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187화
줄다리기 같은 회의가 벌어졌다.
큰 줄기는 간단했다.
<신비세력을 제거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동맹을 맺는다.>
사도맹주와 무림맹주가 눈을 부라리며 손 한번 잡고 악수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외적인 실무는 달랐다. 사뇌와 천뇌를 비롯한 양측의 군사들이 피 말리는 합의를 진행했다.
정예의 숫자부터 진격로, 그들을 지원할 물자까지 합의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게다가 승리했을 때의 전리품 분배 방법이나 세력에 관한 사항까지 양보란 있을 수 없었다.
이틀째 되던 날도 양측 군사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핏대를 세웠다.
“그걸 말씀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쪽 길로 가면 한나절은 더 걸릴 거요.”
“아니면 놈들의 눈을 속이고 목적지까지 갈 방법이 있습니까?”
“속이고 갈 것 뭐 있단 말이오? 나오는 놈들은 족족 모가지를 따버리면 되지.”
“그렇게 쉬운 놈들이면 우리가 왜 이리 고민한단 말이오? 놈들의 이목을 숨길 수 있을 때까지는 숨겨야 합니다.”
“어차피 따로 갈 것이니 무림맹은 그렇게 하시구려. 우린 놈들의 목을 모조리 따면서 직진으로 달려갈 테니까.”
무림맹의 군사들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사도맹 쪽이 피해를 감수하겠다면 막을 이유도 없었다.
“그건 좋을 대로 하시오. 단, 놈들의 총단을 공격할 때는 시간을 맞춰야만 하오.”
“우리는 걱정 말고 그쪽이나 제때 오시오. 설마 놈들과 마주치면 겁먹고 내빼는 건 아니겠지요?”
“뭐요?”
“자자,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다음 안건이나 논의합시다.”
양측의 대화는 시시때때로 충돌했다.
그러면서도 하나하나 합의를 보았다.
어차피 회의로 날려버릴 시간이 없었다.
본진이 도착하면 곧바로 신혈교의 총단을 향해 진격해야만 한다.
* * *
무림맹과 사도맹이 동맹 소식은 노룡회에도 전해졌다.
그들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장안에서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노룡회는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노룡회의 임시 의장인 노야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갑작스럽게 모이라 해서 미안하오. 무림맹과 사도맹이 신혈교를 공격하기 위해 동맹을 맺고 있다 하오.”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밀실에 모인 십여 명의 노룡회 간부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이제야 소식이 전해지다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가 심어놓은 자들이 한둘이 아니거늘, 그동안 몰랐다는 게 말이 됩니까?”
회의에 참석한 노룡회 간부들은 화들짝 놀라서 수뇌부에 불만을 터트렸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닷새나 늦은 정보였다. 목숨이 오가도 수십 번은 오갔을 시간이었다.
노야는 분통을 터트리는 이들을 달랬다.
“무림맹에 심어 놓은 사람들이 대부분 연락이 끊어졌소이다.”
화를 내던 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잡히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현재로선 그리 의심할 수밖에 없소이다.”
“허면 어찌하실 생각이시오?”
“그나마 다행히도 사도맹 쪽에 심어 놓은 자들은 무사한 것 같소이다. 이번 연락도 그쪽에서 온 것이오.”
“으음, 어쨌든 무림맹과 사도맹이 손을 잡다니. 의외가 아닐 수 없군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네. 서로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던 놈들이 손을 잡다니.”
“아무래도 진무사 이청운이 중간에서 놈들의 동맹을 주선한 것 같네.”
“그 죽일 놈이……!”
그때 탁자 끝에 앉아 있던 중년인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흥, 모두가 임시회주의 능력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군요.”
무언가 말을 하려던 노야는 무겁게 입을 닫았다.
그 역시 자신이 임시회주가 된 후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상대의 말을 순순히 인정할 마음도 없었다.
노야는 싸늘하게 변한 간부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후를 위해서라도 천둥벌거숭이 같은 진무사를 제거해야 할 것 같소.”
그 말에 대해서만큼은 모두가 동의했다.
“진즉 죽였어야 했습니다.”
“황궁에 심어 놓은 자들은 뭐하고 있답니까? 그놈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당장 사람을 보내서 놈의 목을 땁시다.”
노룡회 간부들이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노야도 그러고 싶었다. 눈앞에 있다면 사지를 찢어서 죽이고 싶었다.
그때 묘수선생이 입을 열었다.
“일이 이렇게 된 걸 아시면 천존께서 진노하실 것입니다.”
“끄응.”
“에잉.”
천존이라는 말에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들에게 천존은 동경의 대상임과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천존의 성정상 그냥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노야 역시 걱정이 되는지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말했다.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놈부터 죽일 거요.”
“혹시 무림맹의 장로원에 숨어든 사람도 어떻게 된 것 아닙니까?”
묘수선생이 다시 의견을 말했다.
혈룡단을 제조가 성공한 뒤로 그의 입지는 노룡회뿐만 아니라 신비세력 전체에서 탄탄해졌다. 그 덕에 다들 무공실력이 일취월장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묘수선생의 말에 노야는 한쪽 눈을 실룩이며 대답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몸을 사리고 있을지도 모르오. 그 친구가 원래 겁이 많은 친구지 않소.”
“과연 그럴까요?”
“무슨 뜻이오?”
노야는 불편한 심기를 담아서 묘수선생에게 질문했다. 자신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묘수선생이 마뜩찮았다.
묘수선생은 한쪽 눈을 살짝 좁히며 비릿한 음성으로 비꼬듯이 말을 했다.
“그도 들켰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 일은 없을 것이오. 다른 자들이면 몰라도 그는 완벽하게 무림맹에 동화된 인물이오.”
“아아, 그렇게 화를 낼 일은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보내서 확인을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끄응. 좋소. 선생 말대로 사람을 보내서 그에게 연락을 취해보겠소.”
노야가 한발 물러섰다.
그는 눈매를 좁히며 이를 악물었다. 도전적인 묘수선생을 당장 쳐내고 싶었지만 혈룡단 때문에 그를 따르는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자칫 역풍을 맞을 수도 있기에 불편해도 참아야 했다.
그런 노야의 반응에 묘수선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노룡회의 임시 의장인 노야가 고개를 숙였다. 다른 이들도 자신을 거스르려고 하지 않는다.
‘좋았어. 조만간 화룡단 일로 포상이 있을 거라 했으니 어쩌면 내가 노룡회의 정식 의장이 될 수도 있겠지.’
노룡회주 자리는 현재 공석이다. 지금처럼 임시 회주를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노야에게 계속 맡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가 임시 회주가 된 후 천황교 내의 여러 단체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노룡회가 약해지지 않았는가 말이다.
묘수선생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물었다.
“그런데 요희가 요즘 안 보이는군요. 노야, 요희는 어디 가서 안 보이는 것입니까?”
“현재 무림맹에서 활동하고 있소. 무림맹이 우왕좌왕하는 것도 사실 그녀 작품이오.”
“아! 과연 여우는 여우군요. 하하하.”
묘수선생은 크게 웃었다. 그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는 자도 있었지만 동조하는 자도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여럿 당했겠군.”
“엉덩이 무거운 그녀가 나서다니, 혹시 그 일 때문에 나섰나? 끌끌.”
“하하하. 하긴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의 거시기가 반 토막이 났으니 단단히 화가 났겠지요.”
그녀의 정부라고 알려진 광존의 물건이 잘렸다. 이 때문에 그녀가 청운을 똑같이 만들어 주겠다며 길길이 날뛰었었다.
무림맹에 들어갔다면 복수를 위한 것이 분명했다.
간부들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광존을 떠올리며 희희낙락거렸다.
* * *
한 마리 검은 비둘기가 깊은 산중에 자리한 거대한 장원에 날아들었다.
장원은 계곡 안쪽에 은밀하게 지어져 있어서 계곡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전서구를 양손에 쥔 사내가 서둘러 커다란 대전으로 달려갔다.
열두 개의 붉은 바위 기둥이 받치고 있는 대전의 끝에 덩치가 큰 장한이 서 있었다. 바위마저 씹어 먹을 정도로 강인한 턱을 지닌 장한이었다.
사내는 양손으로 비둘기 다리에 걸려 있던 전서를 건넸다.
장한은 무심한 눈길로 전서를 펼쳐서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쯧쯧. 차려준 밥상도 못 먹다니. 노룡회도 다되었군.”
중저음의 걸걸한 목소리는 호랑이의 으르렁거림처럼 주위를 압도했다.
장한은 전서를 가져온 사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도맹 흑접에게 연락해서, 지원을 할 것이니 이번 기회에 놈을 꼭 제거하라고 일러라.”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신혈사에게 도와주라고 해.”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사내는 읍을 하며 물러났다.
장한은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내 허공에 대고 말했다.
“있나?”
“말씀하십시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스르르 검은 형체가 나타났다.
온몸을 검은색 야행복으로 감싼 자였다. 복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장한은 복면인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나서줘야겠어.”
“저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닙니다.”
“흥! 이미 노룡회 쪽에 파견된 흑야가 괴멸당했다던데. 그냥 구경만 하겠다는 건가?”
복면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나 복면을 쓰고 있어서 그의 표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장한은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화가 나지 않나? 이번에 우리와 함께 놈을 제거하는 게 어떤가?”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니오.”
“크크크. 흑야가 겁이 많아졌어. 하긴, 백가장이 강호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몸을 사릴 만도 하겠지.”
“혈마! 말씀 가려서 하시오.”
흑의 복면인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부르르 떨렸다.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혈마라 불린 장한은 이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그렇게 백가장이 무섭나? 아니지 아니야. 백가장이 아니라 백가장에 숨어 있는 백야가 무섭겠지.”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흑야가 마음만 먹으면 신혈교는 지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소.”
“크하하하하. 잘 알고 있지. 흑야의 무서움을 말이야. 그런 대단한 흑야가 백야를 두려워하다니, 우습지 않나?”
혈마의 조롱에 복면인은 입을 닫았다.
복면인을 마음껏 조롱한 혈마는 두 눈에 혈광을 뿜어내며 다그치듯이 말했다.
“언제까지 꼬리를 말 것인가? 어차피 백가장 놈들과 백야를 처리해야 할 것 아니야?”
“하지만…….”
“갈!”
우르르르릉!
혈마의 사자후에 거대한 대전이 심하게 흔들렸다.
흑의 복면인은 이를 악물며 혈마를 노려보았다.
“변명은 필요 없다. 노룡회와 함께 놈들을 쓸어버릴 계획이니, 따르지 않을 것이면 교로 돌아가라. 도움도 되지 않는 자들과 함께하고 싶지 않으니.”
최후의 통첩을 하듯이 혈마가 말했다. 복면인은 이를 악물었다.
“일단은 알겠소이다. 확답은 못 하지만… 대답은 그곳에서 하지요.”
대답을 마친 흑의 복면인이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허공을 향해서 혈마가 이를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크크. 잘 생각해야 할 거야. 그래야 그대들의 적인 백야를 쓸어버릴 때 아낌없이 도와줄 것 아닌가.”
혈마는 허공에 음성을 남기고 대전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고 한참이 지났을 때 흑의 복면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두 주먹을 움켜쥐더니 다시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