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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마존-190화 (190/257)

# 190

190화

요희는 정신이 없었다.

부하들이 목숨을 던진 대가로 살아났지만 추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부하들의 복수를 해줘야 한다.

‘진무사!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살을 잘라 소금에 절여서 두고두고 씹어 먹겠다!’

그녀가 이를 갈며 숲속을 빠르게 지나칠 때였다.

저 앞, 어둠 속에 서 있는 자가 보였다. 옷차림을 보니 사내였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요희의 두 눈이 커졌다.

“이제 오나?”

사내가 말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도망치는 와중에 적이 나타났건만 요희의 얼굴에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기쁨이 번졌다.

사내 역시 요희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살가운 모습이었다.

요희는 사내 곁에 내려서며 입을 열었다.

“공자, 진무사가 쫓아오고 있어요.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해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예?”

사내의 말에 요희의 얼굴에 의혹이 드리웠다.

“설마 둘이서 진무사를 죽이잔 말인가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사내의 대답에 요희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내 입술을 깨물며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좋아요. 공자님께서 도와주신다면 못할 것도 없지요.”

차라리 잘된 일이다.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었다. 사사건건 자신의 앞을 막은 놈 아닌가.

무엇보다도 광존의 멋진 물건을 반 토막으로 싹둑 잘라버린 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사내가 요희가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 한 발 다가서며 말했다.

“예전에는 안 그랬다고 하더니 노룡회가 많이 약해졌어.”

“그건 회주가 공석이라서 그래요. 이번 일도 두세 명만 함께 움직였다면 충분히 무림맹을 절단 낼 수 있었을 거예요.”

“훗, 돌아가면 노야라는 임시회주를 바꿔야겠군. 혹, 관심 있나?”

사내가 요희 곁에 서서 말했다. 그의 말에 요희의 두 눈이 살짝 커지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소첩이 회주라니요. 가당치도 않은 말씀이세요.”

“아니야. 내가 볼 때는 충분한 것 같은데.”

“호호호. 묘수선생이 계신데 제가 회주가 되면 반발이 심할 거예요.”

묘수선생이 만든 혈룡단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요희 역시 차기 노룡회주로 묘수선생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묘수선생에게 줄을 대고 있는 중이었다.

“상관있나? 어차피 천황께서 임명하면 되는 것인데.”

“그래도…….”

요희는 사내의 말에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싫지 않은 제안이었다. 노룡회주만 된다면 중원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주인이나 마찬가지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가 눈앞에 있었다.

‘그래, 공자님만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못 할 것도 없지.’

요희의 얼굴이 환해졌다. 도주 때문에 힘들었던 표정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렇다고 덥석 물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요희가 대답을 못하고 머리를 굴릴 때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부담스럽나?”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단지, 공자님께서 제게 영광된 제안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요.”

요희는 한발 살짝 물러섰다.

사내는 그녀의 행동에 반대편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그녀는 사내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네가 마음에 들어서야. 이왕이면 냄새나는 늙은이들보다 상큼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좋지 않을까?”

“아! 호호호.”

사내의 말에 요희는 요사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그녀는 사내 곁으로 다가가더니 그의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고 위아래로 쓸어내리며 콧소리를 냈다.

“아응, 공자님만 좋다면 소첩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어요.”

요희는 사내의 가슴을 두 손으로 쓸며 살짝 턱을 쳐들고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갈구하는 모습. 그녀의 두 눈에 묘한 흥분이 담겼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애인인 광존과 사내를 비교해보았다.

‘좋아. 반토막 난 그 새끼보다는 천 공자가 훨씬 더……. 헉!’

푹!

요희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왜에?”

“왜라니?”

사내의 입에서 만년빙설 같은 차가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요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눈을 아래로 내렸다.

자신의 배에 비수가 박혀 있었다.

검붉은 피가 옷자락을 적시며 번졌다.

주춤.

요희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여전히 그녀의 단전에는 비수가 꽂혀 있었다.

요희는 단검의 손잡이와 사내의 얼굴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나를…… 왜?”

요희는 서 있기도 힘든지 다리가 부르르 떨리며 조금씩 주저앉았다. 단검을 통해서 밀려든 기운이 혈맥을 터트려서 서 있을 힘도 남지 않았다.

사내는 무심한 눈길로 요희를 보며 말했다.

“천황교의 영광을 위해서 네년의 냄새나는 몸뚱이가 필요할 뿐이야.”

“그, 그게 무슨?”

“설마 내가 네년하고 붙어먹을 줄 알았더냐? 더러운 년 같으니라고.”

사내의 말이 비수가 되어 요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요희의 두 눈이 파르르 떨리고, 붉은 안광이 모이기 시작했다.

“서, 설마 나를 버리겠다고? 천황교에 모든 것을 바친 나를?”

“그 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천황교의 대의를 위해서 영혼까지 바치면 좋지 않겠느냐?”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말하는 사내의 얼굴이 요희의 두 눈에 가득 담겼다.

그제야 요희는 사내의 목적을 깨달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를… 제물로… 무림맹에서… 입지를 올리려고…?”

“호오, 역시 여우가 따로 없다고 하더니 잘 알고 있군.”

“호…호호호….”

요희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미친년처럼 크게 웃었다. 요사스러운 그녀의 웃음소리에 사내는 미간을 좁혔다.

‘단전이 파괴되고 혈맥이 터졌는데도 아직 기운이 남아 있다니…….’

요희에게서 요사스러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기세가 사뭇 대단해서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 물러섰다.

미친년처럼 웃던 요희가 웃음을 뚝 그치고는, 단전에 박힌 단검을 잡고 쑥 뽑았다.

피분수가 훅 하고 뿜어졌지만 금세 멈췄다.

그녀가 야차같이 싸늘한 눈초리로 사내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천일영, 네놈은 실수한 거야. 나를 버린 것을 언젠가 후회하게 될 것이다.”

잠력을 모조리 끌어올린 요희는 사내를 향해서 뛰어들었다.

사내는 요희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푸캉!

방어를 도외시한 요희의 등귀어진 수법이 연달아 펼쳐졌다. 사내는 연신 물러서며 그녀를 희롱했다.

“네가 아무리 소리 질러도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한다. 내가 소리를 차단시켰거든.”

“이놈!”

요희는 사내가 자신을 바로 죽이지 않는 이유를 알고 허탈감마저 들었다.

사내는 자신의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자들이 보는 앞에서 죽이기 위해.

절로 이가 갈렸다.

그때 누구가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이청운?’

그 순간, 피하기만 하던 사내의 기세가 바뀌었다.

입가에는 차갑고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사내의 몸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아래로 내리고 있던 검이 솟구쳤다.

스캉! 서걱!

검이 지나간 허공에 점점이 붉은 선이 그어졌다. 공간이 쩍 하고 갈라졌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요희의 몸이 허리 부분에서 비틀리며 둘로 어긋났다.

철퍼덕 소리와 함께 요희의 몸이 둘로 분리되어 나뒹굴었다.

부릅뜬 그녀의 두 눈엔 억울함과 원독이 가득했다.

부릅뜬 요희의 눈동자가 천일영을 향했다.

“후회할…….”

툭.

살짝 들렸던 머리가 떨어지며 요희가 절명했다.

‘흥, 미천한 것. 제물로 잘 쓰도록 하마.”

사내는 죽은 요희를 보며 조소를 지었다.

그 직후, 청운이 날듯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청운은 검을 들고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달빛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현무단주 천일영이었다.

‘천일영이 요희를 혼자서 처리했다고?’

순간 의문이 들었다. 본 모습을 드러낸 요희의 경지는 화경에 오른 고수였다. 자신이 아는 천일영이 상대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사내, 천일영은 청운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지는 것을 보고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진무사, 어서 오시오. 다행히 문희가 내상을 입고 있어서 잡을 수 있었소. 아마도 진무사와 싸울 때 내상을 입은 모양이오.”

그리 생각하면 천일영이 요희를 잡은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요희는 자신과 싸우다가 도망쳤지 않은가 말이다.

“고생했습니다. 그녀를 생포했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그 점이 아쉽긴 하지만, 놓치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요.”

“저도 사로잡으려 했지만 문희의 무공이 강해서 쉽지 않았소이다.”

청운은 요희의 토막 난 시신을 바라보았다.

뭔가 찝찝한 점이 없진 않았지만, 따지고 들 만큼 명확하지가 않았다.

* * *

아침이 되자, 전날 밤 있었던 사건이 화산 일대 정파 무림인들에게도 알려졌다.

정파의 무인들은 둘만 모였다 하면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히 섭혼술로 이지를 상실했던 고수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여기저기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섭혼술에 당했던 무인들은 어찌 된다고 하던가?”

“그것 때문에 연일 회의가 벌어지고 있다고 하더군.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어.”

“골치 아프겠군. 그들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참으로 죽일 놈들이네. 멀쩡한 사람들을 그리 만들다니.”

적의 간자로 취급하기에는 너무도 다양한 문파와 가문의 제자들이 엮여 있었다. 섭혼술에서 깨어난 이들은 하나같이 억울하다며 외쳤지만 그들 때문에 죽은 무인들이 너무 많았다.

이대로 죄를 덥고 가기에는 문제가 많았기에 무림맹 인사들은 고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의견은 그들을 용서하고 신비세력과의 싸움에서 선봉에 내세우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 와중에 청운과 천일영의 활약에 대한 소문도 퍼졌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천일영에 대해서 새롭게 평가했다. 진무사 이청운이 놓친 요희를 천일영이 잡은 것이다.

오룡과 오봉 외에 새로운 영웅이 탄생했다.

“이번에 진무사와 오룡이 날아다녔다는군.”

“자네는 늦게 와서 보지 못했나 보군. 나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어서 볼 수 있었는데 정말 장관이었네. 자네 용 본 적 있나? 진무사가 검을 떨치면 용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네.”

“백가장의 백청청 아가씨도 나중에 나타나서 실력 발휘를 했는데, 대단했다고 하더군.”

“아이쿠. 말도 말게. 그 아가씨가 장법을 펼치니까 글쎄 집채만 한 손바닥이 나타나서 섭혼술에 걸린 자들을 파리 잡듯이 탁탁 잡았다니까.”

“크흐! 그 좋은 구경을 못하다니.”

“좌우간 신비세력 놈들이 이렇게 깊숙이 들어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그러게 말이야. 이제야 왜 그놈들을 쳐야 하는지 이해가 가는군.”

간자 색출 사건이 몰고 온 파장은 작지 않았다.

특히 정파 무림인들의 신비세력에 대한 적대감이 한껏 높아진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출동을 앞두고 장로회의에서 의외의 결정이 내려졌다.

회의의 안건 중 사도맹과의 소통을 위한 방법을 논의할 때였다.

장로 하나가 말했다.

“지금 사도맹과 가장 잘 통하는 사람은 진무사입니다. 그러니 진무사에게 사람을 몇 붙여주고 사도맹에 가달라고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장로와 간부들 대부분이 그 의견에 찬성했다.

게다가 마땅히 반대할 명분이 없어서 제갈신기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씁쓸한 일이지만, 그가 생각해도 사도맹에 가서 양측의 의견을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은 이청운밖에 없었다.

제갈신기에게 회의 결과를 전해들은 청운은 미간을 좁혔다.

“저보고 사도맹으로 가라고요?”

제갈신기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싫다면 말하게. 다른 사람을 보낼 수 있도록 해보겠네.”

싫을 건 없었다. 차라리 답답한 정파 무인들을 대하는 것보다는 마도사파의 무사들과 이야기하는 게 편할지도 몰랐다.

말이 통하지 않을 경우에는 힘으로 해결하면 되니까.

다만 정파 장로와 간부들이 자신을 보내려는 이유를 알기에 짜증이 날 뿐이었다.

‘그래, 내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절이 떠날 수는 없다고 하지 않던가.’

결정을 내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그런데 함께 갈 사람을 제가 뽑아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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