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마존-194화 (194/257)

# 194

194화

* * *

청운은 사도맹과 합류하러 가기 전 위소에 들러서 장원의 혈사를 알렸다. 그곳의 시체들은 병사들에 의해서 수습될 것이다.

백청청은 연락이 없었다.

큰 부상은 아닌 듯했지만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를 구해간 자의 능력이 대단한 듯했으니 별 탈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대장원을 나선 사도맹은 진령의 끝자락에 도착해 있었다.

평원에 수십 채의 급조한 천막이 늘어서 있고, 백여 명의 무사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해질 무렵, 사도맹의 군진에 도착한 청운은 용천관을 찾아가 백골존자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마침 그곳에서는 사도맹의 고위 간부들이 회의를 하던 중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용천관과 고위 간부들은 크게 분노했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감히 나를 능멸해!”

“맹주님! 놈들을 이대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당장 놈들에게 죗값을 받아내야 합니다!”

백골존자가 신비세력의 주구가 확실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도맹이 분노했다. 용천관과 사도맹 무인들은 신비세력에게 이용물로 농락당한 것에 치를 떨었다.

보고를 마친 청운은 냉막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이들이 조금만 더 일찍 손을 썼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사도맹 역시 책임이 없다 할 수 없었다.

청운이 백골존자와 그를 따르던 자들을 제거한 일이 알려지자 사도맹이 술렁거렸다.

백골존자가 누구인가?

비록 사령회에 속한 장로지만 사도맹에서 그의 입지는 결코 작지 않았다.

화경에 이른 고수가 흔한 것도 아니고 그를 따르는 무리가 제법 될 만큼 인지도도 높은 자였다.

“자네 들었나?”

“진무사 이야기라면 이미 들었네.”

“대단하지 않은가? 홀로 백골존자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제거하다니.”

두 명만 모이면 청운 이야기를 하기 바빴다.

“맹주님과 겨루어서 비겼다더니 사실인가 보군.”

“에끼 이 사람아. 아무리 그렇다고 약관이 조금 넘은 애송이를 어떻게 맹주님과 비교해?”

“이 친구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화경의 고수가 이끄는 수백 명을 제거했네. 솔직히 그 정도 고수가 우리 사도맹에 몇 명이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끄응,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혼자는 아니었을 거야.”

“하긴, 그건 또 그래.”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지만 사도맹에 속한 사파 고수들의 입에 청운이라는 존재가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누구도 모르는 사이 청운이 사파인의 가슴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 용천관은 청운을 찾아갔다. 청운에게 물어볼 것이 몇 가지 있었다.

그런데 이청운이 머물고 있는 천막이 비어 있었다.

“이청운은 어디 갔느냐?”

“바람 좀 쐬신다며 월담곡으로 나가셨습니다.”

용천관의 물음에 한 사내가 대답했다.

월담곡은 임시 거점 옆에 있는 계곡 호수다. 달빛을 담을 만큼 시리도록 맑은 계곡물은 알려지지 않은 절경이다.

용천관은 이내 청운이 갔다는 월담곡으로 향했다.

휘영청 밝은 달이 고고하게 떠서 대지를 은은하게 적셨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에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청운은 호숫가에 비춘 산세와 달빛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후두두둑.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용천관이 오 장 정도 떨어진 곳에 내려섰다.

용천관은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이 내려선 것을 알 텐데도 청운이 목에 걸린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감상에 빠져 있었다.

‘평상시에는 싸우지 못해 안달 난 놈 같은데, 저러고 있으니 조금 학사 같군.’

막 청운을 부르려던 그는 달빛에 비친 목걸이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목걸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밤이라 하나 달빛이 제법 밝았다. 게다가 그와 같은 고수에게 이 정도의 어둠은 대낮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용천관은 미간을 좁히고 기억을 더듬었다.

청운이 만지작거리고 있는 작은 목걸이가 눈에 익었다.

“자네. 그 목걸이 무언가?”

그제야 청운이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의 유품입니다.”

청운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지만 용천관이 나타나기 전부터 그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용천관은 청운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흠, 어머니의 유품이라고?”

“예,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물려주신 유일한 물건이지요.”

“아! 그래서 청승을 떨고 있었군. 그런데 잠시 좀 볼 수 있을까?”

용천관은 손을 내밀었다. 청운은 그런 용천관을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시는지요?”

“눈에 익어서 그러니까 잠시 줘 보게.”

“저잣거리에 나가면 흔해 빠진 물건입니다.”

청운은 맛있는 음식을 숨기듯이 목걸이를 옷 속으로 감췄다.

용천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잠시 보자니까. 그걸 다시 넣나?”

“누구에게 보여줄 만한 물건이 아닙니다.”

“에잉, 비싸게 굴기는.”

용천관은 입맛을 다시며 손을 거두어들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뭔지 모를 미련이 남아 있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 아니어야만 해.’

용천관은 무언가를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신의 생각이 기우이기를 바랐다.

용천관이야 무슨 생각을 하든, 청운은 시선을 다시 담수호로 돌렸다.

용천관은 잠시 청운의 옆모습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는 신혈교와 노룡회의 배후세력이 강호일통을 노리는 거라 생각하나?”

청운은 고개를 돌려서 용천관을 보며 말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닐 겁니다.”

“끝이 아니다? 그럼 천하를?”

용천관의 눈이 커졌다.

반면 청운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수백 년 동안 암중에 숨어 있던 자들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전에도 다른 이름을 내세워서 강호에 나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으으음.”

“그런데 이번에는 작정을 한 것 같습니다.”

혈룡단이라는 희대의 물건이 만들어졌다. 전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보유한 만큼 웅크리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청운은 혈룡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사도맹이 그걸 알게 되면 엉뚱한 욕심을 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들을 무너뜨리지 못하면, 무림맹이든 사도맹이든 모두 그들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겁니다.”

“그럴 순 없지.”

냉랭히 말한 용천관은 고개를 쳐들었다.

“음험하게 숨어서 남의 뒤통수나 치려는 자들에게 강호를 넘겨줄 수는 없네. 사실 내가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여 무림맹과 손잡은 것도 그 때문이야. 아무리 우리가 마도사파라 해도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은 지키거든.”

사도맹이라 해서 사파의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악기로 뭉쳐서 인간의 본질을 벗어난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사도맹에서도 소외시킨다.

과거 혈교나 만악방 같은 곳이 그런 세력이었다. 오직 피와 악만 추구하던 자들. 그것을 당연시하던 자들.

사도맹은 그들을 배제했기 때문에 정파의 위선에 질린 자들의 호응을 받아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네가 우리 사도맹을 악의 무리로 보지 않았으면 싶네. 비록 정의나 협의를 행하지는 않지만, 손을 쓸 때 자비심이 없어 살귀로 불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려고 하거든.”

청운은 용천관을 새삼스런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사도맹이 마도사파의 힘을 결집시킨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마도사파의 행위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솔직한 면은 마음에 들더군요.”

“하긴 우리가 솔직한 면이 있긴 하지.”

용천관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돌렸다.

“낮에 연락이 왔네. 자네 말대로 무림맹은 출발했다고 하더군.”

“…….”

“우리도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이니, 늦지 않게 쉬도록 하게.”

용천관은 할 말 다했다는 듯 휭하니 돌아섰다.

이청운을 떠보려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앞으로 옆구리를 맡겨놓고 함께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 아닌가.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많은 걸 볼 필요도 없었다. 달빛에 비친 흔들림 없는 눈빛만으로도 놈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제법 마음에 든단 말이야. 조금만 고분고분하면 좋겠는데…….’

용천관이 떠나고 잠시 후, 가만히 서서 담수호를 보던 청운이 고개를 들었다.

근주자(近朱者)는 적(赤)이고, 근묵자(近墨者)는 흑(黑)이라, 인주를 가까이 하면 붉게 되고, 먹을 가까이하면 검게 된다 했다.

착한 사람과 사귀면 착해지고 악한 사람과 사귀면 악해진다는 옛 말씀을 인주와 묵에 빗댄 것이다.

강호무림에서 생활하다 보니 자신도 어느새 무림인이 다 된 듯했다.

붓을 들어야 할 학사가 검을 든 무인이 된 셈.

후회는 하지 않았다.

어쩌면 권력을 탐하는 관리들의 더러운 꼴을 보는 것보다, 검을 드는 게 자신에게 더 잘 맞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번 일만큼은 철저히 무인으로서 일을 처리하자.’

나름대로 갈 길을 정한 청운은 호수를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드디어 사도맹의 무인들이 임시 거점을 나섰다. 동시에 사방으로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소식을 접한 신혈교는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놈들이 이곳을 향해서 다가온단 말이지?”

“그렇다 하옵니다.”

열두 개의 붉은 기둥이 바치고 있는 대전에 서 있던 혈마의 강인한 턱이 실룩였다.

무림맹과 사도맹의 연합은 익히 알고 있었다.

나름대로 놈들을 맞이할 준비도 해놓은 터였다.

“진무사란 놈을 습격한 일은 어찌 되었느냐?”

“송구하옵게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뭐야? 흑야의 도움을 받고도 실패했다고?”

혈마의 한쪽 눈이 실룩였다.

“병신 같은 흑야 놈들 같으니라고.”

신혈사의 도움까지 끌어내서 청운을 공격했다. 그런데도 관리 하나 제거하지 못하다니, 기가 찼다.

혈마는 으르렁거리듯이 부하들에게 물었다.

“놈들이 뭐라 하더냐?”

“진무사의 무공이 생각보다 뛰어났다고 합니다.”

“방심했단 말이냐? 내가 그리 주의를 줬는데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진무사가 무공을 숨기고 있었다고 합니다.”

부복한 사내는 생존자가 보내온 상황을 죽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혈마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놈이 그렇게 강하단 말이지?”

사실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혈마는 차가운 눈으로 부하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진무사에 관한 등급을 최상으로 올려라. 총교에도 그리 보고하고.”

“예, 그리 조치하겠습니다.”

천황교는 자신들의 대업에 방해되는 인물에게 등급을 매겼다.

지금까지 최상급의 등급으로 지정된 사람은 다섯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진무사 이청운이 더해졌으니 여섯 명이 되었다.

“총교에 연락을 넣고, 노룡회에도 저들의 움직임에 대해서 알려라.”

“존명!”

사내가 이마를 바닥에 처박으며 대답했다.

혈마는 이를 갈았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놈은 대업에 큰 영향을 끼칠 놈이 분명했다.

“손님 맞을 준비는 잘되어 가나?”

“예, 이미 함정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아! 이번에야말로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어!”

* * *

사도맹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 수십 명 단위로 이동하거나 마차같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동수단을 이용하며 북상했다.

어차피 신혈교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북상을 시작한 지 하루 만에 선발대가 공격을 받았다.

소식을 전해 들은 용천관은 분노를 터트렸다.

“뭐? 선발대가 습격을 받았다고?”

“예, 무공(武功)을 거쳐서 예천(禮泉)으로 들어서던 중 습격을 받고 뒤로 물러섰다 합니다.”

“피해는?”

“백여 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합니다.”

“빌어먹을 놈들! 정말 끝까지 해보자 이거지?”

솔직히 사도맹과 무림맹이 연합해서 공격한다고 하면 도망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면 놈들을 추적해서 누가 더 놈들을 많이 잡는지 무림맹과 내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놈들이 도망가기는커녕 처음부터 공격적으로 나온 것이다.

“놈들을 철저히 말살시킨다! 속도를 더 내라고 해!”

“예, 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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