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195화
* * *
사도맹만 습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무림맹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대대적인 습격을 받았다.
“적이다!”
“막아!”
구릉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서자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숲의 좌우에서 암기들이 쏟아졌다. 무림맹 무사들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우왕좌왕했다. 나름대로 대비를 했다지만 좁은 공간에서 갑자기 쏟아진 공격에 피해가 커졌다.
더구나 암습을 한 자들이 사용한 무기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다.
선발대는 결국 큰 피해를 입고 뒤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놈들이 악착같이 추적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뭐라? 선발대가 당해?”
본대를 이끌고 야영하던 제갈신기는 뜻밖의 보고를 받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십리림의 중간쯤 이르렀을 때 적의 공격이 있었다 합니다.”
“경계를 어떻게 했기에 당했단 말이냐?”
“송구합니다. 어두워지기 시작되는 바람에 서둘러 목표지점으로 이동하다가 습격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갈신기는 한숨을 쉬며 이를 악물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대응하는군. 놈들이 우리의 동선을 알고 있다는 말인데….’
제갈신기의 미간이 좁혀졌다.
첩자를 모두 색출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어딘가에 찾아내지 못한 자들이 또 있을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문제는 정보가 빠르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일반 무사들은 정확한 이동 경로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동 경로는 군사부와 일부 지휘관만이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놈들이 앞을 막고 기다렸다면 이미 작전계획이 놈들의 손에 넘어갔을 확률이 높았다.
고위직에 첩자가 있다는 말.
‘이대로 이동했다가는 또 당한다.’
틀림없이 놈들의 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놈들의 손에 놀아날 수는 없다.
“당장 의기대와 함께 생존자가 있는지 수색하고 전장을 수습하라!”
“존명.”
* * *
한편, 무림맹과 사도맹이 신혈교를 향해서 진격할 때, 멀리 강소성의 백가장은 한 장의 전서로 인해 발칵 뒤집혔다.
백청청이 적에게 습격을 받아 부상을 당했는데, 기습을 한 자들이 백야에서 떨어져 나간 흑야와 신비세력이라는 내용 때문이었다.
보고를 받은 백야대주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 개뼈다귀 같은 놈이 우리 청청이를 맡겼으면 잘 돌봐야지. 상처를 입혀?’
하긴 참 오랫동안 참았지 않은가. 그런데 이제는 더 참지 않을 생각이다.
백야대주는 백철군을 찾아갔다.
냉막해진 백야대주의 얼굴을 본 백철군은 쓴웃음을 지었다. 백야대주가 왜 찾아왔는지 아는 것이다.
‘때가 된 것인가?’
이미 오래전부터 가문을 떠나려고 했던 백야다. 백가장에 속해 있지만, 온전히 백가장 가솔이 아니다. 그저 선조와의 인연 때문에 가문에 의탁하고 있는 존재일 뿐.
‘만일 백야가 떠난다면 백가장의 힘은 절반으로 떨어질 것이다.’
백철군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백철군과 눈이 마주친 백야대주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백 가주. 그동안 고마웠네.”
“떠나시려는 것입니까?”
“너무 오래 폐를 끼치고 있었네.”
“대주. 혹, 청청이 때문이라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백철군은 한발 물러서서 백야대주에게 말했다.
그러나 백야대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받았다.
“청청이 때문만은 아니네.”
“그럼?”
“흑야 놈들 때문이지. 배신한 것도 모자라서 주인을 물다니……. 내가 우습게 보인 모양이야.”
백야대주가 담담하게 말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살의를 느끼지 못할 백철군이 아니었다.
백철군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었다.
“은거를 깨고 무림에 모습을 다시 드러내시려는 것인지요?”
“우리가 언제 은거를 했나?”
“그렇긴 하지요.”
백야는 은거를 한 적이 없었다. 백가장와 함께 적을 무찌르고 그저 백가장에서 살았을 뿐이다.
그걸 세인들은 은거라고 생각했다. 그 긴 세월 은거 아닌 은거를 이제 깨겠다는 말이었다.
“무림이 혼란스러워지겠군요.”
“이미 혼란스러울 만큼 혼란스럽지 않은가.”
“그것도 그렇군요.”
백야대주의 말대로 무림은 정사가 손을 잡고 신비세력과 한판 붙고 있었다.
백야대주는 딱딱하게 굳은 백철군을 보며 말했다.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놓인 무림을 구하겠다는 것은 아니네. 그저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려는 것이지.”
“…….”
백철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자해지라 했다.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
이번 백청청 사건 역시 백야에서 떨어져 나간 흑야가 문제를 일으켰지 않은가.
이를 잘 알기에 백철군은 백야와 백야대주를 더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언제든지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오십시오. 백가장은 백야를 남이라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 * *
사도맹은 용천관의 명령에 따라 사상자를 남겨 놓고 전진했다.
그로부터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또다시 신혈교의 공격을 받았다.
태양이 중천에 뜬 미시 무렵.
사도맹 무사들이 누런 황토가 깎여 나간 협곡 사이를 달려가는데, 일천 명이 넘는 신혈교 무사들이 입구와 후미를 막고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사도맹 무사들은 둘로 나누어져서 전면과 후미의 적을 상대했다.
피가 튀고 비명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지금은 비무를 벌이는 게 아니라 전쟁이었다.
비겁함이든 뭐든 이길 수만 있다면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합공을 하거나 등 뒤를 찌르는 건 예사였다.
누런 황토 협곡이 시뻘건 피로 물들어가고, 사지가 잘리고 복부가 갈라진 시신들이 협곡을 서서히 뒤덮어갔다.
청운도 처음부터 검을 빼들고 적을 맞이했다.
채앵! 서걱!
청운은 선두에 있는 자의 검을 막고 퉁겨지는 검의 궤적을 돌려서 상대의 목을 베었다. 연이어 보법을 밟으며 기습한 자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파바바밧
극성에 이른 유령기환보는 청운의 신형을 형체도 없는 허깨비로 만들었다.
적들은 분명히 청운을 베었지만 허공에서 잔상만 흩어졌다.
그 이후 돌아온 것은 죽음이었다.
무언가 따끔함을 느끼면 시야가 암전되었고 그대로 차디찬 바닥을 굴러야 했다.
싸움은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청운이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적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거대한 청룡이 하늘을 휘저었고 벼락같은 검강이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청운의 손에 이십여 명이 죽어갈 즈음,
“물러서라!”
신혈교 쪽에서 후퇴명령이 떨어졌다.
목숨을 도외시하고 거머리처럼 달라붙던 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사도맹 무사들은 그들을 쫓을 생각도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사도맹은 협곡을 빠져나와서 전열을 정비했다.
일각여 동안 벌어진 싸움은 그들에게 충격이었다.
신혈교를 우습게 본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대해본 그들은 일반 무사들조차 가슴을 벌렁거리게 할 만큼 강했다.
아마 적들이 초식 활용을 능숙하게만 할 수 있었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적의 피해가 사도맹 측보다 배는 더 많다는 것이다.
용천관도 그 점을 위안으로 삼았다.
“피해가 많긴 하지만 놈들은 두 배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이대로 놈들의 본진을 쳐서 개미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쓸어버릴 것이야!”
사도맹의 간부들도 기세를 올렸다.
“옳습니다, 맹주! 놈들을 쓸어버립시다!”
“제까짓 놈들이 어찌 우리 사도맹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당장 쳐들어갑시다!”
청운은 한쪽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제대로 된 싸움을 했다면 이 정도의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은 치고 빠지는 데 능숙했다.
놈들 중에 병법을 잘 아는 자가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사도맹 측에도 뛰어난 군사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간부들이 서로 공을 차지하기 위해 나서다 보니 사공이 많았다.
‘아무래도 지휘체계를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겠어.’
청운은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맹주님.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해보게.”
“사실, 이번 습격도 일사분란하게 대처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해서 말씀입니다만, 무사대를 통솔하는 모든 결정을 사뇌 님께서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흠, 사뇌에게 전권을 맡겨라?”
“그렇습니다. 그래야 적을 공격할 때 빈틈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듣고 있던 간부 중 두어 명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도 군사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네. 다만 전장에 나가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대처해야 할 때가 있네.”
“옳습니다. 군사가 모든 일을 다 알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청운은 자신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군사가 전권을 쥐어야 전장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상황이 달라져도 대처할 수 있지요. 또한 싸우다 보면 다른 곳의 상황과도 연계를 해야만 하는데, 한쪽 상황만 보고 움직이는 지금과 같아서는 연계가 불가능합니다.”
용천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해도 진무사의 말이 옳다. 군사나 병법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맹주!”
“조용!”
용천관이 손을 들며 소리치자, 간부들도 입을 닫았다.
“지금부터 전장의 지휘를 사뇌가 맡아서 해라! 본좌도 사뇌의 판단에 따라 움직일 것이야!”
용천관이 그리 말하자,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맹주마저 군사의 명에 따르겠다는데 누가 감히 반대한단 말인가.
대충 지휘체계가 정리되자, 용천관이 청운에게 물었다.
“무림맹은 어떻게 되고 있다던가?”
“무림맹 역시 신혈교의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후 전열을 정비해서 보다 신중하게 전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훗, 그럼 그렇지. 지놈들이라고 별수 있나?”
내심 만족한 용천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명령을 내렸다.
“최대한 빨리 부상자들을 손봐라! 내일 신혈교 놈들을 쓸어버리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돌아가면 사흘 동안 잔치를 베풀 것이니 마음껏 먹고 즐겨라!”
“알겠습니다, 맹주!”
“와하하하! 신혈교 따위가 어찌 우리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과연 용천관이었다.
그는 마도사파의 무사들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움직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청운은 감탄하는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너무 서두르는 것도 좋지 않아.’
그때 전음이 들렸다.
-진무사, 잠시 나 좀 봅시다.
청운은 전음을 보낸 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 서른이 안 될 것 같은 청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천관의 손자이자, 마도사파에서 제일을 다툰다는 청년고수, 용화청이었다.
청운은 개울가에서 용화청과 마주했다.
그런데 용화청 혼자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그와 동행했다.
용화청이 그들을 소개시켰다.
“여기 이 친구는 마혈문의 갈환이고, 이 친구는 사신곡의 유영산이오.”
갈환은 빼빼 마른 대신 키가 무척 컸다. 손도 솥뚜껑처럼 컸는데, 짙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유영산은 나이가 이십대 중반쯤으로 용화청이나 갈환보다 어려 보였다.
옆구리에는 도가 매달려 있었는데, 젊은 나이에 사신귀도라는 별호가 붙은 것도 그 도 때문이었다.
청운은 그들과 인사를 나눈 후 용화청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인사나 하려고 부른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렇소. 나는 솔직히 나이 든 간부들을 믿지 않소. 그들은 욕심만 많을 뿐 무사의 자존심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오.”
“그래도 사도맹을 일으키고 지금까지 지탱해온 분들 아닙니까?”
“물론 그건 사실이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래까지 맡길 수는 없는 것 아니오?”
“그야 그렇지요.”
“나는 그래서 젊은 고수들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소. 욕심만 앞선 간부들에게만 맡겨놓았다가는 언제 파국을 맞을지 모르오.”
“따로 조직이라도 만들 생각입니까?”
“그렇소.”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실 때는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진무사는 조부님과도 잘 통하고, 사뇌 군사님과도 원활히 소통하고 있지 않소? 우리를 도와주시오.”
청운도 사도맹 간부들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서 짜증이 날 때가 많았다.
차라리 젊은 고수들이라면 말이라도 잘 통할지 몰랐다.
“어디 구체적으로 말씀해보시지요.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