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204화
영호천은 숨만 붙은 상태로 화산파에 와서 영약과 고수들의 치료를 받았다.
죽은 자도 살린다는 대환단까지 사용했는데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땡중 놈들, 대환단이 엉터리인 거 아니야?]
그래도 몇 알 남지 않았다는 소림사의 대환단 덕분에 죽을 고비는 넘겼다.
문제는 기혈이 안정되었는데도 깨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혈황의 판단으로는 몸도 엉망이 되었지만 머리가 더 문제였다. 뇌의 움직임이 죽어 있는 것이다.
몸이야 고치면 되는데, 머리는 치료가 쉽지가 않다.
영약의 힘으로 버티고 있긴 하지만, 영호천은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고민이었다.
이대로 영호천의 몸을 차지할 것인지, 아니면 좀 더 지켜볼 것인지.
나중에라도 정신이 깨어난다면 자신은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영호천도 자신에게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칫하면 청운을 제외하고 자신이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육신을 영원히 잃을지도 모른다.
스르륵.
두 눈을 감은 혈황은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반각 후, 두 눈을 떴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어.]
혈황은 영호천을 바라보며 결단을 내렸다.
[이 녀석이 살아나건, 아니면 내가 이 녀석 몸을 차지하든, 그건 하늘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스스스.
혈황의 형체가 영호천과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미동도 없던 영호천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뿜어지기 시작했다.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면 깜짝 놀라서 의원을 불렀겠지만 일손이 부족하다 보니 간호하던 이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붉은 기운이 몸을 감싸기 시작하자 영호천의 몸이 붉은 고치가 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붉은 고치가 된 영호천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 곧 짜증 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빌어먹을, 몸이 엉망이 되어서 당분간 공력을 절반밖에 쓸 수 없겠어.”
단순히 조종만 할 때와 육신을 완벽히 차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조종만 했을 때는 짧은 시간 동안 영호천의 육신을 이용한 것뿐이니 영호천의 상태와 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육신을 완전히 차지하려면 자신의 힘과 영혼을 영호천의 육신에 완전히 녹여내야 한다. 문제는 영호천의 육신이 생각보다 엉망이 되어서 그의 힘을 모두 녹여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끄응, 고장 나고 뒤틀린 몸을 바로잡으려면 팔자에 없는 수련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내 나이가 몇인데…….”
* * *
협곡에는 일천 구가 넘는 시신이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시신이 워낙 많다 보니 치울 생각도 못한 듯했다.
이미 썩어가는 시신은 짐승에 의해 뜯겨나간 것도 많았다.
인근 산에 사는 맹수들에게는 엄청난 잔칫상이 벌어진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청운은 참혹한 협곡의 광경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전쟁의 참상은 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는 알지 못한다. 청운은 이미 숱한 싸움을 봤는데도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결국은 인간의 욕망 때문 아닌가.’
한숨을 길게 내쉰 그는 몸을 돌려서 협곡 입구 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이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몇 사람 묻어준다 한들 표도 나지 않을 것이다.
‘군사를 동원해서 정리하는 수밖에.’
사위가 어둑해질 무렵 청운은 장안에 도착했다.
정확한 상황을 알기 위해서 정 소감이 있는 서경궁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서겠지만 의복이 찢기고 더러워져 있어서 월담을 했다.
서경궁 내의 지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정 소감의 거처를 알기에 곧장 숨어들었다.
정 소감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잘 지냈느냐?”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정 소감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른 때였다면 즉시 돌아서며 방어 자세부터 취하고 봤을 것이다.
그러나 꿈에도 그리던 목소리여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워낙 그리워하다 보니 이제는 헛소리가 들리는 상태가 된 것 아닐까?
아무도 없을까 봐 두려웠다.
“왜 그러느냐?”
하지만 분명 그 목소리가 분명했다. 헛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었다.
홱, 몸을 돌린 정 소감은 앞에 서 있는 청운을 보고 몸을 떨었다.
그도 잠시, 몸을 날려서 청운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와락!
“대인!”
청운은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정 소감의 등을 다독였다.
“다 큰 녀석이 울기는.”
“흑흑, 대인께옵서 실종되셨다는 소식에…….”
“내 이리 살아 돌아왔지 않으냐.”
“소인 대인께옵서 큰일을 당하지 않으셨을까, 하루도 잠을 이루지 못했나이다.”
“하하, 고맙구나. 다친 곳 없이 무사하니 그만 눈물을 그쳐라.”
“니에.”
정 소감은 눈물을 그치며 청운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이리저리 청운의 몸을 살피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의복이 찢기고 더러워져서 상거지가 따로 없었다.
정 소감의 두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대인, 당장 옷부터 갈아입으셔야겠사옵니다. 소인이…….”
정 소감은 청운의 행색에 다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런 정 소감을 보며 청운은 포근한 미소와 함께 궁금한 부분을 물었다.
“되었다. 그보다는 신혈교와의 싸움은 어찌 되었느냐?”
“니에, 싸움은 열흘 전에 끝났사옵니다. 안타깝게도 사도맹과 무림맹은 큰 피해를 입고 말았사옵니다. 더구나 무림맹은 총단까지 공격을 받아서…… 하옵고…….”
정 소감의 말이 이어질수록 청운의 안색이 수시로 변했다.
특히 천일영이 혁련휘가 역용했다는 부분에서는 눈을 치켜떴다.
“천일영이 혁련휘였다고? 그럼 내가 그놈을 곁에 두고도 몰라봤다는 말 아니냐? 이 멍청한 놈!”
청운은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천하에 그리 똑똑하다고 자부했던 자신이 옆에 있는 원수도 못 알아보다니!
결국 그로 인해서 수백 명이 더 죽은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말이다.
정 소감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청운을 보며 조심스럽게 몇 마디 덧붙였다.
“대인, 하온데 황궁에서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연통이 있었사옵니다.”
“황궁? 무슨 말인가?”
“아직 정확한 건 아니온데, 정원 태감님께서 당분간 조심해야 할 것 같다며 은밀하게 전서를 보내셨사옵니다.”
“조심하라니?”
청운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은 그동안 황제의 명대로 움직였고 많은 전과도 올렸다. 그런데 조심하라니. 이해가 안 되었다.
정 소감은 품에서 전서를 꺼내 청운에게 내밀었다.
청운은 전서를 펼쳐서 읽고는 미간을 좁혔다.
원정 나갔던 대장군이 돌아왔고, 오군도독부를 중심으로 대신들이 움직인다는 내용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당장 달려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장군이 돌아오다니. 지금은 그가 헛된 마음을 먹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황궁제일고수라 불리는 그와 그를 따르는 무장들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인물들이 아니다.
황제조차 그들 세력을 함부로 못 하는 형편 아닌가.
정원 태감과 풍천호 대영반이라면 당분간 견제할 수 있겠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그들을 믿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당장 급한 곳은 황궁이 아니었다. 싸움에서 밀린 무림맹과 사도맹을 다시 일으켜 세워서 신비세력과 맞서는 것이 중요했다.
복잡한 심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청운을 보며 정 소감이 넌지시 말했다.
“대인, 황궁으로 가보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흠, 가보긴 해야 하는데… 당장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이네. 자네도 알겠지만 무림 일이 급해. 지금은 두 분을 믿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네.”
“니에, 황궁은 소인이 귀를 열고 있겠사옵니다.”
청운의 말에 정 소감은 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신혈교와 무림의 상황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말해보게.”
* * *
무림맹이 분루를 삼키며 화산파에서 힘을 모으고 있을 때 사도맹은 진령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일천이 넘는 무사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남은 건 고작 삼 할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고수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쾅!
용천관은 새롭게 들어온 소식에 분노해서 탁자를 내리쳤다.
“그게 사실이냐?”
“예, 맹주.”
사뇌의 보고를 받은 용천관은 눈을 부라렸다.
“무림맹이 고의로 속도를 늦추었단 말이지?”
“그 바람에 두세 시진 정도 차이가 나서 신혈교 놈들이 저희 쪽에 힘을 집중하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죽일 놈들! 정파라는 놈들이 그딴 음험한 계책을 쓰다니!”
“듣기로는 제갈신기가 반대했는데, 결국 무림맹마저 승리를 하지 못하자 총군사 자리를 내놓았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그놈들을 믿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맹주!”
“정파의 위선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사도맹의 장로들이 분노를 터트리며 소리쳤다.
개중에는 무림맹의 공격을 걱정하는 이도 있었다.
“맹주, 놈들이 화풀이하기 위해 우리를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흥! 놈들은 집까지 잃은 판이다. 우리를 칠 정신도 없을 거야.”
“그래도 뭔가 조치를…….”
용천관은 손을 들어서 장로들의 입을 막았다.
그 역시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지금은 분노만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 없었다.
사도맹과 무림맹이 신비세력의 주구 중 한 곳인 신혈교를 치다 패퇴했다.
아무리 전력의 일부만 동원했다 하나 최고위 간부들이 모두 출동한 싸움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신비세력에 속한 단체가 신혈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룡회라는 곳은 무림맹 총단을 쳤다고 하지 않던가.
무림맹을 갈아 마시고 싶지만 지금은 감정대로 움직여서는 안 됐다.
“진무사는? 소식은 있느냐?”
용천관이 겨우 분노를 가라앉히고 물었다.
사뇌가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수색을 계속하고 있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녀석이 있으면 뭔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텐데.”
용천관은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몇몇 간부들은 불만스런 표정이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청운이 없었다면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거라는 걸 그들도 아는 것이다.
지금 그를 욕해봐야 용천관의 심기만 거스를 뿐이다.
“그놈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죽을 놈이 아니야.”
싸움이 벌어진 다음 날 무사들을 협곡으로 보냈다. 주요 고수들의 시신이라도 회수하기 위함이었다. 운이 좋으면 살아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이청운의 시신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화산파에 사람을 보내서 이청운이 돌아왔는지 알아봐라. 그가 돌아왔다면 은밀히 내가 보잔다고 해.”
“예, 맹주.”
“좀 쉬어야겠으니 모두 나가 봐.”
용천관은 손을 저어서 사람을 내보냈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무림맹은 걱정할 것 없어. 문제는 신비세력 놈들인데…….’
신혈교는 그날 이후 계곡 안쪽의 총단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시신을 회수하러 간 무사들도 신혈교 놈들과 마주치지 않았다고 했다.
아마 그들 역시 사도맹과 무림맹보다 피해가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놈들을 제거하려면 청운이란 놈이 꼭 있어야 해.’
설마 그놈이 진짜 죽은 건 아니겠지?
* * *
어둑해진 밤, 화산 연화봉에 한 마리 야조인 양 훨훨 날고 있는 인영이 있었다.
정 소감과 헤어진 후 곧장 화산으로 달려온 청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