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219화
용천관의 그 말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이 그랬으니까.
심지어 맹천기도 고개를 끄덕여서 인정했다.
“인정하오! 솔직히 마존령주가 아니었다면, 신혈교를 무너뜨렸다 해도 이 안에 있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은 염라대왕 앞으로 갔을 거요.”
“부맹주의 말이 맞다. 그만큼 놈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강했어.”
차마 입으로 말을 못 했을 뿐, 마존령이 없었다면 패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백야가 흑야의 무리를 제거한 역시 막대한 공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용천관도 그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백야는 마도사파의 천적. 도움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신혈교조차 천황교가 거느린 세력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야.”
승리의 기쁨과 전리품 분배에 들떠 있던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쿵!
용천관이 발을 굴렀다.
전각 안에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졌던 간부들의 어깨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에 신혈교를 무너뜨렸듯이 우리는 또 천황교를 상대해서 반드시 이길 것이다!”
용천관의 힘이 실린 목소리에,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 살아났다.
“그 일에 누구보다 마존령주가 앞장서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청운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혈마를 죽이는 대가로 제법 심한 내상을 입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일절 드러내지 않았다.
“전력을 다해 천황교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설 것입니다!”
용천관은 고개를 한번 크게 끄덕이고 다시 말했다.
“본 맹주는 가장 큰 공을 세운 마존령주에게 신병이기 한 가지, 보물 한 가지, 무공비급 하나를 우선 고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할 것이다. 마존령주는 보고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씩 고르도록 해라.”
* * *
이청운은 용천관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여서 지하에 있는 보고로 내려갔다.
신혈교 대전각의 지하에 있는 보고는 모두 세 개로 나누어져 있었다.
무공비급이 들어 있는 곳.
신병이기가 보관된 곳.
금은보화가 보관된 곳.
이청운은 먼저 신병이기가 보관된 곳에 들어갔다.
그가 황제에게 하사받은 검도 나름 보검에 들만큼 뛰어난 무기였다.
그러나 숱한 싸움을 겪으며 충격이 가중되어서 수리를 해야 될 때가 된 터라 괜찮은 검이 하나쯤 더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보고에 있는 무기 중 검과 도가 가장 많았다.
검은 모두 스물두 자루. 하나같이 뛰어나서 만금의 가치가 있는 보검들이었다.
어떤 검은 검집에 붙어 있는 보석만 해도 능히 은자 수만 냥의 가치가 있을 듯했다.
하지만 청운이 원하는 것은 화려한 검이 아니었다. 특별하게 유명한 검도 아니었고.
그가 바라는 것은 싸울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검이었다.
하나하나 들어서 가볍게 휘둘러본 그는 검이 세 자루 남았을 때 눈을 빛냈다.
그가 집어든 검은 검집과 검병이 광택도 없는 검은색이었다.
검병에는 비늘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문양이 검신에까지 새겨져 있었다.
차이라면 검병의 문양은 양각이고, 검신의 문양은 양각도 음각도 아닌, 검신의 표면에 남겨진 무늬라는 것이었다.
“멋지군.”
다른 검과 달리 오랫동안 써온 검처럼 손에 착 달라붙었다.
특히 검을 쥐고 있으면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피로 연결된 자기 몸의 일부라도 되는 듯 그 어떤 거부감조차 들지 않았다.
청운은 그 검이 놓여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한 보검 옆에는 명패가 달려 있는데, 그 검 옆에는 명패 대신 간단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암흑의 대지에서 얻은 검. 저주가 깃들어 있어서, 검의 주인이 된 자들은 검에 기운을 빼앗기고 백 일 안에 모두 죽었다 함.]
청운은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좋은 검에 저주가 깃들었다니.
청운은 검을 내려다보았다. 저주는커녕 친근함이 느껴졌다.
“실력이 없어서 죽은 걸 검 탓으로 돌리다니.”
피식, 실소를 지은 그는 검을 쓰다듬었다.
“이런 구석에 처박혀 있지 말고 내 친구가 되어라.”
그 순간, 참으로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검이 애교를 부린다고 하면 이상하려나?
어쨌든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하하하, 너도 좋은가 보구나.”
청운은 검을 옆구리에 끼우고 병기고를 나섰다.
두 번째 들어간 곳은 무공비급이 있는 곳이었다.
비급은 오랜 보관을 위해 오동나무로 만든 상자에 담겨 있었다.
상자 하나에 비급 하나.
언뜻 봐도 오동나무 상자가 족히 삼사백 개는 될 듯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상자 뚜껑을 열고 비급을 살펴보았다.
종이로 된 것도 있고, 가죽으로 된 것도 있었다. 어떤 비급은 금판으로 된 것도 있었고, 은이나 동으로 된 것, 죽간으로 된 것도 있었다.
하지만 황궁무고에서 수많은 무공비급을 섭렵한 그였다. 신혈교에 무공비급이 많다 하나 그의 눈에 찰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무공이 서너 가지 있었는데, 자신이 익힌 무공과 겹쳐서 무공 증진에 큰 도움은 되지 않을 듯했다.
그런데 비급을 대충 훑어보며 중간지점에 갔을 때였다.
상자를 열자 누런 양피지로 된 책이 보였다.
두껍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열 장 정도. 그나마도 표지를 빼면 아홉 장이 전부였다.
책의 제목은 비천흑룡검(飛天黑龍劍).
흔히 볼 수 있는 이름만 거창한 검법 같았다.
그런데 책과 함께 들어 있는 설명서가 보였다.
[암흑의 대지에서 얻은 무공서. 자신의 진기를 갉아먹어 저주가 깃들었다고 알려진 검법임.]
‘뭐야? 이 검과 함께 발견된 무공서라고?’
암흑의 대지가 어디인지 알 수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검과 무공서가 한곳에서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양피치 책을 펼쳐 보았다.
글자는 많지 않고 용이 뒤엉킨 그림이 대부분이었다.
잠시 양피지 책을 내려다본 그는 품속에 넣었다.
‘그래, 이것도 인연이라면…….’
온통 흑룡만 그려져 있어서 해득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인연이 아니겠는가.
검과 비급을 취한 그는 금은보화가 들어 있는 곳에 들어가서 그림이 그려진 족자만 하나 들고 나왔다.
청운이 들고 나온 물건을 본 사도맹의 장로와 간부들은 조소를 금치 못했다.
수많은 신병이기 중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검을 택하고, 무공비급은 역시 무공비급 같지도 않은 걸 택했다.
게다가 보물은 수만 냥 가치의 보석을 놔두고 그림만 달랑 하나 들고 나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허허허, 과연 학사 출신이라 다르군.”
“학문을 하는 사람 눈에는 금은보화보다 그림이 더 마음에 들 수도 있겠지요.”
“그래도 족자에 달린 수실은 제법 가치가 나가겠더군요. 그 정도면 마존령주도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외다.”
물론 그리 말하면서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자신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많아질 테니까.
하지만 청운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 족자가 뭔지 안다면 그딴 소리들을 하지 않았을 거요.’
장로들도 그림을 봤다. 확인은 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린 이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였고, 그림도 잘 그렸다고 볼 수 없었다.
다만 족자에 매달린 수실이 금실로 된 것이어서 팔면 은자 몇백 냥은 받을 수 있을 듯했다.
청운은 그들의 무지를 탓할 마음이 없었다.
장로들은 그저 그림 한쪽에 시구처럼 적힌 고대문자를 해석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족자의 천 재질이 천잠사라는 것도 알아보지 못했고.
‘하긴 보화가 있는 곳에 무공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좌우간 한동안은 무공수련에 힘을 써야 할 것 같다.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혈마를 죽이는 대가로 내상을 입었다.
하물며 천황교의 주력 고수들을 상대하려면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어쨌든 일단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저야 이 정도로 만족할 것이니, 마존령 대원들에게나 섭섭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래 사람들은 윗사람이 잘 챙겨줘야 좋아하는 법이다.
* * *
청운은 회의가 벌어진 전각에서 나온 후 백야대주를 찾아갔다.
백야대주는 신혈교 총단 후원 쪽에 있는 작은 전각에 있었다.
이번에 백야는 오십여 명이나 되는 흑야의 무리들을 제거했다.
반면 백야의 희생은 모두 일곱.
대승이라 할 수 있음에도 백야대주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섭섭하지 않으십니까?”
“끌끌끌, 섭섭하긴 하지. 사도맹 놈들까지 모조리 죽였어야 하는데 말이야.”
청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농담치고는 무서운 농담이었다.
“원하신다면 전리품을 나누어달라 하겠습니다.”
“이 늙은이더러 사도맹 아이들에게 손을 벌리란 말이냐?”
“그게 아니라…….”
“됐다. 준다 해도 그런 거 가져다 뭐 하게? 이 늙은이도 죽을 때까지 먹고살 정도의 돈은 있느니라.”
청운도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다친 아이들이 나으면 떠나야지.”
“신혈교에 있던 흑야의 무리가 최고의 정예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보셨습니까?”
그 말에 백야대주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청운은 답을 재촉하지 않고 백야대주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곧 백야대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놈들은 그저 흑야의 하수인들일 뿐이야.”
그런 하수인들이 펼친 진세에 휘말려서 일곱 명이 당했다.
백야대주는 그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흑야의 맥을 이은 진골들과 부딪친다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너무 안이했어.’
나름대로 열심히 키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흑야는 복수를 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자신들보다 더 강하게 키웠을 것이다.
본진끼리 정면으로 붙는다면 어떻게 될까?
최악의 경우, 전멸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백야 홀로 흑야를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흥! 못 할 것도 없지.”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어렵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청운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추측을 확신할 수 있었다.
못 할 것 없다고 했다.
그 말인즉, 어려울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만약 자신이 있었다면 아마…… ‘그깟 놈들, 우리 힘만으로도 충분해.’라고 했을 것이다.
“그들을 완전히 제거할 때까지 상부상조하지요.”
“우리더러 사도맹 놈들과 계속 함께하란 말이냐?”
“아닙니다. 저와 함께하자는 거지요.”
“네놈도 지금은 사도맹의 마존령주 아니냐?”
“어르신께서는, 사도맹에 있지만 양민을 돕는 사람이 나쁘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무림맹에 있지만 양민을 괴롭히는 사람이 나쁘다고 보십니까?”
“그거야…… 양민을 괴롭히는 놈이 나쁘지.”
“과거 혁련장은 정파에 속했습니다. 그런데 나쁜 짓을 많이도 했지요. 반면 흑검방은 사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밑으로 들어온 후 나쁜 일을 줄이고, 좋은 일도 제법 많이 했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제가 마존령의 령주입니다. 마존령은 제가 이끕니다. 사도맹에 속해 있지만 별도의 조직이라 할 수 있지요.”
“흥! 그래도 사도맹주의 명령을 따라야 하지.”
“이치에 맞지 않는 명령이라면 따르지 않을 겁니다.”
백야대주는 청운을 빤히 바라보았다.
청운도 피하지 않았다.
“떠나시겠다면 언제든 보내드리겠습니다.”
“물귀신 같은 놈.”
“그것도 괜찮겠군요.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사는 겁니다.”
“청청이만 아니면 당장 그놈의 입을 뭉개버렸을 거다.”
“그럼 백 소저가 싫어할 겁니다.”
“흥, 네가 좋아서가 아니라는 점만 알아라. 청청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 있는 게야.”
청운은 두 손을 맞잡고 공손하게 예를 취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큰 벽을 하나 넘었다.
이제 두 번째 벽을 넘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