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202화
세 방향에서 치고 들어간 사신단은 돌격에 특화된 어린진을 운용하며 곧장 목표물을 향해서 달렸다.
“멈추지 마라!”
“돌격하라!”
가장 중요한건 적의 수뇌부다. 다른 자들을 무시하고 중앙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는 곳으로 파고들었다.
수백 명이 셋 방향에서 뚫고 들어오자 신혈교 측에서 오히려 당황했다.
“막아!”
“저들을 저지하라!”
사신단을 향해서 신혈교 교도들이 몸을 날렸다. 그러나 산발적인 공격과 방어만으로는 사신단의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
그나마 흑의 복면을 한 흑야가 앞을 막아서자 잠시 멈추는 듯했다.
때를 같이해서 세 방향의 선두에서 돌격하던 단주들이 몸을 솟구쳤다.
남궁룡은 양조생과 혈마의 싸움에 끼어들 기회만 노리고 있는 신혈교 고수들을 향해 제왕검형의 제왕만리를 펼쳤다.
차자자장!
검강이 그물처럼 펼쳐지며 신혈교 고수들에게 폭사되었다.
동시에 영호천과 천일영은 검왕 쪽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셋이었던 검왕의 상대가 어느새 다섯으로 늘어나 있었다.
사신단은 뒤를 쫓으려는 흑야를 막아서며 혼전을 펼쳤다.
“저들을 보내지 마라!”
“놈들을 추살하라!”
혈마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짜증이 난 듯 소리쳤다.
“정파란 놈들이 잔머리만 굴리는구나! 아무리 그래봐야 소용없다!”
양조생도 맞받아쳤다.
“전쟁의 병법도 모르는 놈이 어디서 헛소리를 하는 게냐! 내 검이나 받아라!”
검왕을 몰아붙이고 있던 자들 중에서도 둘이 천일영과 영호천을 상대하기 위해 돌아섰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제갈신기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됐어! 허리가 잘리고 수뇌부는 고립됐다. 이제 놈들의 수뇌부만 제거하면 끝이다.’
그때 검왕의 뒤편에서 천일영이 신혈교의 고수를 상대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검왕이 셋을 상대하기 힘든 고수를 천일영이 무난하게 막아내는 중이었다.
검왕 역시 뒤가 안전해지자 더욱 강하게 신혈교 고수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제갈신기는 양조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대결은 여전히 팽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어둠 속이지만 달빛이 밝아서 그들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양조생의 무공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욱 강했다. 그가 검을 떨칠 때마다 줄기줄기 뻗어나간 검강이 그물처럼 펼쳐지며 혈마를 압박했다.
혈마 역시 어둠 속에서도 확연하게 느껴지는 붉은 기운의 장력을 펼치며 양조생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맹주와 검왕, 어느 쪽이든 한쪽의 싸움을 먼저 끝내는 쪽이 이길 거다.’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일이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 했던가.
‘이제는 하늘의 선택만이 남아 있다.’
그때였다.
등골이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제갈신기는 시선을 돌려 검왕 쪽을 바라보았다.
번쩍!
천일영이 높이 처든 검을 그대로 앞으로 죽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파앙!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천일영의 검에서 검강이 쏘아졌다.
검강탄기.
화경의 고수가 아니면 펼치기 힘든 절세의 검공이 천일영의 검에서 펼쳐졌다.
제갈신기는 눈을 부릅떴다.
천일영의 무공에 감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푸욱!
“커억!”
제갈신기뿐만이 아니라 근처에서 신혈교 무사들과 싸우던 모두가 경악했다.
“어, 어떻게……!”
제갈신기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천일영의 검에서 뻗어나간 검강이 검왕의 등을 꿰뚫은 것이다.
생각지도 않은 기습에 검왕의 호신강기가 찢겨졌다.
검왕의 몸에서 피가 솟구치는 게 보였다.
천일영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영호천마저 공격했다.
신혈교 고수와 접전을 벌이던 영호천은 다급히 몸을 틀었다. 하지만 천일영의 공격을 완벽히 막아내지 못하고 한쪽으로 훌훌 날아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창졸지간(倉卒之間)에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제갈신기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며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왜! 무엇 때문에?”
하지만 곧 무언가를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네놈도 저들의 주구였구나! 이노오옴!”
제갈신기의 노성이 뇌성벽력처럼 전장터를 울렸다.
그때 천일영이 제갈신기 쪽을 바라보며 앙천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 뭐든 반전이 있어야 재미있는 거 아니겠소?”
그러고는 신혈교 고수들을 향해 소리쳤다.
“뭘 꾸물거리는 거요! 힘을 합쳐서 맹주와 어린놈들을 제거하지 않고!”
“존명!”
검왕과 영호천을 상대했던 자들이 신법을 펼치며 양조생과 남궁룡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신혈교 무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반대로 무림맹 쪽은 검왕이 쓰러지고 사신단 단주 중 하나가 적의 주구로 드러나자 당황해서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그들은 이제 현무단원들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현무단원들조차 공황상태인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신혈교 무사들은 그런 무림맹 무사와 현무단원들을 거세게 공격했다.
순식간에 전황이 역전되며 무림맹 무사 백여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천일영은 자신을 향한 제갈신기의 시선을 느끼고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총군사! 아직도 내가 천검문의 둘째 천일영으로 보이는가?”
스스스.
천일영의 얼굴이 꿈틀거리더니 모습이 변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얼굴이 변한 천일영의 정체였다.
혁련휘.
천일영은 혁련장주의 아들 혁련휘였다.
“이 얼굴이 내 진면목이다. 잘 기억해 두어라. 앞으로 무림을 지배할 절대지존의 얼굴이니 말이다. 크하하하하!”
무림맹 고수들이 얼굴을 험악하게 구겨졌다.
특히 현무단 단원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천일영, 아니 혁련휘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이놈! 감히 우리를 속이다니!”
“죽여 버리겠다!”
현무단 일부가 신법을 펼치며 혁련휘에게 나아갔다. 그 앞을 흑야가 막아서려고 했지만 혁련휘가 제지했다.
“놔두어라.”
앞길이 열리자 현무단원들이 기세를 올리며 쏟아졌다. 지척에 다다랐을 때 혁련휘의 몸에서 하얀빛과 함께 뱀처럼 흐느적거리는 무언가가 몸 주위로 생성되었다.
“이게 앞으로 무림의 지존이 될 본 공자의 능력이니라!”
파바바밧!
혁련휘의 몸에서 환한 빛이 터졌다. 동아줄 같은 빛의 기둥이 뱀처럼 휘어지며 현무단원들에게 쏘아졌다.
깜짝 놀란 자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막아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챙!
따다다다당!
혁련휘를 공격하던 십여 명이 모두 빛에 꿰뚫려서 피를 뿌렸다.
푸학!
혁련휘는 단숨에 현무단원 십여 명을 죽이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무림맹 놈들을 모두 척살하라!”
“존명!”
“모조리 죽여라!”
잠시 멈췄던 싸움이 다시 벌어졌다.
혈마를 상대하던 양조생은 급변하는 상황에 당황해서 제대로 된 무공을 펼칠 수 없었다.
상승의 무공을 펼치기 위해서는 부동심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믿었던 현무단주의 배신과 검왕의 죽음은 그의 부동심을 사정없이 흔들어버렸다.
“맹주! 일단 물러서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갈신기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검왕의 죽음도 엄청난 손실이지만, 더 큰 문제는 무림맹 무사들의 심적 혼란이었다.
이미 수백 명이 적의 반격에 당해서 쓰러진 상태였다.
실낱같던 승기가 적에게 완벽하게 넘어간 상황. 더 이상의 싸움은 이곳에 시신만 더 많이 남길 뿐이었다.
양조생도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전력을 다한 일 초 공격을 펼쳤다. 그러고는 혈마가 방어한 사이 뒤로 몸을 날렸다.
“후퇴를 지시하게!”
그가 소리치자 제갈신기가 참담한 마음으로 후퇴 명령을 내렸다.
“무림맹의 모든 무사들은 즉시 후퇴해서 협곡을 벗어나라!”
“후퇴!”
제갈신기의 말을 받은 전령들이 여기저기서 소리쳤다.
* * *
똑! 똑! 똑!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어두운 동굴 안. 물방울이 종유석을 타고 떨어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동굴을 울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미세한 신음이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끄응.”
부스럭.
어둠에 잠긴 한쪽 바닥이 들썩였다.
무언가 꿈틀거리더니 바닥이 일어났다.
쓰러져 있던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몸을 들썩인 것이다.
몸을 일으키려던 인영은 온전히 앉지도 못하고 몸을 뒤집었다.
“크윽.”
청운이었다.
“후욱, 후욱…….”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는 안간힘을 다해서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여긴 어디지?’
청운은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신혈교 고수들에게서 겨우 몸을 빼낸 그는 정신없이 어둠 속을 뚫고 달렸다.
내부에서 부딪치는 두 기운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저 적에게서 벗어나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달빛으로 환한 어둠 속에서도 절벽 사이에 시커먼 동공이 보였다.
높이는 칠팔 장.
청운은 일단 그곳에 숨을 작정을 하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몸을 날렸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동공은 수평이 아니라 급격한 경사를 이루며 아래쪽으로 꺾어져 있었던 것이다.
굴러떨어진 청운은 동굴의 벽에 부딪쳤다.
그 이후로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후우우우.”
예부터 이곳은 절벽 안쪽에 구멍이 많아서 풍혈곡이라 불렸다.
절벽에 뚫려 있는 동혈을 타고 바닥까지 굴러떨어진 청운은 잠시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다.
“어쨌든 살긴 살았군.”
그런데 싸움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도맹은 무사히 탈출했을까?
무림맹은?
청운은 고개를 저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지금은 내 몸부터 생각하자.’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혈맥은 곳곳이 막혀 있었고, 혈기와 뇌기가 눈치를 보며 대치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이 상태로 운공을 했다가는 두 기운이 또 폭주할 수도 있다.’
내상이 극심한 상태에서 두 기운이 충돌하면 몸이 견뎌내지 못할 게 뻔하다. 어쩌면 막힌 혈맥이 폭발할 수도 있고.
그럼 끝장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일.
청운은 조심스럽게 운공을 해보았다.
그가 운공을 하자마자, 폭풍 전야의 고요함처럼 숨을 죽이고 있던 두 기운이 이를 드러내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젠장.’
청운은 재빨리 운공을 멈추었다.
다행히 그가 운공을 멈추자, 두 기운도 다시 잠잠해졌다.
‘혈황 님이라도 계셨다면 좋았을 것을.’
혈황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조언이라도 해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없는 혈황을 찾는다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청운은 기억을 더듬어서 자신의 무공에 대한 지식을 총동원했다. 황궁무고에서 본 무공이 어디 한두 가지던가. 무언가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기억을 더듬던 청운이 눈을 번쩍 떴다.
‘응?’
한 가지 가능성을 찾아냈다. 다만 그 방법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움이 필요했다.
강력한 공력을 지닌 사람이 곁에 있거나, 그만한 효능을 지닌 영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자신에게는 그 두 가지 중 하나가 있었다.
“가능할까?”
의문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할 수 있는 방법은 뭐든 해봐야 했다.
청운은 부르르 떨리는 손을 억지로 움직여서 품속에 집어넣었다.
몸이 얼마나 엉망인지 그 정도의 동작만으로도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품에서 빠져나온 그의 손에는 유지에 둘둘 말린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비록 불에 타긴 했지만… 이거라면 가능할지도.’
타다 남은 혈룡단이었다. 전에 놈들의 지하실을 뒤지다 얻은 혈룡단의 잔재물.
완성품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다. 어쩌면 약효가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진기가 충돌해서 죽든 이걸 먹고 부작용으로 죽든 매한가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