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
227화
“건방진 것들 같으니라고!”
허공에서 노호성이 으르렁거리듯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허공으로 향했다.
하늘에서 스르르 내려오는 선풍도골의 백야대주를 일면하자 흑야대 무사들은 화들짝 놀랐다.
“배, 백야대주?”
저승차사라도 본 것인지 흑야대 무사들이 몸을 떨었다. 그러나 노룡회 고수들은 백야대주의 무서움을 알지 못했다.
“곧 죽기 직전의 늙은이를 왜 겁내느냐! 공격해!”
노룡회 무사들을 이끄는 중년 사내가 사자후를 터트리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백야대주의 무표정하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감히! 하찮은 것들이!”
우르르릉!
사자후와 함께 백야대주가 검을 뽑아들고 허공을 그어댔다.
거미줄처럼 퍼진 강기의 그물이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노룡회 고수들을 일거에 두 동강 냈다.
후두두둑.
세 사람이 일 초식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제야 백야대주의 무서움을 안 노룡회 고수들이 질린 표정으로 물러섰다.
그 와중에 백청청이 몸을 날리며 쌍장을 뻗었다.
강맹한 장력이 노룡회 고수들을 덮쳤다.
콰과광!
노룡회의 중견 고수 두 사람이 강맹한 장력에 휘말려서 훌훌 날아갔다.
한편, 혈황은 뒤로 한발 물러서서 백야대주의 무공을 지켜보았다.
‘젠장, 저 늙은이 실력이 저 정도였나?’
청운에게 밀리는 것도 억울한데, 백야대주도 자신보다 한 수 위의 실력인 듯했다.
‘제길, 어서 무공을 회복해야지 원. 쪽팔려서….’
혈황은 자존심이 상했다.
전성기 때의 자신에 비한다면야 이청운이든 백야대주든 한 수 아래였다.
그러나 과거의 전성기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현재가 중요하지.
은근히 분노가 치민 그는 노룡회 무사들을 상대로 화풀이했다.
그 바람에 노룡회 고수들만 죽을 맛이었다.
“후퇴해!”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노룡회 고수들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러나 백야의 무사들이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제갈세가 역시 정예 무사들이 쏟아져 나와서 힘이 빠진 노룡회 무사들을 공격했다.
* * *
“이, 이, 개새끼…….”
광존은 숨을 헐떡이며 청운을 노려보았다.
어이없게도 삼 초식 만에 한 팔이 잘려 나갔다. 그리고 오 초식째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번에는 가운뎃다리가 아닌 왼쪽 다리가 반쯤 잘렸다.
“당신은 이곳에 오지 않았어야 했어.”
청운은 차갑게 말하며 검을 뻗었다.
광존은 어차피 묻는다 해서 대답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목숨을 깨끗이 거두는 게 나았다. 남자로서 미안한 마음도 있었고.
쿵!
청운은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앞으로 쓰러지는 광존을 놔둔 채 몸을 돌렸다.
마존령과 무당파의 공격에도 좀처럼 밀리지 않던 노룡회 무사들이 광존의 허무한 패배를 보고는 주춤거렸다.
청운은 검을 들고서 그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무공 경지가 현경을 넘어선 청운의 일검은 폭풍 같은 검강을 쏟아냈다.
노룡회의 중견 고수들조차 청운의 일검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죽어갔다.
일검에 서너 명씩 쓰러지니 두려움을 모르던 노룡회 무사들의 표정에도 공포가 드리워졌다.
정신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싸움의 균형마저 기울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오대사령은 철저히 오행의 방위를 지키며 흑야대 무사들을 압박했다.
신혈교 총단과 용마장원에서 무공 수련에 전념한 그들은 전에 비해 경지가 한 단계 높아진 상태였다.
흑야대 무사들이 강하다 하나 이제는 일대일로도 쉽사리 밀리지 않았다.
노룡회 무사들로서는 흑야의 도움도 받지 못하자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다.
반면 무당파 제자들은 적이 물러서기 시작하자 사기가 충천했다.
그렇게 일각.
마침내 노룡회의 살아남은 무사들이 명령도 떨어지기 전에 몸을 돌려 도주했다.
노룡회 무사들이 물러간 자리에는 시신과 붉은 핏물만 남았다.
무당 제자들은 부상당한 사형제들을 옮기고 시신을 정리했다.
승리했음에도 누구 하나 웃는 사람이 없었다.
마존령 대원들도 무당 제자들을 도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파와 사파로 적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동료였다.
무당 제자들도 그들의 도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부상자 치료와 시신 정리가 한창일 때, 청운은 자소전에서 옥선진인과 마주 앉았다.
옥선진인은 얼굴이 창백했다. 광존과의 격전으로 내상을 입은 듯했다.
“덕분에 무당을 지켜낼 수 있었소이다.”
“별말씀을. 저희가 아니었다 해도 무당은 끄떡없었을 겁니다.”
옥선진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역시 이틀 전만 해도 대무당이 노룡회 따위에게 당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청운이 연락해주지 않았다면, 마존령이 달려오지 않았다면 무당은 오늘 멸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무당은 시주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오. 언제든 무당이 필요하면 연락주시구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진인.”
청운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무당의 절대적인 도움. 그것이야말로 청운이 무당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목적 중 하나였다.
무당은 황궁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곳이었다.
황궁이 수십만 냥을 써서 무당의 도관을 지어줄 정도로.
‘이제 질긴 끈 하나는 생긴 셈이군.’
* * *
노룡회의 공격에 시름하던 무림맹에 한 줄기 서광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전 진무사 이청운이 무당파와 제갈세가를 구원했다.
소식을 접한 무림맹은 환호했다.
그동안 무림맹이 대규모 무사대를 출동시켜서 노룡회를 치려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노룡회의 전력은 막강했다. 움직임마저 신출귀몰했다.
결국 화산이 크게 당했고, 소림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중소 문파는 하루에 몇 곳이 피해를 봤고, 이삼 일 간격으로 멸문을 당한 곳마저 나왔다.
그런 와중에 청운이 노룡회 무리를 물리치고 무당파와 제갈세가를 구한 것이다.
그것도 마도의 무리인 마존령을 이끌고.
배신자 취급을 했던 청운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를 칭송하는 이들마저 무림맹 안에서 생겨났다.
무림맹은 무당파와 제갈세가에서 자세한 소식이 전해지자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도사복을 입은 수염이 가지런한 오십대 도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무량수불. 모두 알다시피 이번에도 적도들의 간계에 속아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의 말에 어수선하던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발언을 한 도인은 무당파 장문인 명현자였다.
소림과 더불어 구대문파의 영수인 대무당파의 장문인 명현자의 발언은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명현자에게 모였던 시선이 총군사 제갈신우에게 돌아갔다.
얼굴이 붉어진 제갈신우의 눈매가 부르르 떨렸다.
제갈신우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명현자는 말을 이었다.
“언제까지 놈들에게 놀아날 겁니까? 이번에도 하마터면 무당과 제갈세가가 놈들에게 유린당할 뻔했지 않았소이까.”
“으음, 어쩌자는 것이오?”
무림맹주 양조생이 명현자를 보며 물었다.
그 역시 힘 한번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계속 밀리는 현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이유도 잘 알고 있었다.
무림맹 무사들을 지휘해야 할 총군사 제갈신우의 능력이 제갈신기에 비해 한참 뒤처졌다.
제갈신기가 총군사 자리에 그대로 있기만 했어도 지금처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량수불. 저번 화산파가 당한 일, 이번의 일, 총군사의 책임이 큽니다. 듣기로는, 군사각에서 다른 결론이 났는데도 자신의 주장을 밀어붙였다는 말마저 있더이다. 하여… 총군사의 교체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일순간 장내가 더욱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해진 실내.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제갈신우를 주시했다.
제갈신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끝이군. 제대로 뜻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물러서야 한단 말인가?’
그토록 오르고 싶었던 총군사 자리였다.
젊을 적에는 사촌동생인 제갈신기의 그늘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무림맹 정치였고, 장로회를 좌지우지할 위치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항상 마음속에는 총군사가 있었다.
언젠가는 제갈신기를 눌러보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기회가 왔다.
하지만 그 기회는 결국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스르륵, 제갈신우의 두 눈이 떠졌다.
“제가 물러나겠습니다.”
“허어, 어찌 그런 나약한 말씀을 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안 됩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퇴진이라니요.”
몇몇 사람이 나서서 반대했다. 평소 제갈신우를 따르던 사람들이었다.
제갈신우가 물러나면 자신들 역시 기댈 언덕이 없어지기에 반대했다.
그러나 제갈신우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제갈신우를 누구도 잡지 못했다. 그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지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제갈신우를 따라서 몇 사람이 함께 나가자, 어수선한 장내를 양조생이 진정시켰다.
“자! 그럼 새로운 총군사로 누가 좋겠습니까?”
선포하듯이 말하는 양조생의 말에 눈치를 보던 이들이 저마다 손을 들며 외쳤다.
“학식과 무공을 겸비한 위지세가의 천기군자 위지상 대인이야말로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적임자입니다.”
“무슨 소리! 총군사라면 당연히 귀계에 뛰어난 사마세가의 사마염 대인 아니겠소?”
“어허, 사마염 대인이 뛰어나긴 하지만 귀계라면 염천가 역시 뒤처지지 않소. 특히, 염상군 군사는 군사각에서 이십 년을 보낸 분입니다. 현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것이니 염상군 군사를 총군사에 추천합니다.”
한 명 한 명 거론될 때마다 모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모두가 인정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개중에는 눈살을 찌푸릴 만한 인물도 심심치 않게 거론되었다. 무림의 안녕보다는 자신의 이권을 위한 추천이었다.
그렇게 무림맹 회의장이 뜨거워질 때 명현자가 말했다.
“지금 이 난국을 타개해 나갈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 * *
노룡회가 발칵 뒤집혔다.
임시 회주를 맡고 있던 노야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들어서 아시겠지만, 무당파와 제갈세가를 공격하러 간 본대가 패했다는 소식입니다.”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겠군요.”
“광존이 죽었답니다. 가운뎃다리가 잘린 것도 억울한데, 원수인 이청운에게 죽었다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노야께서는 무얼 하시고 계셨습니까?”
몇몇 인물이 언성을 높이며 노야를 압박했다.
한쪽에 가만히 있던 장한은 기세를 터트리며 직설적으로 말했다.
“노야, 이제 그만 물러나시지요.”
주름이 가득한 노야의 안색이 붉어졌다.
혼자서 이들을 상대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을 밀어주던 인물들이 하나둘 싸움에 나가서 패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묘수선생을 따르는 무리였다.
자신을 따르던 자도 있긴 했는데 그마저 입을 닫고 있었다.
‘혈기존자가 등을 돌렸군.’
적포를 두른 강인한 인상의 승려. 그의 대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바로 혈기존자였는데, 불경이라도 외우는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반들거리는 대머리를 한 대 갈겨주고 싶었다.
“그럼 누구를 임시 회주로 뽑을 거요?”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안 노야가 짜증을 억누르고 물었다.
너도나도 한마디씩 했다.
“묘수선생이시라면 본 회를 잘 이끌어나갈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찬성합니다.”
“무림맹의 천뇌에 비견될 분은 묘수선생밖에 없지요. 하하하하.”
결국, 노룡회의 임시 회주 자리가 묘수선생에게 넘어갔다.
“축하드립니다, 회주.”
“이제야 제대로 노룡회가 굴러가게 생겼습니다.”
“이번 기회에 회를 일신하고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줄 때입니다.”
묘수선생을 향해서 아부성 발언이 이어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묘수선생이 일어났다.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다.
천황교 휘하의 단체 중 중원 무림을 관리하는 노룡회의 회주 자리는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자리였다.
“허허허허, 그리 말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모 생천, 신명을 바쳐 무림맹을 말살하는 데 앞장서겠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