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220화
* * *
마존령에게는 큰 건물 하나가 거처로 주어졌다. 신혈교를 떠날 때까지는 그곳에서 지내야 했다.
이십여 명이 함께 지낼 수 있을 정도로 큰 방이 십여 개나 되어서 불편함은 없었다.
청운이 백야대주까지 만나고 오자, 혈황과 오대사령이 청운의 방에 모였다.
마창 송기중과 냉혈마도 육송이 제법 큰 부상을 입었지만, 일반적인 움직임 정도는 지장을 받지 않았다.
“신혈교를 무너뜨렸다 해서 끝난 게 아니오. 어쩌면 이제 시작이라 할 수 있소.”
오대사령이 모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무공에 자신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신혈교를 상대한 후 자만심을 내려놓았다.
세상은 그들이 아는 것보다 더 살벌했다.
강자도 많았다.
강호에서 살아가려면 더 강해지고, 독한 마음을 먹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대들에게 한 가지 요구할 것이 있소.”
“말씀하시지요, 령주.”
“천황교를 무너뜨릴 때까지… 나에게 목숨을 맡겨주시오.”
용화청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저희는 령주의 명을 받들고 있지 않습니까? 명령을 내리시면 불길이라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하후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령주.”
그런데 고한이 청운을 보면서 말했다.
“혹시, 오직 령주의 명만 따르라는 말씀 아니신지요?”
그 말에 용화청의 표정이 굳어졌다.
명령을 따르는 것은 같았다.
그러나 앞과 뒤는 뜻이 달라질 수 있었다.
청운이 용화청을 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오직 제 명령만 들어야 합니다.”
용화청은 입을 꾹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고한이 다시 말했다.
“천황교를 물리칠 때까지만 해당되는 겁니까?”
“맞습니다. 그 이후에는 자유롭게 결정을 내리시면 됩니다.”
용화청의 이마에 골이 깊게 파였다. 그러나 조금 전보다는 표정이 많이 풀어졌다.
“령주, 맹주께서 허락하실 거라 보십니까?”
“허락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야 승산이 조금이라도 있습니다.”
청운의 강한 어조에 용화청은 고뇌했다.
그는 사도맹의 후계자다.
그런데 자신을 밀어주기로 한 이청운이 갑자기 맹주의 명조차 받지 않겠다고 한다.
이청운을 믿어도 될까?
혹시 나중에 뒤통수를 치면?
고뇌하던 그가 물었다.
“령주께서 이전에 한 말씀, 아직도 유효합니까?”
청운이 어찌 그 말뜻을 모를까.
그는 용화청의 두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당연히 유효합니다.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요.”
입을 꾹 다물고 청운을 보던 용화청이 벌떡 일어났다.
모두가 침중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 용화청이 한쪽 무릎을 꿇고 포권을 취했다.
“용화청, 령주께 목숨을 맡기겠습니다.”
지켜보던 나머지 사대사령이 용화청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령주께 목숨을 맡기겠소이다.”
“이제부터 육승의 목숨은 령주가 알아서 하시구려.”
한쪽에서 지켜보던 혈황이 콧소리를 냈다.
“킁, 생각 잘했다. 작금에서 천황교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청운밖에 없어.”
청운도 마주 포권을 취했다.
마침내 두 번째 벽도 넘었다.
“고맙소. 이 이청운, 형제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오.”
형제.
평범한 단어인데도, 오대사령은 이상하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날 해가 질 무렵, 백청청이 백야의 무사들과 함께 청운을 찾아왔다.
“가가!”
막 운공을 마치고 방을 나온 청운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백 소저, 생각보다 일찍 왔군요.”
“좀 더 일찍 와서 가가를 도와주었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죄송하기는? 내가 미안하지요. 오는 줄 알았으면 마중을 나갔을 텐데…….”
백청청이 청운의 품에 반쯤 안겨 있는 모습을 보고 마침 근처에 있던 몇 사람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저런 때는 신혈교도들에게 공포를 심어준 마존령주가 아니라, 어린 소녀의 마음을 훔치려는 바람둥이 같았다.
* * *
신혈교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천황교의 거대한 대전 안에 묵직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런데 대노할 줄 알았던 천황은 오히려 즐거운 표정이었다.
“재밌군. 이청운이란 아이가 그 정도였나?”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머금은 천황이 대전 바닥에 부복하고 있는 자들에게 말했다.
“노룡회에 아이들을 지원해라. 사도맹 놈들이 움직였으면 무림맹도 그냥 있지는 않을 테니.”
“즉시 시행하겠나이다!”
굳이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정파 놈들이나 사파 놈들이나 서로에게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족속들이다.
그런데 신혈교가 사도맹에 무너졌으니 정파 놈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전력을 다해 노룡회를 노릴 것이다.
“문제는 이청운이란 놈인데…….”
천황은 턱을 쓱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정말 마음에 드는 놈이긴 한데, 자신의 팔다리 중 하나를 부러뜨린 놈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감히 버러지만도 못한 것이 신에게 도전하다니.
“답례는 해줘야겠지. 일단 무림을 흔들어라. 정신없이 흔들리다 보면 자신들의 검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분간할 수 없을 거다.”
“존명!”
천황은 명을 내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혁련휘가 서 있었다.
천황교의 후계자가 그딴 놈들에게 패하다니.
멍청한 놈.
만일 유일한 후계자가 아니었다면 머리를 터트렸을 것이다.
“쯔쯔쯔쯔, 어리석은 놈. 그딴 놈들의 공격도 예측 못 하고 당한단 말이냐?”
“전날의 사도맹만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습니다.”
“내 말 명심해라. 천황의 위를 잇기 위해서는 강해야 한다. 나약한 놈은 필요 없느니라.”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여 조부님께 바라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보아라.”
“더 강해지고 싶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해져서 이청운의 머리를 부수어버릴 것입니다. 길을 알려주십시오.”
혁련휘는 간절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무릎을 꿇었다.
천황은 혁련휘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와 다른 태도에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더 강해지고 싶으냐?”
“그렇사옵니다.”
“그 어떤 고통도 이겨낼 자신이 있느냐?”
혁련휘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천황이 그리 말할 정도면 정말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 할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조금만 더 노력하고, 영약을 복용하면 이청운 정도는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청운 밑에 있는 자조차 이기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입술을 살짝 깨문 다음 말했다.
“이겨낼 수 있습니다.”
“좋다. 그런 마음이라면 길을 알려주마.”
천황이 답하고는 오른쪽에 그림자처럼 부복해 있는 흑의인에게 말했다.
“소천주가 천황동에 들어갈 것이다. 준비해 놓아라.”
흑의인은 아무런 말도 없이 허리만 숙였다.
“천황동은 천황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다. 들어가서 뭘 얻을지는 너의 능력에 달렸느니라.”
혁련휘는 감격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도 천황동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그곳을 들어갔다 나와야만 진정한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드디어 그곳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감사합니다, 외조부님!”
하지만 그는 생각도 못 했다.
천황동의 또 다른 이름이 지옥동(地獄洞)이라는 걸.
천황이 지금까지 그곳에 세 사람을 넣었으며, 아무도 살아나오지 못했다는 걸.
아직도 정식 후계자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 * *
신혈교를 무너뜨린 지 보름째 되던 날.
계곡에 널린 수많은 시신들이 대부분 정리되었다.
용천관을 비롯한 사도맹의 일진이 먼저 신혈교 총단을 떠났다.
그들은 보고의 보물들을 마차 다섯 대에 싣고 갔다.
남은 인원은 마존령과 사도맹 무사 오백여 명이 전부였다. 물론 백야는 떠나지 않았고.
마존령이 남은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혹시 모를 노룡회와 천황교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신혈교에 있는 수련장이 마존령 대원들의 수련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백야대주는 불만이 많았다.
청운과 마존령이 떠나야 자신도 여기저기 구경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청운이 가지 않으니 백청청도 안 가고, 자신 역시 갈 수가 없었다.
“수련은 다른 곳에 가서 해도 되잖느냐?”
“이곳보다 좋은 곳을 찾기가 어디 쉽습니까?”
백야대주는 유들유들한 청운의 면상에 한 방 갈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뒷감당이 힘들 정도로 난리가 날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 달 정도면 목표로 했던 수련을 끝낼 수 있을 겁니다.”
“한 달이나?”
“심심하시면 백야의 수련을 봐주시지 그러십니까?”
마존령 대원들의 수련에 자극받은 백야의 무사들도 얼마 전부터 수련에 전념하고 있었다.
“흥, 그놈들이야 내가 없어도 잘하고 있느니라.”
“그럼 저와 장안 구경이나 가지 않겠습니까?”
백야대주의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장안 구경?”
“마음에 안 드시면…….”
“가자.”
백야대주는 재빨리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혼자도 구경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손녀를 신혈교 총단에 놓고 가는 게 불안해서 갈 수가 없었다.
문제는 손녀를 데리고 가려 해도 손녀가 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청운이 함께 가지 않으면 안 가겠다면서.
그런데 청운이 가겠다고 했으니, 손녀도 따라 나설 것이다.
“뭐 해? 지금 출발해야 해지기 전에 도착하겠구만.”
“백 소저를…….”
“청청아! 장안 구경 가자!”
“…….”
분명히 근처에 있을 텐데 대답이 없다.
이번에는 청운이 말했다.
“나도 함께 갈 거요!”
“예! 가가! 지금 가요!”
백야대주는 쪼끔 서운했다.
‘품에서 떠나면 남이라더니…….’
* * *
장안에 도착한 청운은 두어 시진 동안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백청청과 백야대주는 오랜만의 나들이가 반가운지 즐겁게 돌아다녔다.
청운도 그때만큼은 황궁이나 천황교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해가 지자 서경왕부 근처 객잔에 방을 얻었다.
그러고는 저녁식사를 마친 후, 백야대주와 백청청을 남겨두고 혼자 객잔을 나섰다.
서경왕부는 전과 다른 분위기였다.
황제가 권한을 대부분 빼앗긴 것에 그들 역시 일조를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황군에 대한 지휘권 박탈과 이동 제한이었다.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오히려 협박성 서신만이 손에 돌아왔다.
그것도 황제의 이름으로.
미칠 노릇이었다.
태친왕도 자신의 실수를 절감하고 매일 술을 마셨다.
그날도 밤이 깊어지도록 술을 마시는데 뒤에서 바람이 불었다.
“허어, 문이 열렸나 보구나. 닫거라.”
뒤에 있을 호위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얼 하느…….”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리던 그가 말을 멈췄다.
한 사람이 뒤에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아니 전에 봤던 자였다.
“자넨……?”
“오랜만입니다, 왕야.”
“파직당한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제가 파직당한 거나, 왕야께서 권한을 빼앗긴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뭐라?!”
태친왕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청운은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냉랭하게 말했다.
“황제를 배신한 자가 아직도 왕야의 자리에 있으니,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아닙니까!”
“네 이놈!”
“소리쳐 봐야 소용없습니다. 아무도 안 들어올 테니까.”
“…….”
그제야 호위들이 모두 쓰러져 있다는 걸 안 태친왕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나마 술기운에 두려움은 덜해서 몸이 떨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네놈이 뭘 안다고 그딴 소리냐?”
“알고 모르고가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나라가 간악한 적도에게 넘어가는 것도 모르고 매일 술이나 마시는 작자가 할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청운이 비꼬며 다그치자, 태친왕의 얼굴이 벌게졌다.
“무, 무슨 소리냐, 이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