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196화
다음 날, 사도맹은 방벽처럼 끝없이 펼쳐진 산맥 앞에 도착했다.
산들은 그리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대한 숲과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계곡이 미로처럼 뻗어 있었다.
사도맹은 여러 차례 신혈교의 습격을 뚫고 마지막 관문이나 마찬가지인 협곡의 초입에 들어섰다.
진형을 갖춘 그들은 협곡의 입구에서 잠시 대기했다.
그사이 청운과 용천관을 비롯한 사도맹 인사들이 모였다.
“협곡의 길이만 백 리가 넘습니다. 중간에 오른쪽으로 틀어서 능선을 세 개 넘어야 놈들이 숨어 있는 본거지의 옆면에 도착합니다.”
사뇌는 모두에게 현 상황을 설명했다.
습격이 예상되는 지역도 미리 짚어주며 이야기를 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양측 군사들은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귀가 번적 뜨이는 계책은 없었다. 벌써 이각 넘도록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때까지 청운은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용천관이 물었다.
“자네 불만 있나?”
“예? 무슨 말씀이신지?”
용천관의 장난 섞인 물음에 청운은 의아해했다. 용천관은 시큰둥한 소리로 물었다.
“한마디도 안 하니까 그러는 거 아닌가. 설마 자네도 이렇다 할 묘책이 없는 것인가?”
“저라고 해서 별수 있겠습니까. 사뇌 님을 믿어보시지요.”
청운에게는 몇 가지 방책이 있었다. 그러나 한발 물러섰다.
‘습격이 뻔하다면 역습을 준비하면 되고, 함정은 정찰대를 운영하면 파악할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정예를 따로 뽑아서 우회하는 방법인데.’
여러 가지 계책이 떠올랐다. 적이 기다린다면 허를 찌르면 된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정도 계책은 사뇌의 머릿속에도 있을 거로 생각했다.
사뇌는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피해 없이 놈들을 칠 수는 없다. 누군가의 희생 없이 승리하려면 처음부터 판을 다시 짜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장고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이대로 머뭇거렸다가는 무림맹과 만나기로 한 시간을 맞출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힘으로 밀고 들어가서 결판을 냈다면 이처럼 복잡하지도 습격에 노출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본대는 이대로 협곡으로 진입합니다. 측면을 칠 별동대를 따로 구성했는데 진무사께서 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청운은 사뇌의 청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용천관은 계책을 전부 듣더니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좋아! 정면 돌파를 해보자고.”
“존명!”
용천관의 최종 승인이 떨어지자 대기하던 사도맹 고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 명으로 구성된 정찰대 십 개조가 먼저 앞서고, 청운 역시 용화청을 비롯한 청년들이 주를 이른 백 명의 별동대를 거느리고 협곡으로 들어갔다.
선발대가 협곡으로 떠난 뒤 용천관이 이끄는 본대 역시 협곡으로 진입했다.
사도맹이 협곡으로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방에서 새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 * *
사도맹이 협곡으로 들어설 때 다른 쪽에서 진격하던 무림맹이 걸음을 늦추기 시작했다.
일청자를 비롯한 장로들과 각파의 수장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발목을 잡았다.
“진격이 너무 빠릅니다. 제자들이 지쳐서 그러니 잠시 쉬었다 가지요.”
“저쪽을 꼭 확인하고 진입해야 합니다. 적이 습격하기 딱 좋은 지형입니다.”
“저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다고 합니다. 확인하고 가시지요.”
장로들과 수장들의 요청에 제갈신기의 미간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설마 이런 치졸한 방법을 들고 나올 줄은 몰랐군.’
누구 생각인지 모르지만 제대로 아픈 곳을 찌르고 들어왔다.
단독으로 작전을 펼친다면 장로들의 의견은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지금은 사도맹과 연합전선을 펼치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에 도착해서 작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사도맹이 고스란히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제갈신기는 이를 악물며 무림맹주 양조생을 보았다.
지금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양조생이다. 그러나 제갈신기의 간절한 소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쯧쯧, 맹주님마저 돌아서셨군.’
양조생이 자신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뻔히 보이는 장로들의 수작질을 용인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받아드릴 수는 없었다.
“맹주님, 그리고 여러 장로님, 다시 한번 생각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총군사, 무얼 말씀하시는 것이오?”
“흠흠,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무엇입니까. 크흠.”
양조생은 굳게 입을 닫은 채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장로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제갈신기는 자신의 사촌형인 제갈신우를 보았다. 그러나 그 역시 다른 이들과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돌렸다.
“여러분들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닙니다.”
제갈신기는 가슴이 답답한지 언성이 살짝 올라갔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를 몰라볼 장로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제갈신기를 압박했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일청자였다.
“총군사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이 기회에 사파 놈들의 힘을 조금 빼야지 않겠습니까?”
“장로, 신의를 저버리자는 것입니까?”
제갈신기가 음성에 은은한 노기를 띠며 말했다.
일청자가 꼬장꼬장한 성격을 지녔다지만 제갈신기의 말에 당당하게 맞설 배포는 없었다.
일청자가 제갈신기의 기세에 밀려서 머뭇거릴 때 구원의 손길이 있었다. 그들은 구대문파의 수장들이었다.
“총군사, 우리가 언제 신의를 저버리자고 했습니까? 그들과 약속은 지키겠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조금 늦을 수도 있지요.”
“맞습니다. 아닌 말로 우리가 먼저 도착해서 신혈교 놈들을 상대할 수도 있습니다. 놈들이 늦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아미타불. 소승의 생각도 같습니다. 그들은 신뢰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혹, 사파에서 어부지리를 노린다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무량수불. 무당의 생각도 같습니다. 이미 피해가 큽니다. 그런데 강행 돌파라니요?”
그때 개방 방주 염악이 눈을 치켜뜨고 한마디 했다.
“아니 그 무슨 개뼈다귀 같은 말씀입니까? 사도맹이 늦는 걸 보기라도 했습니까?”
“머, 뭐라? 뼈, 뼈다귀?”
“염 방주! 말씀을 가려서 하시게!”
“어허! 아무리 개방의 방주라지만 우리가 스승인 구지신개와 같은 항렬이라는 것을 잊은 겐가?”
장문인과 장로들이 인상을 쓰며 다그쳤지만, 염악은 물러서지 않고 할 말을 다했다.
“아니, 나이와 항렬이 왜 나옵니까? 저도 죄송하지만 하도 두들겨 맞아서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따지실 것이면 스승님께 따지십시오. 그리고 진무사가 사도맹과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친구라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시간 내에 올 것입니다.”
염악은 청운이 어떤 생각으로 사도맹으로 간 것인지 목에 힘을 주고 대들었다.
하지만 상대는 닳고 닳은 구파의 주인들이었다.
뒤편에 서 있던 화산파 장문인인 현허도장이 호통을 쳤다.
“이놈! 방자하기 그지없구나! 내 구지신개 님에게 꼭 따질 것이야!”
“현허 장문인께서는 말씀 가려서 하십시오. 저 개방 방주입니다.”
“머, 뭐라?”
다른 구파의 장문인보다 나이가 젊은 현허도장이 대표로 나섰다가 본전도 찾지 못했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닫고 염악을 노려보기만 했다. 염악의 말대로 개방 방주의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나 그는 구파일방 중 일방의 주인이 아니던가.
특히 그의 별호인 광견신개를 잠시 잊은 것이 실수였다.
위아래도 없고 보이는 대로 짖어대는 걸 보면, 별호답게 미친 개새끼가 분명했다.
뜻하지 않은 전개에 무림맹주 양조생이 나섰다.
“자자, 다들 진정하십시오. 그리고 염 방주는 자제하게. 아무리 개방의 방주라지만 한 배분 높은 분들이 아닌가. 예의를 지켜주게.”
“예, 알겠습니다.”
염악은 헤벌쭉 웃으며 누런 이를 드러냈다.
힘없는 노인의 모습이지만 양조생은 패왕으로 불리는 고수다. 여기서 더 짖었다가는 복날 개 잡듯이 두들겨 맞을지도 몰랐다.
양조생은 소란을 잠재운 후에 제갈신기를 보며 말했다.
“군사, 다들 원하는 대로 해주게.”
“맹주님, 신혈교는 무림맹 만으로 상대할 자들이 아닙니다. 사도맹과 동맹이 깨지면…….”
“그만! 그만하게. 자네 걱정은 알고 있네. 하지만, 사도맹 역시 우리의 적이네. 내 말 알아들었을 것으로 생각하네. 그러니 놈들을 상대할 책략을 준비해주게.”
제갈신기의 말을 양조생이 끊었다.
제갈신기는 입을 닫고 각파의 장문인과 장로들을 둘러보았다. 저들은 이번 싸움을 사도맹의 힘을 약화시킬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는 듯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무림맹과 사도맹의 대립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문제는 자신의 힘으로 막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것이다.
설마 맹주가 지금에 와서 그런 생각을 드러낼 줄이야…….
‘당신들은 모릅니다. 신비세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회의가 소강상태가 되고 계획에 없던 휴식이 주어졌다. 제갈신기는 청운에게 보낼 전서를 만들어서 전령에게 건네주었다.
“가서 진무사께 전해라.”
* * *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협곡이 이어졌다. 붉은 흙과 기암절벽이 좌우로 늘어서서 청운 일행을 내려다보았다.
협곡은 길이만큼 폭도 넓었다.
청운은 좌우로 길게 이어진 협곡을 보며 생각했다.
‘다행이군, 습격을 받아도 충분히 싸울 공간이 나오겠어.’
좁은 협곡에서 기습을 받으면 도망도 못 치고 적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피할 공간이 있다면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
특히 뒤에 따라오는 본대가 걱정이었는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청운의 기감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청운은 급히 손을 들어 올렸다.
척.
청운의 뒤를 따르던 무인들이 급하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손을 올리는 건 약속된 신호 중 하나였다. 앞에 이상이 있으니 산개하라는 약속.
청운은 협곡의 중앙에 오연하게 서서 아무도 없는 전방을 향해 말했다.
“그만 나오는 것이 어떻겠나?”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었다.
스릉.
청운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땅을 차며 날아오르며 검을 뽑았다.
비천무영신법을 펼치며 날아간 청운은 한 지점에 다다라서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슈슈슈슉!
검강탄기.
검에서 튀어나간 강기가 협곡의 양쪽 벽면과 바닥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콰과광!
“으악!”
“크윽!”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무언가 베이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렸다.
은신술을 써서 숨어 있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들의 은신술이 가까이 접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들켰으니 놀란 것이다.
문제는 청운의 공격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청운은 바닥에 내려섬과 동시에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나아가며 검을 휘저었다.
슈슈슉!
별동대도 뒤따라 움직였다.
용화청이 먼저 움직이고, 갈환과 유영산 등 대원들이 무기를 빼들고 바짝 뒤따라갔다.
그 와중에도 청운이 검강을 줄기줄기 뿌리며 협곡을 휘젓고 다녔다.
사방이 터져나가며 돌과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속에서 비명과 피보라가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