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215화
백야대주는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청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부려먹으려면 기선을 제압해야 했다. 그래서 계속 튕겼는데 제법 대차게 받아친다.
게다가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강함은 천하의 젊은 놈들 중 이놈보다 강한 놈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백가장이나 백야에서도 이십 대 청년 중에 이청운 정도의 고수는 없다.
더 놀라운 것은, 무공을 배운 지 이 년밖에 안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황궁무고에서 한 달 동안이나 지냈다 해도 정상적인 성장이 아니었다.
‘그놈, 보기보다 성깔이 있군.’
백청청에게 꼼짝도 못 해서 여린 놈인 줄 알았거늘.
‘하긴 남자라면 그런 성깔도 있어야지.’
이미 청운을 돕기로 마음먹은 터였다. 더욱이 배신자인 흑야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게 자신이 백야를 이끌고 백가장을 나선 이유였다.
‘어쩌며 우리의 업보를 이 녀석이 짊어진 것인지도 모르겠군.’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좋다. 흑야 놈들은 우리가 맡지.”
백야대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청운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드디어 백야의 힘을 끌어냈다.
이들은 신비세력, 천황교에게 악몽이 될 것이다.
* * *
닷새가 지났다.
새벽녘 먼동이 떠오기 직전, 용마장의 뒷문을 통해서 이백여 명이 빠져나갔다.
마침내 마존령 대원들이 신혈교를 치기 위해 출발한 것이다.
그들은 조용히 용마장을 나서서 빠르게 북상했다.
이틀 후 청운은 마존령주 직속 무사 삼십여 명과 함께 신혈교가 자리한 산맥으로 들어섰다.
오대사령은 각기 다른 길을 택해서 목적지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이백여 인원이 여섯으로 나누어진 셈.
신혈교 측에서 자신들의 움직임을 눈치챘다 해도 여섯 곳을 모두 공격하기는 쉽지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지난 이틀 동안 감시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은밀하고 빠르게 움직인 덕에 아직 저들이 마존령의 움직임을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한 듯했다.
청운은 계곡이 한눈에 보이는 봉우리 위에 올라가서 일대를 살펴보았다.
뱀처럼 구불구불 수십 리 뻗은 계곡은 깊고도 깊었다. 불과 두 달 전에 일천이 넘는 사도맹 무사들의 피가 내처럼 흘렀던 곳이다.
아직도 남은 시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저기 놈들이 보이는군. 감시초소 같은데?”
옆에 서 있던 혈황, 아니 이제는 운청이라는 가명을 쓰는 그가 계곡 깊숙한 곳을 보며 말했다.
계곡이 잘 내려다보이는 산의 중턱에서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 자들만 해도 칠팔 명, 통나무집까지 있는 걸 보면 최소한 이십여 명은 있을 듯했다.
“놔두고 가지요.”
굳이 건드려서 자신들이 왔다는 걸 미리 알릴 필요는 없다.
어차피 뒤쪽에 있는 적의 거점을 제거하면 저들은 허공에 붕 뜬 신세가 될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놈들에게 습격을 받았던 곳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미리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신혈교 교도들의 외곽 거점 중 한 곳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원은 백여 명이라 했다.
적의 주력을 막기 위한 자들이 아니었다. 목숨을 던져서 적의 발길을 붙잡고 시간을 버는 역할을 하는 불나방 같은 자들이었다.
인원은 백여 명에 불과하지만, 은밀히 숨어서 암기를 던지고 독화살을 쏘면 일천 명의 발길도 한참 동안 붙잡을 수 있는 것이다.
사도맹의 공격을 방어하며 효과를 보더니 아예 거점 형태로 설치한 듯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하오. 그래야 안쪽으로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다음 거점까지 처리할 수 있소.”
청운의 말에 마존령 대원들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 그대는 삼조, 사조와 함께 퇴로를 차단하고 뒤쪽부터 공격하시오.”
“알았다.”
혈황이 대답하고는 삼조와 사조를 데리고 먼저 출발했다.
청운도 곧 일조, 이조와 함께 몸을 날렸다.
“습격이다!”
“놈들을 막아!”
신혈교 교도들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무기를 빼들었다.
청운이 이끄는 일조와 이조 대원 열여섯 명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신혈교도들은 목숨을 돌보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들은 일반 교도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강했다.
개중에는 혈룡단을 복용한 자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일류고수 이상인 마존령 대원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청운의 무위는 그들이 대항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잠깐 사이 삼십여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중 절반은 청운에게 당한 자들이었다.
그때쯤 뒤쪽에서 혈황과 삼조, 사조가 공격을 시작했다.
혈황으로선 영호천의 몸으로 들어간 후 처음으로 마음껏 살수를 쓰는 상황이었다.
그가 상대하기에는 조무래기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이게 얼마 만의 손맛인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친놈처럼 좌충우돌하며 신혈교도들을 무지막지하게 때려눕혔다.
뒤따라가며 신혈교도들을 상대하던 마존령 대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공격을 시작한 지 반각쯤 지나자 신혈교도 중 멀쩡히 서 있는 자들은 십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당황한 그들을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사방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들의 탈출을 예상하고 있던 마존령 대원들은 한 명도 놓치지 않고 모두 쓰러뜨렸다.
“빠져나간 놈은 없다.”
혈황이 다가와 말했다.
청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사들에게 말했다.
“부상자는 속히 상처를 손보시오.”
이번 공격에서 부상을 입은 자가 칠팔 명 정도 나왔다. 그중 중상을 입은 자는 둘, 나머지는 부상 정도가 크지 않아서 다음 공격에 참여할 수 있을 듯했다.
그 시각.
다른 길목 쪽에서도 마존령 대원들이 신혈교 교도들의 거점을 공격했다.
신속하고 은밀하게 접근한 후 이루어진 공격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신혈교도 오백여 명을 쓰러뜨리는 대가로 마존령은 열한 명을 잃었을 뿐이었다.
* * *
신혈교 총단에서 마존령의 공격을 눈치챈 것은 외곽의 일차 거점이 모두 무너진 후였다.
보고를 받은 혈마는 눈을 치켜떴다.
“뭐야? 사도맹 놈들에게 일차 관문이 무너졌다고?”
“예, 교주! 아무래도 새로 만들어졌다는 마존령 놈들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지금쯤이면 이차 관문도 놈들의 공격을…….”
“이런, 빌어먹을!”
버럭 소리친 혈마는 이를 갈았다.
설마 소수에 불과한 마존령이 직접적으로 공격해올 줄이야!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당장 나가서 놈들을 때려잡아라! 장로들도 모두 나가!”
악을 쓰듯 명령을 내린 혈마는 상석을 바라보았다.
혁련휘가 앉아서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너무 걱정 말게. 모두 합해야 이백 명밖에 안 되는데, 그깟 놈들로 뭘 할 수 있겠나?”
혈마의 말에 혁련휘가 눈을 치켜들었다.
“교주가 말한 그깟 놈들에게 오백 명이 넘게 당했소.”
“외곽에 있는 애들 중 진성 교도는 많지 않네. 놈들이 외곽만 생각하고 안으로 들어온다면 이곳이 그놈들에게는 지옥이 될 거네.”
“청운이란 놈은 절대 얕봐서는 안 되는 놈이오.”
“놈은 내가 목을 딸 거네. 제 놈이 강해봐야 얼마나 강하겠나?”
“그놈 목은 내 것이오. 교주는 용천관의 목이나 책임지시오.”
“허허허, 알겠네. 그리하지.”
혈마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속은 무척 불쾌했다.
새파란 놈이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다니.
‘흥! 건방진 놈.’
대놓고 불만을 표출할 순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건방진 콧대를 작신 부러뜨리고 말리라.
* * *
용천관은 멀리 보이는 계곡을 보며 사뇌에게 물었다.
“마존령주는 계획대로 진행하고 있겠지?”
“예, 놈들의 거점을 몇 군데 무너뜨렸다 합니다. 그리고… 백가장에서 온 자들도 움직였습니다.”
“그래?”
짧게 대답한 용천관의 눈썹이 씰룩였다.
백가장에서 끼어든 것은 비록 일부라 해도 여전히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들이 상대하는 만큼 사도맹이 상대할 적이 줄어든다.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용천관은 한 손을 들어 올리며 전방을 가리켰다.
“우리도 시작하지. 먼저 사령대를 투입해서 쓰레기들을 정리해.”
“존명!”
잠시 후, 회색 피풍의를 두른 삼백여 명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 * *
십 리 정도 떨어진 두 번째 관문의 거점에 있는 신혈교도의 숫자 역시 첫 번째 관문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무력은 첫 번째 관문보다 더 강했다.
혁무천과 혈황이 쐐기의 꼭지처럼 처음부터 앞장서서 적진을 유린했다.
그야말로 광풍 두 줄기가 몰아치는 듯했다.
일검 일수에 서너 명씩 나가 떨어졌다.
마존령 대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며 적을 몰아붙였다.
갑작스런 마존령의 공격에 신혈교도들은 우왕좌왕했다.
공포에 질린 비명과 악다구니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소리도 점차 잦아들었다. 대항하는 자들의 숫자도 줄어들었다.
“살고자 하는 자는 납작 엎드려라!”
청운이 차갑게 소리쳤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자들 중 십여 명이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나 이십여 명은 악착같이 대항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피가 뿜어지는 상태에서도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맞서 싸우다가 심장이 멈춘 후에야 쓰러졌다.
싸움이 끝나자, 청운은 시신이 널려 있는 분지를 돌아다보았다. 한 시진도 안 되어서 자신의 손으로 오십여 명을 죽였다.
죽은 자들 중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살던 자들도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저들의 가족에게 자신은 철천지원수라 할 수 있겠지.
과연 자신에게 저들을 죽일 자격이 있을까?
저들이 나에게 무엇을 잘못해서.
이마를 좁힌 청운은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다.’
계획대로 이차 관문까지 무너뜨렸다. 지금쯤 다른 곳도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피해가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
“모두 열세 명을 생포했습니다, 령주.”
마존령주 직속 무사대 일조 조장 강욱이 다가와 보고했다.
“단전을 폐하고 묶어 놓으시오. 신혈교와의 싸움이 끝난 후 풀어줄 거요.”
“예, 령주.”
“지금쯤은 놈들도 우리 공격을 알아차렸을 거다.”
혈황이 다가와서 말했다.
청운도 짐작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거점을 공격한 후 걸음을 멈추기로 했다.
여기까지가 이번 계획 중 일 단계다.
“오대사령이 모이면 본진과 함께 삼차 거점을 칠 겁니다. 그동안 운기하며 공력을 회복하라고 하세요.”
“그냥 우리만 가도 될 것 같은데…….”
“놈들도 고수들을 내보냈을 겁니다. 저나 혈…… 운청은 괜찮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막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안 봐도 될 피해를 볼 필요는 없습니다.”
삼차 거점은 모두 세 곳이다.
그곳은 일이차 거점과 달리 인원이 삼백 명이 넘는다고 했다.
고수들도 많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놈들의 총단에서 고수를 파견했다면 마존령이 감당할 수 있는 곳은 한 곳 정도.
그래서 둘은 사도맹 본진이 맡고, 마존령이 한 곳을 맡기로 했다.
그게 이단계 계획이다.
그리고 이번 싸움의 진정한 시작이다.
* * *
사도맹 본진은 사령대를 필두로 해서 뒤에 남은 감시초소와 신혈교의 잔당들을 청소하듯 쓸어내며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갔다.
함정을 파고 암습할 자들이 대부분 당한 터라 계곡은 무주공산의 상태였다.
그즈음, 청운이 있는 곳으로 오대사령이 모여들었다.
백오십여 명 중 사십여 명이 보이지 않았다.
그중 반은 죽고 반은 중상을 입어서 뒤로 처진 상태였다.
청운은 모여든 마존령 무사들을 둘러보았다.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였다.
“예정대로 우리는 이곳을 칠 거요.”
청운이 바닥에 그림을 간단하게 그리고 한 곳을 검으로 찍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자들보다 훨씬 강한 자들이 많을 것이니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할 거요.”
이미 수백 명을 베며 피맛을 본 오대사령과 조장들의 눈빛이 살기로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