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213화
백청청이 조르르 달려가서는 백야대주의 팔짱을 끼며 콧소리를 냈다.
“할아버지잉.”
“허허허, 알았다 이 녀석아. 내가 설마 저 녀석 엉덩이라도 걷어찰 줄 알았느냐?”
청운은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백청청의 태도로 봐서 백가장 사람임은 분명했다.
그런데 혈황은 기분이 좋지 않은지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늙은이지?’
하지만 곧 백야대주를 자세히 보고는 흠칫했다.
‘강하다.’
힘 하나 없게 생긴 노인의 몸에 담긴 거대한 잠력이 느껴졌다.
자신조차 지금 실력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고수.
‘이거 폐관이라도 해야지 원…….’
자존심이 상한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청운에게 밀리는 것도 억울한데 웬 늙다리가 또 나타났다.
‘혹시… 저 늙은이가 백야대주?’
백청청을 따라온 늙은이. 백가장 장주인 백철군보다 더 강하게 느껴지는 고수.
그런 사람이 백야대주 말고 또 있을까?
상대의 정체를 짐작한 혈황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상한 자존심이 조금이나마 회복된 것이다.
상대가 백야대주라면 그만한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다.
* * *
청운이 백가장과 긴밀한 관계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용천관과 사도맹 장로들도 고민에 빠졌다.
백가장이 일반 백도 문파만 되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지 모른다. 그런데 백가장은 명문 정파로 구대문파보다 더 피곤한 상대였다.
형식적인 명예직이지만 사도맹의 이인자인 마존령주의 처가가 백도라니. 그것도 백가장이라니.
골치가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청운을 싫어하던 사람들은 청운이 마존령주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며 은근슬쩍 목소리를 높였다.
의외라면 부맹주 맹천기가 조용하다는 것이다.
그는 청운의 반대파가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았다.
결국 그 문제는 용천관이 해결하기로 하고 청운을 불러서 단둘이 만났다.
“어떻게 할 건가? 장로들 중에는 백가장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먼저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제가 비록 백청청 소저를 잘 알긴 합니다만, 아직 어떤 관계도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백가장이 자네 처가라고 하던데?”
“혼인을 해야 처가지요. 백가장주의 외동딸이 혼인을 했다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그건 그렇군.”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저도 백 소저를 좋아합니다. 어쩌면 혼인을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직은 그저 좋아하는 남녀 관계일 뿐입니다.”
“흐음…….”
용천관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도 청운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궁금한 것도 있었다.
“그럼 백가장과는 어떻게 정리할 건가?”
“천황교를 상대할 동안 그들의 힘을 이용할 수만 있다면 사도맹에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장로들이 받아들일지 모르겠군.”
“이미 무림맹과도 연합을 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문제네. 결국 그들이 음흉한 짓을 하는 바람에 피해가 더 커졌지 않은가? 백가장도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네.”
“백가장 쪽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그들은 외부에 머물면서 일이 있을 때만 마존령과 함께 움직일 겁니다. 그럼 사도맹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사도맹에 좋으면 좋았지 나쁠 일이 없지요. 그만큼 상대할 적이 줄어들 테니까요.”
“흠,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그리고 천황교를 물리친 이후에는 다시 제 갈 길로 가면 됩니다.”
용천관은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청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네는 어떻게 할 건가? 싸움이 끝나면 떠날 건가?”
마존령주는 사도맹의 이인자다.
비록 한시적인 자리이긴 하지만,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사도맹의 맹주 자리도 노릴 수 있다.
이미 많은 사도맹의 간부와 고수들이 그를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청운은 맹주 자리에 조금도 욕심이 없었다.
“용 형이 맹주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드리지요. 그런 다음 저도 제 갈 길을 가겠습니다.”
용천관의 얼굴이 그제야 펴졌다.
자신이 염려하는 부분을 청운이 정확히 꿰뚫어봤다.
용천관은 용화청이 성장해서 맹주의 위에 오르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직은 벽이 많았다. 그중 한 사람이 맹천기였고.
그런데 청운이 도와준다면 한결 짐이 덜어진다.
청운의 말대로, 정말 손자가 맹주 위에 오를 만큼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자네가 그렇게만 해준다면, 내 모든 걸 다 내걸고 자네의 편을 들겠네.”
* * *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청운과 백청청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과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백청청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가가, 또요. 다른 건 없어요?”
“다른 거?”
“아이, 왜 있잖아요.”
청운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몸을 붙여오는 백청청을 보고 문득 그녀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입으로 말하자니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젠 말을 해야겠지.’
같이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떨어져 있다 보니 그녀가 그리웠다. 따로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도 없다. 어쩌면 첫 만남부터 그녀가 가슴속에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청운은 백청청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이 이청운, 가진 거라고는 이 몸뚱이뿐이라오. 부족한 게 많지만 소저만 좋다면 백가장에 찾아갈 생각이오.”
“흑.”
백청청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토록 기다리던 청운의 답을 받았다.
아직 난관이 많았다. 백가장주인 백철군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야 하고, 지금도 밖에서 청운을 만나겠다고 벼르고 있는 백야대주도 있었다.
“가가, 소녀는 오래전부터 가가뿐이었사옵니다.”
“내 삶은 아직 가야 할 가시밭길이 남았소. 그래도 좋다면 그대와 함께하고 싶소.”
“소녀 지옥길이라 할지라도 가가와 함께 하겠사옵니다.”
와락.
청운은 백청청을 끌어안았다.
철이 들기도 전부터 혼자라는 외로움 속에서 자라야 했다. 모진 구박과 천대를 받으며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학문을 닦는 길뿐이었다. 곁에 백청청이 있다면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 문제가 있긴 하겠지만, 그 정도야…….
한편, 청운과 백청청이 사랑을 속삭일 때 백야대주는 혈황과 함께 있었다.
백야대주가 콕 찍어서 수발할 사람으로 그를 지명한 것이다.
혈황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 기회에 백야대주가 얼마나 강한지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혈황을 바라보는 백야대주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거 참, 괴이한 놈이로구나.”
‘놈?’
혈황은 발끈했지만 표를 내지는 않았다.
“무엇이 말입니까?”
“그릇에 비해서 분에 넘치는 기운이 담겨 있다니. 무슨 기연이라도 얻었느냐? 아니구나, 기연이 아니라 악연일지도 모르겠구나.”
혈황은 가슴이 뜨끔했다.
설마 저 늙은이가 눈치챈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 없다. 어느 누가 영호천 몸속에 자신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겠는가.
“기연이든 악연이든, 저에게 좋은 거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렇지. 그런데 네놈은 원래부터 사도맹 사람이었느냐?”
또 놈!
혈황은 이마에 살짝 열이 올랐지만 꾹 참았다.
“아닙니다. 청운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청운이란 놈과는 무슨 사이냐?”
“뭐 운명처럼 엮인 사이라고 하면 아실지 모르겠군요.”
백야대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혈황을 바라보았다.
처음이었다. 저런 놈은.
생긴 건 이제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그런데 행동이나 느낌은 오십대 중노인 같았다.
게다가 몸에 잠들어 있는 기운은 능히 화경에 올라 있었다.
그 기운이 마의 기운이어서 문제이긴 한데, 이곳이 사도맹인 것을 생각하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참으로 괴이한 놈이로다. 어디 한번…….’
혈황을 바라보던 백야대주는 찻잔으로 손을 뻗으며 슬쩍 소매를 저었다.
혈황은 허공에 떠 있는 기분이 느껴지자 안색이 급변했다.
단순히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만이 아니었다. 마치 거미줄에 갇혀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태로 허공에 매달린 것만 같았다.
‘이 늙은이가! 오냐, 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지!’
백야대주의 뜻을 눈치챈 혈황도 가만있지 않았다. 어차피 백야대주라는 늙은이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 위해서 이 자리에 있는 그였다.
그는 손을 올려서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이 이지러지면서 탁자 위의 찻잔이 허공에 둥둥 떴다.
그렇게 열을 셀 시간이 지날 즈음, 찻잔이 찻물을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고 서서히 혈황에게 흘러갔다.
혈황의 눈매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빌어먹을! 지금의 공력만으로는 상대하기가 힘들군.’
자신의 공력을 모두 되찾았으면 저 늙은이의 기를 단숨에 꺾을 수 있을 텐데!
그때 백야대주가 괴이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다시 저었다.
천하의 혈황을 곤욕스럽게 만들었던 기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혈황도 자신의 기운을 급히 회수했다.
그는 기운을 회수하는 것조차 백야대주에게 밀렸다는 걸 알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 기운을 모두 되찾기만 하면, 반드시 늙은이부터 창피를 주고 말리라.’
그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런데 백야대주가 말했다.
“어린놈이 제법이구나. 그 정도면 청운이란 놈에게 제법 도움이 되겠어.”
어린놈이라니!
혈황은 말도 못하고 속만 끓였다.
‘씨바… 내 나이가 몇인데….’
* * *
무림이 혼란스러울 때 황실에 폭풍이 지나갔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이들이 뇌옥에 갇혔고, 황제 역시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그날도 황제는 제국의 심장인 자금성 건청궁 태사의에 앉아 있었지만, 통통하던 그가 불과 한두 달 사이에 볼이 쏙 들어갈 만큼 야위어 있었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후회가 가득했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강하게 했다면 이런 상황까지는 몰리지 않았을 것이다.
피 보는 것이 두려워 반심이 있다는 걸 알고도 놔두었던 게 실수였다.
선황께서 왜 대신들을 강하게 다스렸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참으로 어리석었도다. 평온이라는 것은 말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거늘. 힘이 없으면 한순간에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이 세상의 이치거늘.’
그때였다.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귓가에 한 줄기 전음이 들려왔다.
-폐하, 소인 정 소감이옵니다.
흠칫.
황제의 두 눈이 살짝 떠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에 곁에 시립해 있던 내시가 급히 입을 열었다.
“폐하, 어디 불편하시온지요?”
“아, 아니다. 요즘 밤잠을 잘 자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아, 시원한 물이나 좀 갖다 주려무나.”
황제를 감시하기 위해서 붙여둔 내시는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상체를 숙이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허수아비 주제에 귀찮게 하는군.’
이미 황제를 폐위해야 한다는 말까지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는 상황이다.
눈앞의 황제는 더 이상 모셔야 할 인물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처럼 폐인이 된 그를 감시하며 외부의 접촉을 막으면 그만이었다.
그렇다고 황제의 명령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벌을 받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예이, 알겠사옵니다.”
황제는 내시가 물을 가져오라고 명을 내리기 위해 멀어지는 걸 보고 다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내시 역시 힐끔 그 모습을 바라본 후 황제에게서 눈을 떼었다.
예의 전음이 다시 황제에게 들렸다.
-폐하, 그저 듣기만 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