다.
‘이 새끼들이 진짜!’
아마 앞에 있는 놈들이 조금만 약했어도 진즉 주먹이 날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한 놈, 한 놈이 자신과 별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네 놈이나 되었다.
주먹을 휘둘렀다가 자신이 맞기라도 하면?
그 쪽팔림을 어디에 하소연한단 말인가.
‘휴우우우, 힘없는 내가 죄지.’
혈황은 마침 청운이 방에서 나오자, 몸을 날렸다.
“어디 가느냐!”
“야 이놈아! 내 제자가 되라니까!”
수신호법들도 땅을 박차고 혈황을 따라가며 소리쳤다.
혈황은 이를 갈면서 네 노인을 피해 도망 다녔다.
그 광경을 본 청운은 박장대소가 터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랬다가는 혈황에게 몇 날 며칠 두고두고 시달릴 것이 뻔했다.
다음 날, 청운이 이끄는 마존령은 백철군과 함께 제갈세가를 나서서 개봉으로 향했다.
백청청은 백철군이 아닌 청운의 옆에 바짝 붙어서 따라갔다.
식사를 할 때도 청운 곁에만 머물렀다.
그 바람에 청운은 백철군의 살기에 가까운 눈빛에 의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난도질(?)을 당해야만 했다.
물론 백청청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 * *
백가장이 침묵을 깨고 강호로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무림맹에 활기가 넘쳤다.
총군사로 복귀한 제갈신기는 거침없이 명령을 내렸다.
“응천보에 연락을 넣어서 항마대에 합류하라 전해라. 그들의 힘이 꼭 필요하니 압박을 넣어서라도 합류시켜.”
“알겠습니다, 총군사. 그럼 상관세가와 응천보를 항마대에 합류시키겠습니다.”
월평이 전보다 활기 찬 모습으로 대답했다.
“적을 만나도 전면전은 절대 펼치지 말라고 해. 이청운과 백가장이 올 때까지는.”
“예, 총군사.”
“본대의 출동 준비는 어떻게 되었느냐?”
“예, 총군사. 맹주님 휘하 사신대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좋아. 나는 맹주님과 움직일 것이니 네가 이곳을 잘 지켜야 한다.”
월평이 힘차게 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절대 지난번과 같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월평은 제갈신기의 명령을 빠르게 적어서 휘하 군사들에게 전했다. 지시사항은 전서구에 매달려서 중원 각지로 날아올랐다.
* * *
한편, 개봉에서는 개방과 중소 방파가 노룡회의 무력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개방은 간간이 간을 보듯 공격해오는 노룡회로 인해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전면적인 공격이 없으니 무림맹의 도움도 받을 수가 없었다.
노룡회로서도 거지들의 단체인 개방을 대대적으로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개방은 무림맹에서도 소외받고 있었다. 개방을 친다 한들 무림맹의 전력에는 별 영향도 없었다. 게다가 끈질기기는 어찌나 끈질긴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
하지만 개방으로서는 그들의 공격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개방방주 염악에게는 개봉에서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개봉에는 청운의 스승이 있는 천향서원이 있었다.
그런데 청운의 스승인 위진천이 한 고집했다.
“군자가 죽음이 두렵다고 물러설 수는 없지 않은가. 허허허.”
그렇게 말하며 천향서원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개방방주 염악은 이를 악물고 노룡회의 공격에 맞서야 했다.
친우인 청운의 스승을 버리고 도망갈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카악, 퉤! 온다더니 언제 오는 거야?”
서신을 받은 지 사흘이 지났다. 그런데 목이 빠져라 기다려도 온다는 청운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노룡회 놈들은 한동안 치고 빠지는 국지적인 공격만 했는데, 최근의 조짐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개새끼들이 작정하고 쳐들어올 것 같은데…….”
며칠 전부터 나타나는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놈들이 전면적인 공격을 해온다면 개방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그때였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라 연신 마른 가래침만 뱉던 염악이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방주! 놈들이 또 쳐들어옵니다! 이번에는 제법 숫자가 많습니다!”
염악은 눈을 치켜뜨고는, 오른손에 쥐고 있는 커다란 개뼈다귀를 들어서 입술로 핥았다.
“씨부랄 놈들. 진짜 해보자, 이거지?”
개봉의 수많은 수로를 사이에 두고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다.
수많은 개방 제자와 협사가 개봉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졌다. 그들이 흘린 피가 수로를 붉게 물들였다.
“어떻게든 막아!”
염악이 악을 쓰며 뼈다귀를 휘둘렀다.
하지만 개방과 중소 문파의 힘만으로는 노룡회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다.
사람들이 수백 명이나 죽어가는 데도 개봉의 관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위에서 관여하지 말라는 명령이라도 내려온 듯했다.
싸움이 벌어진지 세 시진이 넘어가자, 개방의 방어망도 서서히 금이 가면서 뚫리기 시작했다.
“씨발! 왜 이 새끼는 안 오는 거야!”
염악이 청운을 원망하며 소리쳤다.
더는 버티기가 힘들었다.
‘여기서 뚫리면 어쩔 수 없어. 일단 후퇴했다가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
아무리 정의를 위해서, 친우를 위해서라지만, 불쌍한 개방의 제자들을 모두 죽게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환호성이 들렸다.
“지원군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