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207화
* * *
진무사 이청운이 파직(罷職)당했다는 소문은 강호무림뿐 아니라 유문 쪽으로도 들불처럼 퍼졌다.
황궁에서 추포 명령이 떨어졌다는 소문도 있었다.
천향서원은 발칵 뒤집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천향서원 원주인 묘청선생 위진천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천하 십대서원의 수장으로 올라서 있었고 학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관직에 나선 이들이 적지 않다 보니 대장군도 천향서원을 섣불리 건들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무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지금은 힘을 실어 주고 있는 다른 서원들도 문제였다. 언제 등을 돌릴지 모른다. 덕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청운에게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청운이는 아직 소식이 없느냐?”
“예, 송구하옵게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사옵니다.”
천향서원에서는 청운이 살아 있다는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
파직 여부를 떠나 당장은 그의 생사가 더 중요했다.
그런데 묘청선생은 의외로 청운의 생사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청운은 무사할 거다. 단명할 상은 아니니 말이야.”
그는 어젯밤 다시 천기를 살폈었다. 사기에 침범당한 천황성의 기운이 다시 밝게 빛나는 걸 봤다. 청운이 무사하다는 뜻이었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청운의 연락이었다.
위진천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내 결단코 참지 않을 것이다. 감히 내 제자를 건들다니.”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무력만이 아니다.
싸워야 한다면 목숨을 내놓고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 시작은 청운의 생사가 확인되는 순간이 될 것이다.
* * *
“아기씨! 살아 계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약관쯤 되어 보이는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문을 박살 낼 기세로 뛰어들었다.
실내에는 백청청과 백야대주가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백청청이 뛰어든 사내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어디? 어디 계시다고 해? 무사하시대? 다친 데는 없고?”
“예, 그게…… 그냥 생환이라고 전서로 왔는데요.”
“뭐? 그럼 살아 있다는 것만 알아? 아니,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해! 다친 데는 없는지, 나를 찾지는 않았는지, 나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 그런 걸 알아 와야 할 것 아냐. 아 참!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알렸어?”
백청청이 두 눈에서 불을 번쩍이며 압박하자, 소식을 전하러 온 사내는 뒷걸음질 치며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어어! 그게 아니라니까요. 천리응에 생환이라고만 적혀 있었다니까요. 전 그냥 이것만 들고 왔어요.”
“그럼 누가 아는데?”
“그, 그게… 무림맹은 알 겁니다. 그곳에 나타났으니까요.”
“뭐? 무림맹? 안 되겠어. 내가 직접 무림맹에 가서 물어봐야지!”
“아이고! 왜 이러세요. 아가씨, 제발 진정하시고요. 대주, 좀 말리십시오. 지금 무림맹에 가봐야…….”
사내는 백야대주에게 구원을 청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백야대주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젠장, 튀었어. 나 혼자 어떻게 막으라고!’
* * *
청운이 생환했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좋아한 자도 있었지만 싫어한 자도 있었다.
우르릉!
“죽었다며! 놈이 죽는 것을 확인했다며!”
거대한 대전 안에 한 사내가 화를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트렸다. 신혈교의 교주인 혈마였다.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를 올렸던 장로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송구하옵니다. 놈이 협공을 받고 만신창이가 된 채 도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혈맥이 끊어지고 몸이 작살 난 상태로 며칠이나 나타나지 않아서 뒈진 줄 알았는데…….”
“밤이어서 추격하기 힘들지만 않았어도 잡아서 머리를 부숴버리는 건데…….”
청운과 생사대전을 벌였던 장로들이 변명하며 혈마의 눈치를 봤다.
혈마는 그들의 말대로 일장에 머리를 쳐 죽이고 싶었지만 들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청운을 상대로 부교주와 장로들, 그리고 수많은 정예들이 목숨을 잃은 터라 한 명의 고수가 아쉬웠다.
“놈에게 감시자는 붙였겠지?”
다소 누그러진 혈마의 목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장로 중 한 명이 곧바로 대답했다.
“예, 은밀하게 추격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이번엔 잘해. 두 번의 실수는 죽음이라는 걸 잊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때 상석에 앉아 있던 혁련휘가 입을 열었다.
“놈이 그토록 큰 부상을 입었다면 살아 있다 해도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을 거요. 고수들을 보내 반드시 잡아야 하오.”
“예, 소천주!”
“아, 사지를 다 잘라도 상관없으니 가능한 한 살려서 잡아오시오. 그놈의 목을 내가 직접 잘라서 아버님의 복수를 할 거요.”
* * *
화산파를 나온 청운은 장안의 정 소감과 금의위 대원들을 은밀하게 만나서 돌아가는 상황을 알려주었다.
자신을 따를 것인지, 황궁으로 돌아갈 것인지 선택하라고 했다.
정 소감은 당연히 청운을 따르겠다며 눈물을 쏟았다.
“대인, 소인은 목이 떨어지더라도 대인을 따를 것이옵니다!”
금의위 중에서도 석덕조 등 처음부터 청운을 따랐던 이들은 언제든 불러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청운은 당장 따라나서겠다는 그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황궁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게. 분명 신비세력 무리가 파고들었을 거네.”
“나를 파직한 게 황제의 본뜻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압박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명령이 내려졌다는 말이라 할 수 있네. 그렇다면 황제를 압박한 무리에 반감을 가진 사람이 있을 거네. 그들에 대해서도 알아보게.”
그러고는 며칠 동안은 발길이 닿는 대로 무작정 세상을 돌아다녔다.
자신이 직접 황궁으로 갈까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힘만으로는 황궁의 상황을 뒤집을 수 없었다.
대장군에 이왕야까지 나선 터였다. 오죽하면 태감과 대영반이 힘도 못 써보고 뇌옥에 갇혔겠는가.
지금은 황궁보다 무림에서 길을 찾는 게 나았다.
그렇게 돌아다닌 지 구 일째 되던 날, 그는 자신이 갈 길을 정했다.
“사도맹으로 가야겠습니다.”
“사도맹?”
현재 신혈교와 노룡회를 상대할 수 있는 세력은 무림맹과 사도맹밖에 없다.
무림맹이 자신과 함께 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아는 이상 남은 곳은 사도맹뿐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망설였던 것은 마도세력에 들어가는 것이 과연 옳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마 자신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거리를 둘지 몰랐다.
하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을 했고, 이제 결정을 했다.
“사도맹주가 제 뜻을 받아준다면 그들과 함께 신비세력을 상대할 생각입니다.”
“하긴 위선을 떨며 체면만 따지는 무림맹보다는 힘을 우선시하는 사도맹이 낫겠지. 하지만 그들 중에도 너를 반기지 않는 자들이 많을 거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좋아하는 방법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혈황은 청운의 말뜻을 눈치채고 씩 웃었다.
“그래, 남자라면 자고로 힘이 우선이지.”
그도 무림맹보다는 사도맹이 편했다.
“그런데 꼬리는 언제까지 달고 다닐 생각이냐? 잠잘 때마다 신경이 쓰이는데, 치우는 게 낫지 않을까?”
청운도 화산에서부터 꼬리가 붙어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세 사람이라는 것도, 신혈교 놈들이라는 것도.
하지만 그들의 눈에서 사라질 것이 아니라면 없애는 것보다 이용하는 게 나았다.
사도맹에 들어가면 어차피 또 꼬리가 붙을 테니까.
“낚시해 보셨습니까?”
“낚시? 안 해봤는데?”
“미끼만 있다고 고기가 잡히는 건 아닙니다. 미끼를 꿰고 있는 바늘이 있어야 하고, 바늘과 연결된 줄도 있어야 하죠. 그리고 고기가 크면 줄도 그만큼 질겨야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그래서 낚시라도 가자는 거냐?”
이럴 때는 머리가 특별하게 잘 돌아가는 것 같지도 않다.
청운은 혈황을 쳐다보며 마저 말했다.
“저들이 신혈교에 제가 살아 있다는 걸 보고했을 겁니다. 그럼 그놈들이 어떻게 나올 거라고 보십니까?”
“그거야 당연히 너를 죽이려고…… 아하!”
혈황이 마치 수수께끼를 푼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이전의 영호천과 다른 모습에 청운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러고 보면 혈황도 순진한 면이 있었다.
“놈들이 너를 죽이려 찾아오면 머리를 똑똑 따겠다, 이거지? 저놈들은 너와 그놈들을 이어주는 낚싯줄이고.”
“똑똑하십니다.”
“음하하하, 나야 원래…… 근데 왜 그렇게 보냐?”
‘똑똑하다는 말에 좋아하는 것이 꼭 어린애 같아서요.’라고 말할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보나마나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놈들에게 역정보를 흘릴 수도 있으니 잘 이용만 하면 실보다는 득이 많을 겁니다.”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 역시 네가 잔머리는 잘 굴려.”
청운은 피식 웃고는 혈황의 모습을 쓱 훑어보았다.
“아무래도 사도맹으로 가려면 얼굴을 바꾸셔야 할 것 같습니다. 복장도 바꾸고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핑곗거리를 줘서 말꼬리를 잡힐 필요는 없죠.”
“하긴, 귀찮은 것보다는 낫겠지.”
* * *
용천관은 사도맹의 주력을 진령산맥의 용마장원으로 불러들였다.
총단으로 물러설 수도 있었지만, 한중에서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신혈교를 치려면 오가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다.
부맹주인 마군 맹천기와 이천의 정예 무사들이 도착하자 규모가 거대한 용마장원조차 좁게 느껴졌다.
청운이 혈황과 함께 용마장원에 도착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혈황은 영호천의 이전 모습과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헤어지는 척하고는 떠났다가 다음 날 합류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바뀌었다.
멀리 숨어서 바라보는 신혈교의 감시자들도 혈황이 이전의 영호천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저놈은 또 누구지?”
“생긴 거나 거들먹거리는 짓을 보니 마도 놈 같은데?”
“언제 저 녀석이라도 잡아서 족쳐볼까? 이청운과 잘 아는 사이 같은데.”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군. 놈이 사도맹으로 들어가면 감시하기가 더 편해질 테니, 기회를 봐서 빼돌리자고. 고문을 한 다음 죽여서 땅에 깊숙이 묻어버리면 사라진 줄 알겠지.”
그들은 나름대로 멋진(?) 계획을 세우며 청운과 혈황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무사하셨군요.”
정문을 지키고 있던 위사가 청운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비록 무림맹에서 파견 나왔었지만 신혈교와 함께 싸운 동료였다.
청운이 선봉에 서서 수많은 신혈교 교수들을 벤 덕분에 목숨을 구한 사도맹 무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둘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황궁에서 추포령이 떨어졌다고 하던데, 우리한테도 불똥이 떨어지는 거 아냐?”
“무림맹에서 쫓겨나니 이곳으로 온 모양이군.”
“황실의 진무사였다더니 확실히 우리완 달라. 얼굴에서 개기름이 주르륵 흐르는군.”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청운은 내색하지 않았다. 사도맹 무사들이 모두 자신을 반길 거라고는 처음부터 생각지 않았다.
“들어가시죠.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정문 위사 중 청운을 알아본 자가 앞으로 나섰다.
청운과 혈황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안으로 안내되었다.
“진…… 이청운 소협이 맹주님을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위사가 전각 안에 대고 소리쳤다. 이청운이 진무사 직위에서 파직된 걸 알기에 재빨리 호칭을 고쳤다.
넓은 전각에는 사도맹주인 용천관과 장로들을 비롯한 수십 명의 마도사파 인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회의를 하던 중 청운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의 시선이 전각의 문 쪽으로 향했다.
청운이 살아 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무림맹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는 것도 이미 소문이 쫙 퍼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가 사도맹을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왔군.’
용천관은 남몰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 그래도 청운을 잡아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찾을 것도 없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그가 밖을 향해 말했다.
“들어와라!”
곧 문이 열리고 청운이 혈황과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