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212화
용마장원 입구에 일노일녀가 나타났다.
발랄한 기운을 풍기며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인과 선풍도골의 노인. 무림맹을 떠나 청운을 만나기 위해서 달려온 백청청과 백야대주였다.
“여기 이청운 공자가 계시다고 해서 왔는데 뵐 수 있을까요?”
정문을 지키는 경비무사에게 백청청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경비무사는 백청청과 백야대주를 번갈아보았다.
가냘프게 보이는 여인과 갈 때가 다된 것 같은 노인이 마존령주를 찾아오다니.
평소였다면 거들먹거리며 농담이라도 한번 던져봤겠지만 왠지 범상치 않게 느껴져서 조심했다.
“그분과는 어떤 관계요?”
“곧 부인이 될 사람이에요.”
백청청은 ‘부인’을 크게 말하고 다른 말은 작게 말했다.
“허허허, 난 이 아이의 할애비지.”
경비무사는 오해했다.
부인? 부인의 할아버지?
뭔가 좀 이상했다. 마존령주는 총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럼 혹시 총각이라는 말이 거짓말?
아니면 앞에 있는 여자가 거짓말을 하는 건가?
‘아니야, 총각이라는 말이 거짓말일 가능성이 더 커. 남자새끼들 중에 총각 행세를 하면서 여자 건드리는 놈이 어디 한둘인가?’
게다가 여자를 보니 순진하게 생겼지 않은가. 얼굴도 진짜 예쁘고.
저런 여자를 두고 총각 행세를 하다니.
‘마존령주도 보기보다 엉큼하군.’
어쨌든 진짜 부인이라면 이렇게 세워둘 수는 없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경비무사는 청운의 가족이라는 소리에 깍듯이 예의를 갖추고 둘을 안으로 들이려 했다.
그런데 한 소리 날카롭고 끈적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데 안으로 들이는 것이냐?”
우람한 체구를 지닌 사내였다. 얼마나 큰지 다른 이들보다 머리가 하나 더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잔혹마도 사마열.
육 척에 달하는 거대한 도를 휘두르는 사파의 대표적인 도객 중 한 명으로 잔살문의 장로이기도 했다.
경비무사는 그의 성격을 잘 알기에 급히 예부터 취했다.
“마존령주님의 가족이라고 합니다.”
“흥, 마존령주의 가족?”
사도맹의 고수들이 모두 이청운을 반긴 건 아니었다.
개중에는 이청운이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것을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나이 먹은 고수 중 새파란 애송이가 자신들의 머리 위에 있는 걸 좋아할 사람이 몇이나 되랴.
사마열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경비무사의 말을 무시한 사마열은 백청청 앞으로 나섰다.
구 척에 달하는 사마열이 앞을 막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백청청은 고개를 들어 사마열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은 싸늘했다. 백청청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혹, 문제가 있나요?”
“있지. 그것도 아주 큰 문제가.”
싸늘한 사마열의 말에 백청청은 의아한 듯 물었다.
“무엇이죠?”
사마열의 과한 반응에 백청청은 의문이 들었다.
자신은 그저 청운의 가족이라고 했을 뿐이다. 백가장 사람이라고 하지도 않았다. 사도맹은 백가장을 싫어할지 모르니까.
더욱이 눈앞의 중년인은 처음 보는 인물인데 왜 자신에게 저런 태도란 말인가.
마도사파의 사람들은 다 저런가?
그런데 사마열이 백청청 뒤에 서 있는 백야대주를 보았다.
“여긴 마존령주의 가족이라고 해서 무작정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더구나 그대들이 마존령주의 가족이라는 걸 어떻게 믿지?”
“이 공자께 가서 물어보면 되잖아요.”
“물어보기 전에 먼저 자세한 신상명세를 말해봐라.”
“저는 백……청아에요.”
백청청은 이름을 살짝 바꿔서 말했다.
세상에 백씨 성을 쓰는 사람이 백만 명은 된다. 이름만 듣고 강서백가로 의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마열은 고지식한 면이 있었다. 게다가 트집을 잡으려고 작정하고 있던 터였다.
“오호라! 혹시 강서백가 사람 아니냐?”
백청청이 백가 사람이라는 걸 알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백청청이 백씨인 것을 알고 무작정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을 뿐.
그런데 백청청은 그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줄 알고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라고 거짓말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맞아요. 그럼 어쩔 건데요?”
억지로 트집 잡으려던 게 사실이 되자 오히려 사마열이 당황해 했다.
“뭐? 정말 백가 사람이란 말이냐?”
그제야 백청청은 자신이 넘겨짚은 말에 속았다는 걸 알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알고 말한 거 아니었나요? 확실히 사도맹 분들은 음흉한 면이 있군요.”
“뭐라? 이 계집이……!”
그때 백야대주가 한숨을 쉬며 나섰다. 지금 일이 커져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에휴, 그러고 보니 한 십여 년 전에 덩치만 믿고 강서성에 와서 거들먹거리던 녀석이 있었지.”
사마열이 움찔하며 백야대주를 바라보았다. 왠지 범상치 않아 보이는 노인이었다.
하긴 백가장의 사람 아닌가.
“당신이 그걸 어떻게……?”
“그 녀석 덩치가 너처럼 컸다고 들었지, 칼도 그만큼 크고. 당시에 아이들이 알아듣게 잘 타일러서 돌려보냈다고 하던데, 혹 너 아니었느냐?”
백야대주의 말에 사마열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십여 년 전 강서성의 성도 남창에 들렀을 때, 객잔에서 별거 아닌 시비가 붙었다. 그런데 하필 그 시비의 상대가 백가장 사람이었다.
당시 그는 백가장이 유명무실할 뿐이라 생각했기에 힘으로 뭉개버리려 했다.
하지만 거꾸로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두들겨 맞았다.
얼마나 맞았는지, 아직도 새벽만 되면 그때 맞은 부위가 쑤시고 아파서 잠을 깬다.
“이, 씨부럴…….”
사마열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말을 들으니 날씨가 좋은데도 그때 맞은 부위가 아파온다.
이를 악다문 그는 등 뒤의 커다란 도를 뽑았다.
“늙은이! 어차피 때가 된 거 같으니 이참에 염라대왕이나 만나러 가라!”
팟!
사마열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빠른 신법을 펼치며 백야대주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상대가 백가장 사람이라면 늙은이 젊은이 가릴 것 없이 전력을 다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백야대주는 별 관심 없는지 그저 사마열을 무심한 눈으로 볼 뿐이었다.
그때였다.
덥석!
사마열의 거대한 도가 커다란 손에 잡힌 채 허공에 멈췄다.
사마열은 자신의 칼을 잡은 사람이 백청아라는 어린 계집임을 알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오냐! 너도 죽여주마!”
슈슈슈슈슉!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마열은 도를 비틀어서 빼낸 후 쾌검처럼 빠르게 휘저었다.
백청청은 자신의 장력을 흩어버리는 사마열을 다시 봤다.
‘제법인데?’
백가장 지존신공을 와해시키다니. 허투루 상대할 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사마열의 칼질은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칼이 계속 허공만 난도질하자 사마열이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 연놈을 치지 않고!”
소란을 듣고 달려온 사도맹 무인들이 주변에 모여 구경하고 있었다.
힘없는 노인과 어린 여자를 상대로 힘쓰는 일이 달갑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위에서 시키는 것을.
그들이 슬금슬금 백청청과 백야대주를 포위하자, 경비무사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분들은 마존령주의 가족입니다.”
그 말에 사도맹 무사 중 상당수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뒤로 물러났다.
“뭐? 마존령주님의 가족?”
“근데 왜 사마 장로님과 싸우고 있는 거지?”
백청청이 그 모습을 보고 사마열에게 말했다.
“단둘이 결판내요. 사도맹은 힘센 사람이 대장이라고 하던데, 저를 이길 자신도 없어요?”
사마열도 그 말에는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주위에 둘러서 있던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백청청의 먼저 대결을 청했다.
사도맹에서 대결을 거부한다는 것은 비겁한 놈이나 하는 행동. 이제 승부로 결정을 보면 될 일이다.
설마 잔혹마도 사마열이 어린 여자에게 겁을 먹고 대결 신청을 거부할까.
으드득, 이를 간 사마열이 칼을 다시 들었다.
“좋아, 네년에게 세상의 무서움을 알려주마!”
백청청은 사마열의 욕설에 눈을 치켜떴다.
“당신에게 하늘밖에 하늘이 있음을 보여주죠!”
청운을 찾아왔다는 것도 잊었다.
어려서부터 사파는 일단 두들겨 패라고 교육받은 그녀다. 그 교육을 시킨 장본인이 뒤에서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 백야대주고.
“청아야, 손을 쓸 때는 확실하게 써야 하는 법이니라.”
백야대주도 어린 손녀에게 욕하는 사마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이청운을 만나러 온 것만 아니라면 저놈은 지금쯤 땅바닥에 처박혀서 흙 맛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백야의 무인들은 한숨이 나왔다.
-아가씨께서는 어쩌자고.
-대주는 뭐가 좋다고 저리 흐뭇해하시는 거냐? 말릴 생각도 없으시네.
-하루 이틀 일인가? 여차하면 치고 들어갈 것이니 준비들 해.
한편, 혈황과 담소를 나누던 청운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이 신경 쓰였다. 처음에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곳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사도맹이다. 여차하면 같은 편끼리도 사생결단을 내겠다고 싸움을 벌이는 곳.
그런데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눈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쾅! 콰콰쾅!
뿌연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모습과 함께 하늘 높이 솟구친 커다란 손 그림자가 보였다.
“헉! 저것은!”
청운은 헛바람을 남기며 자리를 박차고 사라졌다. 그 모습에 혈황이 혀를 찼다.
“쯧쯧, 그 녀석 등장부터 화끈하군. 어디 지참금은 가져왔는지 볼까?”
혈황 역시 소란이 인 곳으로 몸을 날렸다.
밖으로 나온 혈황은 자신의 생각대로 펼쳐진 상황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백청청이 사마열과 한판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체구가 몇 배나 되는 사마열이 이마에서 땀을 흘리며 연신 물러서고 있었다.
“확실히 대단한 아이야.”
청운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몸을 날렸다.
“소저! 잠시 기다리시오.”
청운의 음성을 들었는지 무시무시하게 사마열을 몰아붙이던 백청청의 얼굴이 삽시간에 순한 양처럼 변했다.
뒤로 훌쩍 물러선 그녀는 청운 품으로 껑충 뛰어들었다.
“가가!”
청운은 그녀의 갑작스런 행동에 당황했지만 밀어낼 수도 없었다.
속으로 한숨을 쉰 그는 일단 백청청부터 달랬다.
“괜찮은 것이오? 어디 상한 곳은 없소?”
“가가, 소녀가 가가의 가족이라고 했는데도 저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막 칼을 휘둘러서 몰아붙였어요.”
청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몰아붙인 건 그녀였다. 사마열은 식은땀까지 흘리며 피하기 바빴고.
어쨌든 가족이라고 했는데도 칼을 뽑았다는 건 자신에 대한 정면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이 기회에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청운의 천천히 고개가 돌아갔다.
그의 눈빛이 얼마나 살벌하고 차가운지 둘러서 있던 사도맹 무인들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크흠, 마존령주,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소.”
“령주, 오해라지 않소. 어어, 그 용은 왜 꺼내시는 것이오?”
청운이 검을 뽑자, 그의 몸 주위로 묵황색 용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쿵!
우우우웅!
거대한 내공으로 만들어진 묵황색 용이 점점 선명해졌다.
그때 한쪽에서 담담하면서도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쯤 했으면 됐다. 네가 이청운이라는 놈팽이냐?”
청운은 흠칫 몸을 떨었다. 등줄기로 차가운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서서히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선풍도골의 노인이 보였다.
‘예사로운 분이 아니다.’
주변과 완벽하게 동화된 모습.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청운은 노인에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예, 제가 이청운입니다.”
“흠. 허우대는 멀쩡하군.”
백야대주는 상품을 품평하듯이 청운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