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
228화
* * *
청운은 무당산에서 닷새를 보냈다.
제갈세가의 상황을 이미 전해 받은 터라 급히 이동하지 않아도 되었다.
더구나 노룡회의 공격을 물리치긴 했지만 사상자가 적지 않았다.
무당파는 말할 것도 없고, 마존령 역시 여덟 명이 죽고 삼십여 명이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부상자를 치료하기 전에는 장거리 이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닷새가 지나자, 부상자 대부분 움직이는 데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서너 명은 당장 함께 움직이기 힘들었는데, 그들은 무당에서 돌봐주기로 했다.
그날 밤, 청운은 떠나기 전에 옥선진인을 만났다.
마주 앉아서 차를 한 모금 마신 그가 운을 뗐다.
“진인, 무당에서 황궁에 가 계신 분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무량수불. 그렇소이다.”
“그분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옥선진인은 청운의 말에 깃든 뜻을 짐작하고 신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무당을 도와준 걸 생각하면 무엇인들 들어드리지 못하겠소. 허나 빈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도 있으니 일단 말씀해 보시구려.”
“아시겠지만 황궁의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역도들이 황제 폐하를 억압하고 황궁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 더 깊이 조사하고 싶은데, 이 이 모가 진무사에서 파직되다 보니 황궁 내부에서 도움을 줄 사람이 없습니다.”
“허어, 그게 사실이오?”
옥선진인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황궁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 시기가 이청운이 진무사에서 파직된 때였다.
그러나 설마하니 역모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사실입니다. 이미 왕야 중 한 분으로부터 사실을 확인했고, 저를 따르는 소감을 통해 황제 폐하의 뜻도 확인했습니다.”
“으음,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 무당이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소? 빈도가 황궁에 가 있는 제자들에게 전할 서신을 써 드리겠소이다.”
“고맙습니다.”
청운은 그 정도만으로도 만족했다.
무당 제자들이 함께 움직여준다면 정 소감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 *
다음 날 아침 무당산을 내려온 청운은 마존령과 함께 융중산으로 향했다.
제갈세가에 도착하자마자 가주 제갈유문에게 곧장 안내되었다.
제갈세가는 청운과 함께 온 마존령이 마도사파의 무사들이라는 걸 알면서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구해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거처 앞마당에 나와서 청운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제갈유문이라 하오.”
“위명이 자자하신 가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존령을 맡고 있는 이청운입니다.”
청운과 제갈유문은 방으로 들어가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막힘이 없는 대화는 이각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제갈유문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청운이 왜 삼원을 했는지, 그 이유를 아는 데는 이각이면 충분했다.
천뇌라 불리는 제갈신기 숙부가 왜 이청운을 절대 거부하지 말라 했는지 이해하고도 남았다.
절대 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친구로 삼아야 할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선아가 작년에 혼인만 하지 않았어도 무조건 붙여줬을 텐데……’
그런, 백청청의 분노를 살 생각마저 했다.
그저 딸이 하나인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허허허허, 참으로 강호의 복이오. 령주가 황궁에 있었다면 어찌 무당파가 온전했을 것이며, 우리 제갈가가 저 무도한 자들의 손에 유린당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겠소이까.”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저 저희는 귀찮음을 약간 덜어드렸을 뿐이지요.”
“듣기로는 황궁의 일이 심상치 않아서 고민이라 들었소. 진무사에서 파직된 것도 그와 관련이 있을 거라 하던데…. 마침 본 가의 형제들 중 황궁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있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시구려.”
“그리 말씀하시니 염치불구하고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제갈유문과의 만남을 만족하게 마무리한 청운은 영빈각으로 갔다.
혈황과 백청청이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가가!”
백청청은 환한 미소로 청운을 반겼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나눠? 하여간 먹물들이란…….”
혈황은 무엇이 그리도 불만인지 잔뜩 인상을 긁었다.
청운은 먼저 백청청을 향해 말했다.
“백 소저, 어디 다친 곳은 없소?”
“예, 가가.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대주께서는 어디 가셨소?”
항상 백청청 곁에 붙어 있던 백야대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려는지 혈황이 전음을 보냈다.
-그 녀석은 급한 볼일이 있다며 백야 애송이 몇을 데리고 떠났다.
-어디로 간다는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백가장이 습격을 받았다.
-예? 누가……?
-자세한 건 청청이 보호하고 있는 수신호위가 알려줄 거다. 나에게는 그냥 백가장에 다녀올 것이니 너에게 말을 전해달라는 말만 했다. 아마 청청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같다.
-아! 알겠습니다.
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가장을 공격할 자들은 당금 강호에 한 부류뿐이었다.
노룡회.
아니 어쩌면 천황교의 본진이 직접 나섰을 수도 있었다.
‘괜찮을지 모르겠군.’
백가장이 천하제일가라 할지라도 상대가 천황교의 본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수백 년 동안 힘을 키워온 그들이라면 백가장의 맞수가 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때 문득 조금 전의 혈황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런데 뭐 불만이라도 있습니까?
-당연히 불만이 많지. 이 먹물들 속에서 칠 일을 지내 봐라. 얼마나 지겨운지……. 아니지, 너는 물 만난 물고기 같겠군.
-흠, 그럼 한 달 정도 더 지낼까요?
-그럼 나 혼자 떠날 거다. 어디 처박혀서 수련이라도 하는 게 나아.
그건 청운이 원치 않았다.
당장 써먹을 곳이 많은데, 폐관수련을 한다면서 십 년이나 처박혀 있을지도 몰랐다.
-걱정 마십시오. 이곳 상황만 정리되면 떠날 겁니다.
그때 백청청이 청운의 팔을 잡고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가, 저쪽의 죽림이 정말 멋져요. 우리 구경 가요.”
청운은 팔에 착 달라붙은 백청청의 촉감에 대답이 절로 나왔다.
“그, 그럴까요? 그럼 운청도…….”
청운이 혈황을 동행하려 하자, 백청청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혈황을 돌아다보았다.
하지만 혈황을 본 순간 눈에서 북풍한설 같은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운청 공자는 따로 할 일이 있으실 거예요. 그죠?”
혈황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함께 가겠다고 하면 두고두고 백청청에게 시달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 어. 나는 할 일이 있다. 너희 둘이 가.”
* * *
청운은 백청청과 함께 죽림에서 한 시진을 보낸 후에야 백청청의 수신호위를 따로 만날 수 있었다.
“어찌 된 일이오?”
수신호위는 상황을 설명했다.
“열흘 전 일단의 무리가 백가장을 기습했습니다.”
청운은 눈을 빛내며 그의 말을 들었다.
당시 백가장에는 평소와 다르게 모든 제자와 식솔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습격자들은 미처 그 사실을 모르고 백가장을 공격했다.
‘하필 공격을 해도 백가장의 모든 힘이 모인 시점에 했군.’
멍청한 놈들이었다.
덕분에 백가장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습격자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런데 그로 인해서 백철군의 고민이 하나 해결되었다.
그동안 선조의 유언을 지켜야 한다며 고집을 피우던 원로들이 가솔들의 죽음을 보고 생각을 바꾼 것이다.
백야대주가 백가장에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백가장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경우 백야대와도 손발을 맞추어야 하니까.
상황을 안 청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안 그래도 백가장에 찾아가서 부탁하려 했는데, 저절로 해결이 된 셈이었다.
‘백가장이 나서면 반격을 시작할 수 있겠군.’
* * *
무림맹주 양조생은 제갈신기를 다시 총군사로 임명했다.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몇 있었지만, 대부분 그의 복귀를 환영했다.
제갈신기는 가장 먼저 정보망을 새롭게 정비했다.
싸움에서 정보는 핏줄과도 같았다.
제갈신우가 만든 정보조직은 한쪽으로 치우쳐서 사람이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는 천황교를 상대할 수 없었다.
제갈신기는 그렇게 정보조직을 정비하면서 청운과의 연락망을 따로 구축했다.
천황교와 싸우기 위해서는 청운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렇게 한시도 쉬지 않고 정보조직을 정비할 때 백가장이 공격받은 사실이 무림맹에 전해졌다.
제갈신기는 전서를 받고 즉시 명령을 내렸다.
“월평, 백가장의 움직임을 한시도 놓치지 마라. 감시 인원이 더 필요하면 얼마든지 보내.”
“예, 총군사.”
월평이 대답하고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축 처졌던 전과 달리 그의 얼굴에서 활기가 느껴졌다.
월평에게 명령을 내린 제갈신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뒷짐 진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백가장이 움직인다면 강호의 판도가 달라질 수 있다.’
어쩌면 꼬일 대로 꼬인 실타래가 백가장에 의해 풀릴지도 몰랐다.
이청운도 그 점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제갈신기는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
“어디 한번 붙어보자, 이놈들.”
* * *
노룡회는 세력을 여섯으로 나누어서 무림맹과 정파세력을 괴롭혔다.
섬서 동부와 하남, 하북에서 세 개의 무력단이 활동했고, 나머지 세 개단은 하남 동부와 안휘를 휘저었다.
무당과 제갈세가를 공격한 자들은 화산파를 치고 호북으로 내려온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청운과 마존령에게 당해서 힘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문제는 하남 동부와 안휘성으로 움직인 자들이었다.
그들의 무력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안휘에서 제왕처럼 군림하는 남궁세가조차 그들과 일진일퇴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남궁세가의 무사대가 노룡회 무사 삼백여 명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때, 그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숫자는 삼십여 명에 불과했다.
개중에는 선풍도골의 노인도 있었고, 이십 대의 젊은 무사도 있었다.
그들은 경천동지할 위력의 무공을 선보이며 노룡회 무사들을 공격했다.
한나절 동안 이어진 싸움이 그들의 등장 이후 일각 만에 끝이 나버렸다.
하지만 남궁세가 사람들을 진정으로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이 지닌 무위가 아니라, 그들의 정체였다.
“백가장에서 오신 분들이란 말입니까?”
남궁세가 측의 수장인 창궁검대 대주 남궁충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소이다. 적도들을 뒤쫓던 중 남궁세가가 그들과 싸운다 해서 달려왔소이다.”
“오오, 마침내 백가장이 강호에 나왔군요.”
백가장은 남궁세가와 남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과거 무림지존으로 불렸던 백운룡의 부인이 바로 남궁세가의 여식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세가로 가시지요. 가주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남궁충은 백가장 사람들을 데리고 남궁세가로 돌아갔다.
남궁세가 가주 남궁명은 백가장 사람들이 왔다는 말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백가장 무사들이 창궁검대를 도와 적을 물리쳤다고? 그들이 세가에 들어왔다고? 그게 사실이냐?”
“예, 가주!”
노룡회로 인해 골치 아픈 이때, 백가장의 출현은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 * *
융중산(隆中山) 자락에 위치한 제갈세가 역시 때 아닌 손님맞이로 분주했다.
수백 년간 강서성을 벗어나지 않던 백가장의 방문 때문이었다.
제갈세가를 방문한 백가장 인원은 많지 않았다.
고작해야 열 명.
하지만 그 열 명에게 고작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백가장의 주인인 백철군이 직접 수신호법을 거느리고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