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191화
화강암으로 이뤄진 커다란 열두 개의 기둥이 바치고 있는 대전은 냉랭한 한기가 흐르고 있었다.
조금 전 들어온 급보로 인해서 숨소리마저 잦아들었다.
천황교 교주인 천황은 중앙 태사의에 거만하게 앉아서 손에 쥔 두루마리를 읽고 또 읽었다.
얼굴을 가린 천 사이로 보이는 눈매가 점점 좁혀지며 날카로워졌다.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으음.”
떨어질 것 같지 않던 그의 시선이 보고서에서 떨어졌다. 무심한 눈빛으로 오체투지 하고 있는 열두 명의 사도를 보았다.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인물이 없었다. 당장 손 한번 휘저으면 머리통이 날아갈 만큼 약한 자들이다.
손이 근질거렸다. 예전 갔으면 당장 머리통을 날려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혈룡단으로 인해서 무공이 한 단계 발전했다. 덕분에 충동적으로 부하들을 죽이는 일은 어느 정도 자제가 되었다.
천황은 짜증이 일었지만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이 보고서가 사실이냐?”
음부에서 올라오는 귀곡성 같은 소리에 이마를 바닥에 대고 있던 사내들이 한차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보고서에는 무림맹과 사도맹의 동맹에 관한 내용과 첩자로 심어 두었던 자들이 발각되어 제거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예전 같으면 누구 하나 머리통이 날아갔을 보고서였다.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앞쪽에 엎드려 있던 사내가 살짝 고개를 들며 대표로 입을 열었다.
“예! 그, 그러하옵니다.”
“흠, 우리의 정체를 놈들에게 들켰단 말이지?”
“소, 송구스럽게도 그러하옵니다.”
오랜 세월을 숨어 지냈다. 누군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자들도 있었겠지만 실체를 들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중원에서 정파를 담당하던 노룡회가 발각되고, 연이어 사파를 맡고 있던 신혈교마저 정체가 탄로 났다.
이대로라면 황실에 숨어든 자들과 마교, 그리고 세외에 숨어든 교도들이 발각되지 말란 법도 없었다.
천황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대답을 한 사내에게 말했다.
“무엇이 문제인가? 진무사라는 애송이가 문제인가?”
“예, 이 모든 일이 이청운과 엮이면서 시작되었사옵니다.”
천황의 시선이 보고서로 향했다. 그는 한 부분을 다시 읽어 내리더니 미간을 찡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송구하옵니다.”
천황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상체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이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자네 생각은 어때?”
“아무리 큰 항아리도 물이 차면 넘치게 되어 있지요. 하늘도 저희가 세상에 나가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언제 나타났는지 태사의 옆에 한 사내가 유령처럼 나타나 있었다. 천황교의 이인자이며 쌍뇌선생으로 불리는 야율극이었다.
천황은 힐끔 쌍뇌를 보며 물었다.
“전면전이 될지도 모르네. 그래도 괜찮을까? 얼마 전에는 안 된다고 말렸던 것으로 아네만?”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다르다? 혈룡단 때문에?”
“예, 혈룡단으로 인해서 교의 힘이 배는 더 강해졌습니다. 무림에 기인이사가 많다지만, 저희에게는 그들을 압도할 힘이 있습니다.”
수백 년간 무림을 전복할 기회는 많았다. 그때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은거기인들 때문에 일이 번번이 틀어졌다.
한때는 무림에 숨어 있는 기인이사들을 파악하고 그들을 암살하기도 했다. 그렇게 준비를 철저히 마치고 무림에 등장했건만 어디서 또 다른 놈들이 튀어나와서 방해를 했다.
게다가 빌어먹게도 자신들이 강해지는 만큼 무림도 강해졌다.
그렇게 흐른 세월이 삼백 년이다.
그런데 얼마 전 변수가 생겼다. 혈룡단이라는 변수 말이다.
천황은 오체투지 하고 있는 자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모두 쌍뇌의 말은 들었겠지? 슬슬 다시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대들 생각은 어떤가?”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수많은 교도들이 천황님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오랜 숙원을 드디어 풀 때가 되었습니다.”
부복한 자들이 하나같이 찬성했다.
천황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기분이 언짢았는데 이제야 스르르 풀리며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두 눈을 번들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좋다. 그대들이 원한다면 내 그리 해주지.”
천황은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그의 두 눈이 희번덕거렸다.
사내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두 눈에는 무언가 열망이 담겨 있었다.
모든 시선이 천황의 입으로 모였다. 그들의 희망을 배신하지 않고 천황의 입이 열렸다.
“노룡회와 신혈교에 전하라, 말살계를 시작하라고.”
“존명!”
쾅! 쾅! 쾅!
열두 사내가 일제히 바닥에 이마를 찢으며 기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힘이 있어도 숨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못했던 인고의 세월은 이제 끝이다. 무림에 나가 그동안 쌓인 울분을 마음껏 발산할 것이다.
* * *
무림맹과 사도맹의 중재자로 선택된 청운은 함께 움직일 인원을 뽑았다.
고위직은 필요 없었다. 있어봐야 지시를 안 듣고 말썽만 피울 테니까.
많은 인원도 필요 없었다. 그저 자신의 손발이 되어서 필요할 때 제대로 움직여주면 되었다.
모두 열 명. 무림대회에서 눈 여겨 봤던 자들로 뽑았다.
기재는 뛰어나지만 가진 것이 없어서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자,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자, 그리고 이기적이지 않고 아집이 없는 자.
무림대회에서 육십사강에는 들었던 사람들이었다.
제갈신기는 처음에만 해도 의아해했지만, 곧 청운의 뜻을 간파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청운이 뽑은 자들 중에는 구대문파나 십대세가 사람이 없었다.
무림맹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만으로 되겠나? 사도맹과 중요한 일을 논하려면 고위 간부가 한 사람쯤 따라가는 게 나을 것 같네만.”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과연 저들과 원만하게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겠습니까?”
“흐음…….”
“아마 분란만 생길 가능성이 큽니다. 무림맹과 사도맹,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말할 테니까요. 어쩌면 죽이려 들지도 모르지요.”
제갈신기도 그 말에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조심하게.”
진심이 담긴 염려에 청운도 미소를 지었다.
섭섭하고 짜증 나는 상대는 무림맹이지 제갈신기가 아니었다. 아마 제갈신기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저도 무림맹과 사도맹 사이에 끼어서 죽고 싶진 않습니다.”
“언제 출발할 건가?”
“유시 초쯤 출발할 생각입니다.”
청운은 떠나기 전 영호천을 만났다.
“무림맹과의 연락을 그대가 맡아주어야겠어. 그리고 무림맹의 동태에 대해서도.”
영호천은 결코 가볍지 않은 임무라는 걸 알고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진무사.”
의외라면 혈황의 선택이었다.
청운은 영호천을 보낸 후 혈황을 보며 물었다.
<저와 함께 가시지 않을 겁니까?>
<나는 저놈 옆에 남겠다.>
<영호천이 꿀 발라 놨어요?>
<질투하지 마라. 저놈이 죽으면 나는 또 끈 떨어진 신세가 될지 모르거든.>
<질투를 왜 합니까? 영호천이 강해지면 저한테도 좋은 일인데.>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마도사파 놈들은 함부로 믿지 마라.>
<걱정 마세요. 저도 믿지 않으니까. 혈황 님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뭐야? 내가 어때서!>
<왜 열 내십니까? 솔직히 혈황 님도 평생 저와 함께 있을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영호천이 생기니까 은근슬쩍 저한테서 멀어진 거 아닙니까?>
<그거야…….>
<좌우간 영호천이나 강하게 만들어 놓으세요. 저 정도 실력으로는 객사하기 딱 좋으니까.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킁, 걱정 마라. 조금만 더 지나면 화경에 오를 수 있을 거다.>
* * *
청운은 자신이 뽑은 열 명의 무사만 데리고, 무림맹보다 한발 앞서 화산을 출발했다.
사도맹은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진령산맥의 한 커다란 장원에 도착해서 진을 친 상태였다. 어떻게 보면 무림맹 고수들이 모여 있는 화산파가 장안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청운 일행은 화산파를 출발한 지 이틀 만에 사도맹 무리와 합류했다.
사도맹 무사들은 달가워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청운이 진무사라 하나 무림맹의 대표로 온 사람 아닌가. 무림맹은 불과 며칠 전까지 서로의 심장에 검을 드리운 상대이니 곱지 않은 시선도 이해는 되었다.
‘무림맹과 사도맹의 싸움은 어쩌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어찌 보면 잠시 잠깐만이라도 손을 잡게 된 것이 기적이었다.
안내를 받아서 들어선 전각 안에는 수십에 이르는 마도사파 고수들이 늘어서 있었다.
사도맹주 용천관이 거만하게 앉아서 청운을 맞이했다.
청운이 그의 앞에 멈춰 서서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건넸다.
“맹주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보다 갔던 일은 잘되었나?”
“예, 덕분에 이렇게 제가 무림맹의 대표로 왔습니다.”
용천관의 시선이 청운 뒤편에 늘어선 십여 명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흠, 쓸 만한 아이들이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고위 간부 하나 없이 자네만 보내다니, 무림맹도 속이 좁군. 우리가 죽일 거라 생각했나?”
용천관이 슬쩍 비꼬았다.
청운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아쳤다.
“와봐야 말싸움만 할지 몰라서 제가 마다했습니다.”
“험, 말싸움은 무슨…….”
“말싸움이 아니면 칼을 들고 이야기하겠지요.”
“자넨 우리가 칼밖에 모르는 사람들인 줄 아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칼뿐만 아니라, 창도 있고…….”
“험!”
청운의 농담에 용천관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청운이 본론을 꺼냈다.
“무림맹은 이틀 전 화산을 출발했습니다. 사도맹도 이제는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준비는 끝났네. 무림맹에서 사람이 오기만 기다렸지. 자네가 올 줄은 몰랐네만.”
“언제 출발하실 생각이십니까?”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하세.”
“알겠습니다. 아! 저는 처리할 일이 하나 있어서 먼저 출발할까 합니다.”
“처리할 일?”
“백골존자를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골존자는 사령회의 장로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간의 조사 결과 석연치 않은 점이 발견되었다.
그는 사도맹주와 사령회주의 명령을 무시하고 정파 무사들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무림맹과 사도맹의 감정이 격화된다는 걸 알면서도.
가능성은 하나. 어쩌면 그도 신비세력과 연관이 있을지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감히 사도맹주의 명령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하긴, 뒤에 쓰레기를 남겨두고 가면 찜찜할 것 같군. 알아서 하게.”
* * *
청운은 동행한 사람 중 두 명에게 사도맹 측의 상황을 적은 서찰을 건네주었다.
청운을 따라온 사람들은 사도맹의 거처까지 오는 이틀 동안 청운의 무공강론을 들었다.
이십대 중반부터 삼십대 초반까지의 나이. 그들은 모두 중소문파의 제자였다.
절정의 상승무리를 접해보지 못했던 그들은 청운의 강론을 듣고 머리가 환하게 밝아진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만 해도 관리인 이청운과 함께 사도맹에 가는 걸 꺼려했지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열렬한 청운의 추종자가 되었다.
천하에 상승 무공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전수해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청운은 강호의 고수들이 알면 깜짝 놀랄 절기의 구결을 아낌없이 알려주었다.
덕분에 그들은 이제 청운의 말이라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대규모로 움직이는 만큼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거네. 이걸 천뇌 총군사께 전해주게.”
인월문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한 문파의 제자 연풍군과 비검문 제자 고설은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서찰을 받았다.
“예, 대인. 최대한 빨리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두 사람이 받은 서찰은 내용이 같았다. 만약의 상황을 생각해서 같은 서찰을 적어주었으니 한 사람만 제대로 도착해도 되었다.
“조심하게.”
전령을 제갈신기에게 보낸 청운은 백골존자를 처리하기 위해 사도맹이 머무는 장원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날이 어스름해져 있었다. 백골존자를 처리하고 사도맹에 합류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았을 때였다.
“에휴.”
그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쪽 숲을 바라본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소저, 그만 나오시오.”
부스럭.
청운의 두 눈에 묘령의 여인이 숲에서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백청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