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208화
청운과 혈황이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각양각색의 눈빛이 집중되었다.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고, 적대적인 눈길을 보내는 이도 적지 않았다.
중앙에 앉아 있던 용천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청운을 반겼다.
“어서 오게. 내 살아 있을 줄 알았지.”
그는 변함없이 청운을 반겼다. 청운과 안면이 있는 몇몇 인사들 역시 청운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미 사도맹도 청운이 파직당했다는 것, 무림맹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정파에 몸담고 있었던 사람 아닌가. 때문에 청운이 사도맹에 온 목적을 수상하게 여기는 자도 없지 않았다.
그렇게 십여 명과 인사를 나누었을 때, 위맹하게 생긴 오십대 중노인이 청운을 보며 말했다.
“나는 맹천기라 한다. 너에 대한 말은 많이 들었지. 젊은 놈이 대단한 무공을 지녔다고 하더군.”
“과찬의 말씀입니다.”
청운은 포권을 취하며 짧게 겸양의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마군 맹천기.
사도맹의 부맹주인 그는 성격이 괄괄하고 폭급해서 마도사파에서 상대하기 가장 어려운 인물 중 하나였다.
또한 무공도 용천관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강해서 차대 맹주는 그가 될 거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여긴 어쩐 일로 왔느냐?”
“사도맹에 힘을 보태기 위해 왔습니다. 신혈교를 공격하게 되면 제가 선봉에 서지요.”
“선봉에 서겠다?”
의외라 생각한 듯 맹천기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청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면 용천관은 고개를 젖히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역시 자네답군.”
신혈교와의 싸움 이후 사도맹 고수들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문제는 사기만 떨어진 것이 아니라 패기마저 약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청운이 신혈교를 조금도 겁내지 않고 선봉에 서겠다고 하자 오랜만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부맹주, 어떤가? 아주 대단한 친구 아닌가?”
“글쎄올시다.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지 닥쳐봐야 알겠지요.”
맹천기는 여전히 이청운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사뇌가 청운에게 말을 건넸다.
“진무사, 아니 이제는 이 소협이라고 불러야겠군.”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
“알겠네. 그럼 이 소협이라 부르지. 이 소협도 알고 있겠지만 현재 사도맹은 큰 타격을 입은 상태네. 비록 총단에서 고수들이 오긴 했지만 당장 저들을 치긴 쉬운 일이 아니네.”
“제가 왜 그걸 모르겠습니까? 저 역시 쉽지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당장 서두를 마음도 없고요.”
“그리 생각한다니 다행이군.”
“허나 기회가 오면 망설이지 않고 공격해야 놈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그때 제가 선봉에 서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만 묻겠네. 자넨 무림맹 사람인가, 아니면 사도맹 사람인가?”
전각 내의 사도맹 고수들의 시선이 모두 이청운의 입으로 향했다.
청운이 말했다.
“제가 무림맹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군사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모른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럼 사도맹의 정보력이 형편없다는 걸 드러내는 것밖에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알고 있네.”
“그럼 제가 무림맹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아시겠군요.”
“험, 그거야…….”
“제가 황궁에서 쫓기는 신세라는 것이 부담되십니까?”
“누가 부담된다고 했나?”
사뇌는 이청운의 말에 끌려들어 가는 것처럼 느껴지자 반전을 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청운이 한발 앞서서 말했다.
“저도 사도맹이 황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압니다. 그래서 온 것이지요.”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하면 사도맹이 황궁을 두려워한다는 걸 시인하는 셈이 된다.
사뇌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그쯤에서 말을 돌렸다.
“자네가 정녕 그리 생각한다면 우리 사도맹의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지. 맹주님께서도 거부하지 않으실 거네.”
그 말에 용천관이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지! 자네가 우리 사도맹에 들어온다면 그에 맞는 지위를 내릴 거네.”
청운도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취해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맹주.”
“자네는 누구보다도 신비세력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네. 그래서 묻는 거네만, 신혈교와 싸울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본 것이 있는가?”
“좋은 방법이 있으면 받아주실 겁니까?”
“받아들이지 못할 건 또 뭐 있는가?”
맹주인 용천관이 그리 말하자, 사뇌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맹천기가 토를 달았다.
“맹주. 우리 사도맹에 군사가 한두 사람도 아닌데, 어찌 젊은 애의 말을 듣는단 말씀입니까?”
“부맹주, 의견이란 많이 들어봐야 좋은 거라네. 자네도 저 친구가 삼원을 했다는 말을 들었겠지?”
“그거야 듣긴 했습니다만, 황궁의 관리 나부랭이가 어찌 무림의 생태를 알겠습니까?”
맹천기는 이청운을 어린애 취급하듯 대했다.
소문은 과장이 많은 법이었다. 이청운이란 애송이가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는가.
용천관은 굳이 그의 실수를 지적하지 않았다.
찍어서 먹어봐야 맛을 안다면 찍어먹게 만들어주면 되었다.
“자네도 저 친구와 함께 있다 보면 곧 알게 될 거네.”
맹천기는 기분이 상했지만 용천관에게 그 이상 강하게는 말할 수 없었다.
‘흥! 골골하게 생긴 놈이 얼마나 강하겠어? 맹주도 과거의 맹주가 아니군. 저딴 놈을 옹호하다니.’
그때 사뇌가 끼어들어서 맹천기를 곤혹스러움에서 구해주었다.
“어쨌든 한 사람이 아쉬운 때에 이 소협이 본 맹 사람이 된다면 나쁠 것도 없는 일이지요.”
“내 생각도 군사와 같네.”
용천관이 흡족해하며 말했다.
그가 대해본 이청운은 괴물이었다.
삼원진사를 할 정도로 머리가 뛰어난 데다 무공은 자신조차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만큼 강했다.
가히 사뇌급의 두뇌를 가진 일당 천의 고수가 사도맹에 들어온 것이다.
“이제 신혈교를 상대할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보게.”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복잡하지 않다? 그거 마음에 드는군. 나도 복잡한 건 딱 질색이네.”
용천관이 손까지 저으며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말했다.
청운은 담담하게 웃고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놈들도 이번 싸움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정면 승부보다 소수의 고수로 상대에게 혼란을 주는 전술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소수의 고수로 적진을 유린한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적이 혼란을 겪게 되면 반드시 빈틈이 생길 겁니다. 그때 전력을 집중해서 놈들을 치는 것이지요.”
그때 맹천기가 다시 끼어들었다.
“우리가 사혈교를 칠 때 무림맹이 우리 뒤통수를 치면 큰일 아니냐?”
“무림맹도 지금은 사도맹의 뒤통수를 칠 겨를이 없습니다. 무림맹 총단이 무너졌으니 힘을 더 모으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용천관이 청운의 말을 듣고 사뇌에게 물었다.
“흐음, 군사 생각은 어떤가?”
“일리 있는 계획입니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신혈교를 치려다가 결국 본 맹의 피해만 커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무림맹은 저번처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만 볼지도 모르니까요.”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사도맹의 무림맹에 대한 신뢰도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청운도 그에 대해서는 변명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 그랬으니까.
“어쨌든 무림맹은 뒷짐 지고 있는데 우리만 오지랖 넓게 그들과 싸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솔직히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마도사파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뇌가 마지막 말에서 핵심을 찔렀다.
용천관도 그에 대해서는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청운은 ‘같은 마도사파’란 말속에 함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신혈교 뒤에 도사리고 있는 신비세력, 천황교는 이미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실 역시 놈들 손아귀에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놈들이 누구를 제일 먼저 처리하고 싶어 할까요?”
용천관과 사뇌, 맹천기는 각기 다른 표정을 지은 채 청운을 바라보았다.
“무림맹일까요, 아니면 사도맹일까요?”
용천관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무림맹을 먼저 치지 않을까? 어쨌든 놈들도 마도 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무림맹을 치면 강호무림의 정파는 물론 백성들의 신뢰도 잃을 수 있습니다. 황궁을 장악해서 나라를 차지하려는 놈들이 그런 모험을 할 거라 보십니까?”
“그럼 자네는… 놈들이 무림맹을 놔두고 우리부터 칠 거라 보는가?”
“저라면 그리할 겁니다. 그러면 무림맹과 백성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잃는 것과 얻는 것.
당연히 놈들은 얻는 것을 더 원할 것이다.
그런데 맹천기가 청운을 내려다보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너무 지나친 비약 아니냐?”
“무엇이 말입니까?”
“관과 무림은 별개다. 더군다나 황실이 놈들의 손에 넘어갔다니.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
“현 상황으로 봐서는 십중팔구 사실일 겁니다.”
“그럼 대장군과 고관대작 중 상당수가 천황교 첩자라도 된단 말이냐?”
“그럴지도 모르지요. 이미 황제께서는 고립된 상태입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하늘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흥! 하늘이 바뀌어? 어디 천지개벽이 한두 번이었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랑 무슨 상관인가?”
“황궁이 그들 손에 넘어가면, 무림도 끝장날 겁니다. 그들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요.”
“흥! 나는 믿을 수 없다.”
청운은 맹천기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자신만만함과 오만함이 뒤섞인 표정.
맹주인 용천관이 앞에 있는데도 조금도 거리낌 없는 태도였다.
청운은 맹천기의 반발을 꺾지 못하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힘들다는 걸 알고 방법을 바꾸었다.
“천황교를 상대하는 게 두렵습니까?”
그 말에 맹천기가 펄쩍 뛰었다.
“뭐야?!”
“그게 아니라면 왜 천황교와 싸우는 걸 망설이시는 겁니까?”
“건방진 놈이 못 하는 말이 없구나!”
“건방지다? 하하하하하!”
청운이 갑자기 대소를 터트리자, 맹천기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내 말이 그리도 우습더냐?!”
웃음을 뚝 멈춘 청운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사도맹이 패도를 최우선으로 하는 줄 알았습니다. 쉽게 말해, 강한 놈을 최고로 쳐주는 곳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나이가 우선순위인 곳이었나 봅니다.”
“무슨 개소리냐?”
“그게 아니라면 저에게 건방지다는 소리를 하시면 안 되지요.”
“뭐라?”
청운은 얼굴이 벌게진 맹천기를 놔둔 채 용천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맹주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맹주님께서 사도맹이 나이를 우선으로 따지는 곳이라고 하신다면 저도 순순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용천관이 묘한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 사도맹은… 나이를 우선으로 따지지 않는다. 힘센 놈이 대장이지. 안 그런가, 부맹주?”
마지막으로 맹천기에게 물을 때는 말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마치 맹천기를 놀리기라도 하듯.
맹천기가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맹주. 당연히 강한 사람이 대장이지요.”
“그렇다는군. 답이 되었나 모르겠네.”
용천관이 청운에게 말하고는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너희는 싸워라, 나는 구경이나 하겠다.
그런 자세였다.
청운은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도 모른 척했다.
“부맹주, 제가 나이는 어리지만, 주먹과 칼은 좀 씁니다. 정 못 믿겠으면 시험해보시지요.”
갑작스런 도발에 맹천기가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뭐, 뭐라? 크크크, 와하하하하!”
우르르르릉!
맹천기가 대소를 터트리자, 전각이 기둥 채 흔들렸다.
고수 아닌 자가 없는 자리이건만 많은 이들이 괴로워했다. 그들은 귀를 막고 내공을 끌어올려서 맹천기의 웃음소리에 대항했다.
어느 순간,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맹천기가 청운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오냐오냐하니까, 내가 우습게 보였나 보구나.”
“우습게 보인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 해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요.”
맹천기는 은근슬쩍 긁어대는 청운을 불길이 이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크크크. 오냐! 좋은 주먹 놔두고 말로 할 필요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