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203화
결심을 굳힌 청운은 망설이지 않고 유지를 풀어헤쳤다.
붉은빛을 띠고 있는 혈룡단은 호두알만 했다. 본래 크기가 얼마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뭉쳐 있으니 그런가 보다 했을 뿐.
숨을 크게 들이쉰 청운은 혈룡단을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양이 많다 보니 한 번에 삼켜지지 않았다.
청운은 침과 함께 혈룡단을 조금씩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 간 혈룡단이 배 속에 들어가자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혈룡단을 모두 삼킨 청운은 천명신공을 운용하며 무언가 반응이 있기를 기다렸다.
반각쯤 지났을까, 한 줄기 뜨거운 기운이 꿈틀거리며 흘러나왔다.
새로운 기운이 몸속에 나타나자 혈기와 뇌기가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곧 혈룡단이 뿜어내는 뜨거운 기운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혈기는 독맥을 타고, 뇌기는 임맥을 타고 내달렸다.
혈룡과 청룡이 경쟁하듯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듯했다.
‘크으으윽.’
두 기운은 혈맥이 막힌 곳이 있으면 틈새를 비집으며 강제로 뚫었다.
불로 생살을 지지는 고통!
청운은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려고 하는 것을 이를 악물며 버텼다.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른다면 기혈이 뒤엉키고 주화입마에 들 가능성이 컸다.
최악의 경우에는 혈맥이 뚫리는 게 아니라 터질 수도 있었다.
청운은 어떻게든 정신을 유지하며 두 기운이 엉뚱한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사력을 다해 막았다.
그사이 혈룡단의 기운은 천명신공에 의해 위로 솟구쳐서 백회혈에 이르러 있었다.
혈룡과 청룡은 주인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혈룡단의 뜨거운 기운을 서로 먼저 잡아먹기 위해서 달려들었다.
청운은 이미 생사현관이 타통된 터라 두 기운도 거침이 없이 백회를 향해 솟구쳤다.
그리고 어느 순간, 혈룡단의 뜨거운 기운을 가운데 두고 두 기운이 충돌했다.
쾅!
순간 청운의 두 눈에서 불이 번쩍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청운의 정신도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 시진쯤 지났을 때, 정신을 잃은 청운의 몸에서 미묘한 변화가 일었다.
혈룡과 청룡이 누렇고 칙칙한 금룡과 뒤엉킨 채 청운의 몸을 타고 흘렀다. 세 기운은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내달렸다가 다시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러한 흐름은 날이 새고 다시 밤이 되도록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틀째가 되었을 때는 혈룡도 청룡도 누렇고 칙칙한 금룡도 전보다 더 맑아졌다.
그리고 사흘째가 되었을 때는 세 마리 용이 매듭을 꼬아놓은 것처럼 가지런히 얽혀서 청운의 몸을 오르내렸다.
마침내 닷새째.
용의 형상이었던 세 기운이 서로에게 녹아들면서 묵황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내달리기도 지친 듯 청운의 단전과 심장과 백회, 세 군데에 똬리를 틀더니, 흔적도 없이 스며들었다.
* * *
무림맹과 사도맹이 신혈교를 공격한 다음 날, 일단의 무리가 무림맹을 향해서 접근했다.
신비세력에서 무림맹을 관리하던 노룡회였다.
무림맹과 사도맹이 신혈교와 일전을 벌인다는 걸 알고 무림맹을 치기 위해 몰려온 것이다.
무림맹은 정예가 빠져나가자 경계를 강화한 상황이었다.
경비무사를 배로 늘리고 낙양 일대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감시하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노룡회는 수로를 이용해서 은밀히 이동했고 정파인들로 변장을 한 후였다.
빠르게 경비망을 통과한 그들은 곧장 무림맹으로 몰려갔다.
“적이다! 적이 온다!”
둥! 둥! 둥둥둥둥!
적의 공격을 알리는 북소리가 무림맹을 뒤흔들었다.
곧 무림맹에 남은 무사들이 모두 무기를 들고 뛰어나왔다.
그 직후 노룡회 무사들이 허공을 날아서 무림맹의 높은 담장을 넘어왔다.
“놈들을 막아!”
“감이 여기가 어디라고 마도 놈들이 쳐들어온 것이냐!”
무림맹의 간부들이 노성을 내지르며 노룡회 무사들을 막아섰다.
그때부터 이곳저곳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무림맹 무사들은 사력을 다해 노룡회의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작정을 하고 공격을 감행한 노룡회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각도 되지 않아서 수백 명이 쓰러졌다. 무림맹의 드넓은 연무장이 온통 시신과 시뻘건 피로 뒤덮였다.
시신은 대부분 무림맹 무사들이었다.
무림맹에는 신혈교를 치기 위해 빠져나간 정예 고수들 외에도 많은 절정 고수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노룡회의 주력 고수들은 무림맹의 간부들 실력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결국 싸움이 벌어진 지 이각쯤 지났을 때, 무림맹 무사들은 비통한 마음을 안고 무림맹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죽더라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물러서는 용기도 필요했다.
노룡회는 도주하는 무림맹 무사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기습을 해서 승리하긴 했지만, 그들 역시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추적을 하며 몇 명 더 죽이는 것보다 무림맹에 남은 재물을 취하는 게 더 이득이었다.
* * *
제갈신기는 창백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으로 허탈하기만 했다.
신혈교의 공격에 밀려서 장안 인근까지 남하한 후 부상자를 치료하며 전열을 정비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사상자가 너무나 많았다. 이대로는 반격을 꿈꾸기는커녕 적의 공격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내 안일한 생각으로 피해가 더 커졌어.’
이청운을 사도맹에 보내지 않았어야 했다. 그만 무림맹 쪽에 있었어도 이렇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목숨을 걸고 그를 지켰다면 이런 일까지 일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천일영의 배신은 그의 검은 머리가 하얗게 될 정도로 충격이었다.
그 한 명의 배신으로 무림맹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말았다.
검왕이 죽고 무림맹주 양조생이 부상을 당하자, 혁련휘와 혈마를 막을 사람이 없었다.
그때부터 천일영은 혈마와 함께 경천동지할 무공을 선보이며 정파 고수들을 공격했다.
상황이 급변하며 무림맹 무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자, 후퇴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후퇴하는 것도 만만치가 않았다.
신혈교는 지리적인 이점을 십분 활용해서 무림맹을 몰아붙였다.
최선을 다해 지휘했지만, 결국 무림맹 무사들은 협곡을 벗어나면서 수백 명이 죽어갔다.
무사들이 목숨을 내던져서 진세를 펼치며 적의 추적을 막지 않았다면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았을까.
그 와중에 백호단주 영호천이 천일영을 막다가 중상을 입고 말았다.
아마 그가 천일영을 막지 못했다면 진세에 구멍이 뚫리고 말았을 것이다.
제갈신기는 그 생각만 하면 안타까웠다.
‘무림의 젊은이들이 나이 든 원로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죽어가야 하다니…….’
새삼 무림맹 원로들의 아집에 찬 결정이 야속하기만 했다.
하지만 충격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총군사!”
뒤에서 급박한 소리가 들렸다.
제갈신기는 몸을 돌려서 소리를 지른 자를 쳐다보았다.
남궁세가의 장로인 남궁신이었다.
그의 창백한 표정을 본 제갈신기는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한 후 말하는 시간조차 아까운 듯 남궁신이 달려오면서 말했다.
“무림맹 총단이…… 총단이 무너졌소이다!”
제갈신기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섭선을 떨어뜨릴 뻔했다.
* * *
톡! 퐁!
무언가 차가운 것이 이마에 떨어져 내렸다.
톡! 펑!
물방울이 이마를 두들기더니 이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때를 같이해서 떠질 것 같지 않던 청운의 두 눈이 스르륵 떠졌다.
번쩍!
순간 청운의 두 눈에서 묵금빛 광채가 폭사되었다가 빠르게 갈무리되었다.
‘어떻게 된 거지?’
심각한 내상으로 만근 쇳덩이처럼 무겁던 몸이 깃털이라도 된 듯 가볍게 느껴졌다.
청운은 몸을 일으켜서 가부좌를 틀었다.
몸 어디에서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은커녕 너무 가뿐해서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부상을 당했는지조차 꿈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청운은 일단 운공을 해보았다.
우우우웅! 우웅!
단전에서 발원한 진기는 전신 세맥까지 거침없이 내달렸다.
그런데 진기가 전보다 훨씬 맑게 느껴졌다. 게다가 공력도 더욱 강해진 듯했다.
‘하! 혈룡단의 효능이 이 정도였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청운은 새삼 노룡회나 신혈교의 급조된 고수들이 왜 그렇게 엄청난 공력을 지녔는지 알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소름이 끼쳤다.
신비세력은 혈룡단을 이용해서 고수들을 키웠다. 예상되는 숫자만 해도 수백 명이나 되었다. 어쩌면 자신의 예상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고.
만약 부작용이 없고, 혈룡단을 만드는 방법이 어렵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무림은 이미 그들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뒤늦게라도 혈룡단을 만드는 곳을 박살 낸 게 천만다행이군.’
더구나 혈룡단의 재료가 나오던 곳도 무너졌지 않은가.
혈룡단으로 만들어진 고수가 더 늘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그나저나 얼마나 강해진 거지?’
즐거운 의문이 들었다.
일전에 혈황이 청운에게 말했었다.
-네 녀석 몸 안의 기운을 하나로 합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네 녀석 적수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확신에 찬 혈황의 말이 귀가에 맴돌았다.
그 말이 사실일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두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혈기와 뇌기와 혈룡단의 기운. 세 기운이 천명신공에 의해 하나로 합쳐졌다는 것.
전보다 강해졌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도, 공력을 일으키면 붉은 기운도, 푸른 기운도 아닌 묵황색 기운이 피어났다.
‘융합하면서 새로운 기운이 된 것 같아.’
왠지 더 멋지게 느껴졌다.
무게감도 더 있고.
‘후후후, 혈황 님이 아시면 뭐라고 하실지 모르겠군.’
몸을 일으킨 청운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고는 바람이 들어오는 쪽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기다려라, 이놈들! 모조리 씹어 먹어주마!’
* * *
화산파 전체에 초상집 같은 암울한 분위기가 흘렀다.
무림맹이 노룡회의 습격을 받아서 무너졌다는 소식과 신혈교를 치러 갔던 정파세력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거의 동시에 전해졌다.
그 후 이틀이 지났을 때 신혈교를 공격하기 위해 떠났던 무림맹과 정파의 무사들이 돌아왔다.
떠날 때는 천오백 명이 넘었는데, 돌아온 사람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절반은 부상자들이었다.
그리고 하루가 더 지났을 때, 무림맹에서 살아남은 무사들이 도착했다.
침울함을 넘어 암담한 분위기가 화산을 짓눌렀다.
하지만 정파의 저력은 어려울 때 힘을 발휘하곤 했었다.
이번에도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정파의 고수들이 머리를 맞댔다.
무림을 수호하던 무림맹은 회복 불능의 피해를 입었지만, 아직 정파의 힘은 남아 있었다.
중원에 퍼져 있는 정도 무림의 힘은 여전히 건재한 것이다. 그 힘을 모으면 무림맹에 절망을 안겨준 신비세력과 싸울 수 있었다.
그렇게 화산파가 무거운 분위기일 때, 한쪽에서는 이번 싸움으로 부상을 당한 자들의 치료가 한창이었다.
중요한 인물들은 따로 숙소를 배정하고 집중적인 치료를 했다.
그중 마지막 순간에 몸을 던져서 적의 추격을 뿌리친 영호천은 특별대우를 받았다.
[허어, 열흘이 흘렀건만 아직 깨어나지 않다니.]
혈황은 영호천을 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싸움이 있을 당시부터 그는 영호천 곁에 있었다.
혁련휘만 아니었더라도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나서서 놈을 처치했었다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영호천이 마공을 사용할 경우 무림맹 고수들이 영호천도 의심할지 몰라서 참아야만 했다.
[아무래도 머리가 죽은 거 같은데…….]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영호천을 보는 혈황의 눈이 묘한 빛으로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