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199화
먼저 출발했지만 진격을 늦춘 무림맹도 어느새 약속한 장소에 다다라 있었다.
속도를 늦춰서인지 공격을 덜 받았고, 그러다 보니 피해도 적었다.
덕분에 속도를 늦추자고 목소리를 높였던 자들에게 힘이 실렸다.
“그것 보십시오. 서두르지 않으니 놈들도 별거 아니지 않습니까?”
일청자가 목소리를 높이자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갈신기는 착잡한 마음이었다.
‘이번 작전은 속도전이 생명이다. 그런데 이 멍청한 인사들 덕분에 작전이 틀어지다니.’
아무리 뛰어난 작전을 세워도 작전을 수행해야 할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런데 믿었던 무림맹주가 고개를 돌렸고, 무림맹의 장로들도 자신의 계획을 외면했다.
물론 그도 사도맹의 힘을 약화시키고 싶은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합심해도 모자랄 판에 한발 뒤로 빠졌으니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답답하기만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자신 역시 어느 정도 이들의 주장에 끌리는 부분이 있었다.
신비세력을 물리치고 나면 사도맹과 다시 창칼을 겨누어야 한다.
그런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면 누군들 반기지 않을 것인가.
문제는 사도맹이 사실을 알았을 때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번 공격이 실패했을 경우다.
그 생각을 하면 앞이 캄캄했다.
‘후우우우우.’
제갈신기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소식을 전했으니 진무사가 잘 처리하겠지.”
무림맹의 움직임은 자신의 손을 떠났다.
이제 나머지 일은 청운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 * *
사도맹이 나타나서 밀고 들어오자 신혈교 신도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싸움은 기세가 중요하다. 한번 기세를 타면 밀리고 있던 전장을 지금처럼 뒤집을 수 있다.
신혈교 측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즉시 움직였다.
삐이익! 삐이익!
연달아 피리 소리가 크게 울렸다.
별동대를 공격하던 신혈교 신도들이 밀물처럼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용천관은 사자후를 터트리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주살하라!”
우르릉.
협곡이 뒤흔들릴 만큼 거대한 사자후에 사도맹 고수들이 후퇴하는 자들의 뒤를 쳤다.
한 명이라도 더 죽여야 했다. 그래야 동료들이 한 명이라도 더 살 수 있다.
사도맹 고수들은 사자바위 앞 드넓은 공터를 가득 메운 채 신혈교 무사들을 공격했다.
협곡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신군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흥! 지옥의 아가리로 들어오느라 수고했다.”
그의 손이 서서히 올라갔다.
불만 가득한 그의 짜증 섞인 얼굴을 마주한 신혈교의 장로들이 눈치를 보며 긴장했다.
이내 신군의 손이 휘저으며 말했다.
“시작해.”
신군의 옆에 서 있던 자가 폭죽이 달린 화살을 꺼내서 심지에 불을 붙이고는 하늘로 쏘았다.
하늘 높이 올라간 폭죽이 터졌다.
도망치던 신혈교 교도들이 돌아서서 사도맹 무사들을 공격했다.
그때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슈슈슈슈슉!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은 철전이 협곡을 덮쳤다.
철전은 적아를 구분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살을 파고들었다.
퍼버버벅!
“크아악.”
“같은 편을 왜?”
도망치던 자들도 추격하던 자들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투두두두둥!
활시위 튕기는 소리와 함께 하늘 높이 치솟는 검은 그림자를 보며 협곡에 몰려 있던 자들이 기겁했다.
사도맹 무사들은 협곡에 몰려든 상태였다.
뒤로 물러서려고 해도 앞을 막고 있는 동료들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슈슈슈슈슉!
“막아!”
“화살을 쳐내라!”
협곡 공터에 몰려 있던 사도맹 무인들은 쏟아지는 화살을 쳐내며 조금씩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쳐라!”
다시 사자후가 들리며 협곡 위에서 새로운 신혈교 무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젠장, 놈들을 쳐라!”
용천관도 사자후를 터트리며 물러서던 무인들을 돌려세웠다.
다시 치열한 공방이 시작되었다.
그사이 사도맹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죽은 이들도 많았지만 화살 공격에 상처를 입은 자들이 더 많았다.
“쳐라! 놈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어라!”
다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협곡 위에서 신혈교 복장을 한 자들이 새롭게 모습을 보이더니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채재재재쟁!
우지직, 쾅쾅!
사도맹 무사들의 숫자가 일천에 달했지만 신혈교 신도들의 숫자도 그에 못지않았다.
게다가 사도맹 무사들은 노출된 상태였고, 지리적인 이점 역시 신혈교 쪽이 유리했다.
신혈교는 정면은 물론이고 협곡의 상단에서 절벽을 타고 사도맹을 좌우에서 덮쳤다.
뒤쪽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뇌가 이를 악물며 명령을 내렸다.
“구혼대와 혈영대는 우측 협곡 위로 올라가라! 무령대와 사사천위대는 좌측으로 올라가서 놈들을 공격하라!”
생각지 못했던 강력한 공격에 사도맹의 전열이 흐트러졌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신호탄을 쏘아 올려라!”
“예!”
슈슈슈슝!
펑! 펑! 퍼벙!
하늘 높이 불꽃이 피어올랐다. 밤하늘을 수놓는 화려한 불꽃이 깊은 산중에서 치솟았다.
무림맹을 부르기 위한 신호탄이었다.
사뇌가 소리쳤다.
“모두 정신 차려라!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사뇌는 부하들을 독려하며 뒤쪽에 남아 있는 부대를 빠르게 재배치했다.
당할 때 당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한도로 줄여야 했다.
* * *
“적색 신호탄이 솟았습니다.”
능선 위 봉우리에서 주위를 살피던 척후대가 소식을 전해왔다.
신호탄이 솟아오른 곳은 이십여 리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이런! 벌써 정면으로 붙었단 말인가?”
상황에 따라 신호탄의 색깔을 달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적색 신호탄이라면 강적과 격돌 중이라는 말이었다.
“더 늦기 전에 속도를 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갈신기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무림맹 장로들과 정파의 원로들 얼굴에는 미소가 걸렸다.
“굳이 그럴 필요 있겠소이까?”
“어부지리를 노리는 것이야말로 병법 중 상책이 아니겠소?”
제갈신기의 두 눈에서 안광이 폭사되었다가 빠르게 갈무리되었다.
그의 시선이 양조생에게로 향했다.
“사도맹이 당하면 무림맹 단독으로 놈들을 상대해야 합니다. 맹주, 명을 내려주시지요.”
양조생이 제갈신기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군사, 우리는 정의와 협의를 지키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소. 신혈교도 우리가 물리쳐야 할 적이지만, 사도맹 역시 친구라 할 수는 없소. 일단 상황을 알아본 다음에 대처하도록 합시다.”
제갈신기는 속이 끓었지만 자신 혼자 서두른다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사도맹과 견원지간이라 해도 이건 아니거늘…….’
* * *
한편, 사자바위 아래의 공터에서는 난전이 펼쳐졌다.
사람들이 적아를 구분하기도 힘들 만큼 뒤엉켰다. 어둠마저 내려앉아서 시야마저 자유롭지 않았다.
난전 속에서 감각으로 적을 죽여야 하는 일은 아무리 강호의 고수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적인 줄 알고 공격했더니 피를 뒤집어쓴 아군이었다. 아군인 줄 알고 등을 맡겼더니 적의 병장기가 가슴을 뚫고 삐져나오기 일쑤였다.
혼전 속에서 쉽게 벌어지는 일이지만 고수들의 싸움에서 벌어질지는 몰랐다. 그만큼 혼란스럽게 엉겨 붙어 있었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서서 전열을 정비할 시간도 없었다. 물러서는 순간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질 것이다.
싫든 좋든 이 자리에서 결판을 내야 하는 상황.
“물러서지 마라!”
“좌우를 잘 살피고 적을 죽여라!”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는 모르지만, 양측 지휘관들은 고래고래 악을 썼다.
“내가 길을 뚫겠소! 별동대는 좌우를 상대하며 뒤를 따르시오!”
청운은 큰 소리로 외치고는 앞장서서 적을 베었다.
가까이에서 싸우던 별동대가 그의 뒤를 따라서 움직였다.
근처에 있던 사도맹 무사들마저 별동대와 합류해서 하나의 기다란 진을 이루었다.
청운의 검에서 뿜어지는 검사와 검강들이 허공에 잔상을 남기며 적을 찾아 목숨을 취했다.
이미 청운이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서 시체가 길을 만들 만큼 압도적인 위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벌어진 틈을 뒤따르던 사도맹 무인들이 공간을 확보했다.
챙챙 채채챙!
절정 고수이건 일류 고수이건 청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청운도 사람이었다. 계속된 싸움에 내공이 점점 고갈되기 시작했다.
“정말 대단하군. 하지만 네놈도 이제 죽을 때가 되어가는 것 같구나. 후후후후.”
협곡 위에서 청운을 살피던 신군이 회심의 살소를 흘렸다. 청운의 몸놀림이 조금씩 무뎌지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그는 한쪽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다른 놈들은 신경 쓸 것 없다. 진무사란 놈만 잡아라.”
오십여 명의 흑포를 입은 자들이 일제히 바닥을 차며 날아올랐다.
흑포를 날개 삼아 협곡으로 뛰어내린 자들은 곧장 청운을 향해 날아갔다.
챙챙챙!
청운의 뒤를 따르며 적을 주살하던 용화청은 고개를 쳐들고 이를 악다물었다.
무언가 시커먼 것이 밤을 타고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대인, 하늘에서 적이 날아오고 있소이다!”
전장의 피 냄새와 숨소리에 조금씩 이성을 잃어가던 청운은 용화청의 사자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의미하게 기계처럼 움직이던 청운이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을 가리며 떨어져 내리는 검은 망토가 두 눈에 가득했다.
우웅!
청운은 급히 청명신공을 일으키며 남은 내공을 쥐어짰다.
파지지지직!
파바바바박!
검에서 가느다랗게 응축된 검강이 거미줄처럼 솟구치며 흑포인들을 거미줄처럼 가두었다.
가장 먼저 날아들었던 흑포인 중 서너 명이 검강에 휘말려서 소나기처럼 피를 뿌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흑포인은 아직도 수십 명이나 되었고, 청운이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은 한정이 있었다.
흑포인들은 청운의 주위에 있는 자들을 공격하며 청운을 한쪽으로 분리시켰다.
사도맹 무사들은 자신들이 살기도 바쁜 판이었다. 청운을 구하는 것보다 협곡을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흑야?’
청운은 적의 정체를 눈치채고는 이를 악다물었다.
흑포인들 중에 숫자가 적힌 복면을 쓰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흑야의 고수가 섞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었다.
휘리릭!
청운은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뒤로 물러서며 검을 뻗었다.
파지지직!
번개가 뿜어지듯이 검에서 검강이 채찍처럼 뿜어졌다.
퍼버벅.
셋이 청운의 공격권에 들어왔다. 둘의 허리가 끊어졌고 한 명은 머리가 갈라졌다.
그러나 적의 공격도 예리하고 강맹해서 청운의 몸에도 상처가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이렇게는 안 돼!’
이미 사도맹과 거리가 벌어져서 흑야의 고수가 섞인 수십 명을 온전히 혼자 상대해야 할 상황이었다.
무림맹의 도움을 바랄 수도 없었다.
싸움이 벌어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서 적의 머리를 쳐야 한다.’
어딘가에서 명령을 내리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을 제거한다면 일사분란한 적의 공격도 혼란에 빠질 것이다.
청운은 적을 상대하면서 협곡 위쪽을 빠르게 훑어봤다.
어둠이 내려앉아 있지만 그의 눈에는 협곡 위쪽의 상황이 확연하게 들어왔다.
그 와중에도 적은 계속 달려들었다.
청운은 수십 명의 적 사이를 누비면서도 간간이 협곡 위쪽을 살펴봤다.
그러던 어느 순간, 협곡 위 저 멀리에 서 있는 십여 명이 눈에 들어왔다.
오연하게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세. 이 싸움을 지휘하는 자들이 분명했다.
‘찾았어!’
청운은 검강이 발현된 검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후우우우웅!
청룡 형상의 검강이 포효를 토하며 밀려갔다.
서너 명이 검세에 휘말려서 사지가 잘리며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흑포인들은 청운의 가공할 검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냉막하게 살기가 흐르던 그들의 눈에도 두려움과 공포가 떠올랐다.
“포위망을 유지한 채 공격하라! 놈도 지쳐가고 있다!”
흑포인들 중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청운이 강한 무공을 쓸수록 내공은 고갈될 터. 그때를 노릴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청운은 그들이 주춤거린 틈을 타서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