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
222화
* * *
무림맹은 속속 모여드는 정파 무사와 원로 고수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정파의 각 문파에서도 재건 작업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을 기꺼이 내놓았다.
무림맹이 무너지면 자신들을 지켜주던 담장이 사라진다는 것을 이번에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다.
덕분에 무림맹은 빠르게 위용을 회복해 갔다.
무너지거나 부서진 전각들이 하나하나 수리를 마치면서 무림맹 무사들도 안정을 회복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오랜 세월 모아 놓은 정보가 바로 그러한 것 중 하나였다.
노룡회에서 가져가거나 불태우는 바람에 무림맹에서 수집한 정보의 많은 부분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군사각 지하의 비밀창고가 전소되지 않아서 절반 정도의 정보가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각 문파에서 시시각각 보내오는 정보도 시간이 지나면서 쌓이기 시작했다.
무림맹의 군사들은 그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노룡회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힘이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면 좋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놈들이 곳곳에서 정도 문파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대부분 소규모 중소 문파들을 공격하고 있지만, 대문파가 공격받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 * *
무림맹이 재건을 위해 땀을 쏟고 있을 때, 청운과 마존령은 신혈교 총단을 떠나서 용마장원으로 돌아갔다.
용마장원에 있던 사도맹 지휘부는 이미 한중의 총단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용마장원의 장주 태운강은 마존령의 귀환을 쌍수 들고 환영했다.
사도맹이 총단으로 돌아간 후 언제 정파의 공격이 있을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신혈교를 무너뜨린 주역, 마존령이 귀환했으니 그들로서는 죽은 할아버지가 돌아온 것처럼 반가웠다.
태운강은 사도맹 지휘부가 사용했던 후원을 통째로 마존령에게 내주었다.
청운은 후원에 머물면서 사도맹과 백야로부터 받은 정보를 취합하며 천하가 돌아가는 상황을 주시했다.
정 소감과 스승님께 보낸 백야의 무인이 답신을 가져와서 황궁의 상황도 대략적으로는 파악한 상태였다.
정 소감은 정 소감대로 뜻이 맞는 사람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승님께서는 유가(儒家)의 힘을 결집시키는 중이었다. 때가 되면 연락할 것이니 조급해하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내용이 서신에 적혀 있었다.
하긴 워낙 은밀함을 요구하는 일이다 보니 제대로 된 힘을 갖추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청운은 당장 스승님께 달려가고 싶었지만 참아야만 했다.
자신이 천향서원에 나타난 것을 알면 스승님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청운은 때가 오길 기다리는 동안 신혈교에서 얻은 검을 손에 익히고, 무공 또한 연구했다.
그런데 신혈교에서 얻은 무공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만 해도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자꾸 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어떤 때는 몇 장 되지도 않는 양피지를 쳐다보다가 한나절을 훌쩍 보내기도 했다.
그 바람에 백청청에게 한 소리 듣기도 했고.
할 수 없이 청운은 요즘 얼굴조차 보기 힘든 혈황을 불렀다.
혈황은 자신의 힘을 되찾겠다며 신혈교 총단에서도 사나흘에 한 번 정도 얼굴을 비쳤었다.
용마장원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수련한다며 뒷산의 동굴에 처박혀서 보름 동안 겨우 네댓 번 남짓 봤을 뿐이다.
“무슨 일인데 바쁜 사람을 부른 것이냐?”
“수련은 제대로 되고 있습니까?”
청운이 묻자, 혈황이 투덜거렸다.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이 빌어먹을 놈의 몸뚱이가 예전의 나에 비하면 형편없어서 발전이 너무 더디구나.”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확 젊어지지 않았습니까. 그게 어딥니까?”
“뭐, 그건 그런데…….”
혈황도 그 사실은 인정했다.
삼십 년은 젊어진 몸뚱이 아닌가. 거기다 무공도 강하고, 얼굴도 괜찮게 생겼다.
마음만 먹으면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부인으로 얻는 건 일도 아니었다.
사실 처음에만 해도 그 문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자들이 추파를 던졌다.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젊어져서 새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자식을 낳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혈황은 그 생각을 하자 머쓱해졌다. 그래서 더 인상을 쓰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왜 불렀냐니까? 할 말 없으면 가겠다.”
“이것 좀 봐주십시오.”
청운은 흑룡이 그려진 양피지 책자를 내밀었다.
“뭔데?”
혈황은 양피지 책자를 받아서 대충 넘겨보았다.
용의 형상을 한 그림이 장난처럼 그려져 있었다.
“누가 이런 장난을…… 장난…… 아니, 장난이 아니고…….”
양피지의 그림을 보던 혈황의 표정이 점점 묘하게 변했다.
말투도 더듬거렸다.
“뭔지 아시겠습니까?”
혈황이 고개를 홱 돌려서 청운을 바라보았다.
왠지 몰라도 황당함과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뒤섞여 있었다.
“이, 이거… 어디서 났냐?”
“신혈교 무고에서요. 왜 저번에, 용 맹주가 뭐든 하나 먼저 가져가라고 했잖습니까? 그때 가져왔죠.”
“뭔지도 모르고?”
“설명서에 암천의 대지에서 얻은 거라고만 적혀 있었습니다.”
“암천의 대지?”
“저도 어딘지는 모릅니다. 처음 들어본 곳이거든요.”
“하아…….”
갑자기 혈황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씨발.”
난데없이 안 하던 욕도 했다.
청운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누군 가만있어도 복이 막 굴러오고, 누군 죽어라 노력해도 이런 삼류 몸뚱이나 얻고. 아니 뭐, 삼류까진 아니지만…….”
혈황이 그답지 않게 구시렁구시렁 투덜거렸다.
청운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다시 물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무공 같긴 한데, 아무리 해석을 하려고 해도 어려움이 많습니다만.”
혈황은 손에 쥔 양피지 책과 청운을 번갈아보더니 자신이 아는 바를 말했다.
“이거… 그거다.”
“그거요?”
“흑마룡으로 펼치는 검식.”
“……예?”
“구두룡 중에는 심법만 있는 것도 있지만, 초식이 있는 것도 있다. 그중 흑마룡은 심법도 심법이지만, 초식이 더 압권이라고 들었다.”
혈황의 말에 청운도 양피지 책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혈황이 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근데 말이다, 흑마룡의 검식을 펼치려면 필요한 것이 있다.”
“필요한 거라면……?”
“아쉽게도 흑마룡의 검식을 펼치려면 그 기운을 감당할 수 있는 검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지.”
“…….”
“너무 실망하지 마라. 꼭 검이 아니어도 이 초식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으니까.”
혈황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왠지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사실이 그랬다.
저번 위기에서 공력을 합치시킨 일도 그렇고, 흑마룡의 검식을 얻은 것도 그렇고,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단 말인가? 왜 저놈에게 모든 행운이 다 몰리는데?
자신은 아직도 과거의 힘을 칠 할밖에 되찾지 못했는데 말이야.
아무리 제자 같은 청운이지만, 부럽고, 질투가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식, 그 정도 얻었으면 됐지, 서운해하기는.’
그때 청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한쪽에서 뭔가를 집어 내밀었다.
“그럼 이것도 봐주십시오.”
“응? 웬 검이냐?”
“황제께서 주신 검이 아무래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저번 신혈교 병기고에서 하나 고른 겁니다.”
“그래?”
혈황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며 검을 받았다.
“그것도 암천의 대지에서 나온 거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막 검을 뽑으려던 혈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검도… 흑마룡의 검식이 나온 곳에서 나왔다고?”
“예.”
혈황을 검을 천천히 뽑아보았다. 왠지 손이 잘게 떨리는 듯 느껴졌다.
그리고 곧……
“지미…….”
다시 욕이 나왔다.
“혹시 이 검이 흑마룡의 검식을 펼칠 수 있는 검입니까?”
“그, 그런 거 같다.”
혈황이 힘없이 말했다.
저놈이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확실한 거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복이 넝쿨째 굴러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그렇군요. 어쩐지 그 책을 얻었을 때 검이 우는 것처럼 느껴진다 했더니…….”
혈황은 더 이상 질투하지 않기로 했다.
복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옆에 있으면서 남는 복이라도 얻는 게 최선이었다.
“이 책에 그려진 흑룡을 그림으로만 보지 말고 혈도와 연관시켜서 봐라. 그럼 뭔가 얻는 게 있을 것 같구나.”
언제 욕을 했냐는 듯 근엄하게 말한 혈황은 검을 다시 내려다보며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반쯤 빠져나온 검은 흑마룡이라는 말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나도 괜찮은 검 하나 장만해볼까?’
혈황신공을 검으로 펼치면 그것도 괜찮을 듯했다. 자신의 무공이 혈황신공이란 걸 알아보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 * *
무림맹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무사들을 각 지역으로 파견했다.
노룡회의 정도 문파에 대한 공격이 심해지고 있어서 분타의 힘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었다.
각기 오백여 명이 일대를 이루어서 모두 사대, 이천여 명이 나섰다.
무림맹에서 대규모 무사대를 파견했다는 소식은 사흘이 지났을 때 청운에게 전해졌다.
“흩어져서 상대하려면 쉽지 않을 텐데.”
청운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무림맹도 신비세력, 천황교를 얕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과거의 자만심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 듯했다.
제갈신기가 여전히 총군사 직위에 있었으면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아쉬울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속속 들어오는 소식 중에 기분 좋은 소식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노룡회에게 정파가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가끔 무림맹이 노룡회에 역공을 가해서 피해를 입히기도 했지만, 곧 반격을 받아 피해를 입곤 했다.
문제는 노룡회보다 무림맹 쪽 피해가 더 크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무림맹의 피해가 점점 누적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림맹에 몰려드는 정파 무사들이 많아서 피해를 봐도 당장은 감당이 된다는 것이었다.
청운은 읽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언젠가는 무사의 충원도 한계에 다다를 거다. 지금 같은 상황이 계속 이어져서는 안 되거늘…….”
그때가 되면 본격적으로 무림에 피바람이 불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문제를 지적해준다 해도 보나마나 무림맹은 반기지 않을 것이다.
사방에서 합류하는 정파 무사들로 인해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지 않은가.
지금 손을 내밀어 봐야 좋은 소리를 듣기는커녕 자신을 향해서 칼날을 들이밀지도 모를 일이다.
‘좀 더 기다리는 수밖에.’
* * *
무림맹 총군사 제갈신우는 하나를 얻고 둘을 잃는 상황이 계속되자, 더 많은 무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이미 무림맹 총단에 모인 무사 숫자만 해도 오천 명을 넘어가고 있었다. 일이천 명 정도는 더 파견해도 문제가 없을 듯했다.
맹주 양조생도 총군사의 계획을 허가했다.
그런데 추가 지원대를 파견하고 사흘이 지났을 때, 사방에서 들쑤시던 노룡회 무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보고를 받은 제갈신우는 눈을 치켜떴다.
“뭐라? 놈들의 행방을 놓쳤다고?”
“송구합니다. 놈들을 추적하던 추적조가 모두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그 이후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놈들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갈신우는 백색 유생복을 입은 월평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게 정보담당이라는 자가 할 소린가? 자그마치 천이 넘는 인원이야! 군사각 정보원들이 눈뜬 봉사들도 아니고, 그 많은 인원의 이동을 놓치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보느냐?”
“…….”
월평은 입을 꾹 닫았다. 할 말은 많았지만 제갈신우 귀에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제갈신우가 잔뜩 인상을 쓰며 물었다.
“어디서 놓친 것이냐?”
“선서성 대녕(大寧)과 길현(吉縣) 사이의 산맥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제갈신우는 한쪽에 둘둘 말려 있는 두루마리 중 하나를 골라서 죽 펼쳤다. 산서성과 주변 지역이 제법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였다.
그가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이쯤이냐?”
“예, 그곳으로부터 약 삼십 리 떨어진 지점에서 추격조의 사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젠장, 이놈들이 무슨 꿍꿍이를 벌이려고 모습을 숨긴 거지?”
불길한 느낌에 솜털이 곤두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