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186화
청운은 사도맹 고수들의 칼날 같은 눈빛 속에서도 오직 용천관만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조만간 서경왕부에 들려야 합니다. 어쩌면 왕야께서 이번 일에 대해서 문책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양민을 학살하고 다니는 도적 무리가 있는데, 제가 가만있으면 왕야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저 역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끄응.”
용천관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서경왕부의 태친왕 주하경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성군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가 한번 화를 내면 폭군 뺨 때릴 정도로 성격이 지랄이었다.
그러니 사도맹 입장에서도 그동안 황제보다 가까이에 있는 태친왕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맹주님을 믿고 물러가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청운은 이를 부득부득 가는 용천관을 뒤로하고 전각을 나섰다.
용천관은 청운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린놈이 여우야, 여우, 그것도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수컷 구미호.’
* * *
장안 성내에 있는 궁전은 오래전부터 전조의 황궁으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지금은 서경왕부의 왕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왕궁의 전각들은 거대한 기단 위에 세워져 있었다.
입구부터가 남달랐다. 길게 뻗은 대로는 보는 이를 압도하고 숨 막히게 할 만큼 거대하고 웅장했다. 그 끝에 있는 궁전의 크기는 황궁에 있는 건청궁만 했다.
서안궁.
바로 서경을 다스리는 태친왕이 집무를 보는 궁전이다.
청운은 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안궁으로 들어섰다. 서안궁 안은 생각보다 넓고 화려했다.
중앙 태사의에는 태친왕으로 보이는 사내가 용좌에 앉아 있었다. 좌우로 수십이 넘는 관리와 무장들이 늘어서 있었다.
청운은 곧장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중앙 우측에 서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청운의 명령으로 파견 나온 정 소감이었다.
청운이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별일 없었는가?>
<대인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왕부에 복잡한 일들이 있사옵니다.>
청운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중앙쯤 다다른 청운은 무릎을 꿇으며 태친왕에게 예를 올렸다.
“천세 천세 천천세! 태친왕야 천천세!”
청운은 예를 올린 후 자신을 소개했다.
“왕야, 처음 뵙겠사옵니다. 소관 북진무사 이청운이옵니다.”
“어서 오게. 그대의 명성은 내 귀가 따갑게 들었네.”
태친왕의 손짓에 청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이라면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태친왕을 접견해야겠지만 청운은 고위관리였기에 편안하게 배려해준 것이다.
청운이 선수를 치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왕야, 서둘러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황상의 명령을 수행하다 보니 이제야 오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에 와서 통치자를 먼저 만나는 것은 관리들의 기본이다. 그런데 청운은 바쁘다는 이유로 이제야 찾아왔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괘씸하게 여길 수도 있지만, 고위직에 있는 청운이기에 크게 흠은 아니었다.
“괜찮네. 그래도 남경에 계신 형님 일을 생각하면 나는 자네에게 인정받는 편 아닌가.”
“송구하옵니다. 이왕야를 뵙고 오려고 했지만, 당시에 여러 가지 일이 겹치다 보니 황상의 명령을 우선시했어야 했습니다.”
“그래. 들어서 알고는 있네. 그래도 이른 시일 내에 찾아뵙는 게 좋을 것이야. 내 일곱째에게 들어보니 형님께서 많이 속상해하셨다고 하더군.”
일곱째라면 청운과 다툼이 있었던 응천부윤 주천옥이다. 청운은 포권을 하며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
“왕야, 모두 소관의 잘못이옵니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남경왕부에 들려 죄를 청하겠사옵니다.”
“알겠네. 내 그리 전하지. 그리고 그저 인사만 하러 온 것은 아닐 것이고, 그래 용무가 무엇인가?”
태친왕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청운을 대했다. 여전히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청운은 고개를 돌려서 정 소감을 보았다. 정 소감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후 한 발 앞으로 나서서 태친왕에게 말했다.
“저언하! 진무사 이청운이 예물을 보내 왔사옵니다.”
“응? 예물이라니?”
용상에 깊이 몸을 누이고 있던 태친왕이 용상에서 등을 떼며 앞으로 상체를 숙였다.
분명히 청운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고 덜렁 몸만 입조했었다. 첫 만남이라면 당연히 작은 것이라도 들고 올 줄 알았다. 하다못해 삼원이라는 이름값에 어울릴 만한 그림이나 글씨라도 가져오는 게 당연하건만 그냥 몸만 왔다. 그래서 내심 괘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 소감은 궁의 입구를 보며 소리쳤다.
“예물을 들여라!”
“니예!”
환관들이 대답을 하며 무언가 기다란 물체를 가지고 들어왔다. 중앙에 서 있는 청운이 자리를 비켜주자 기다란 물체를 세우고 양쪽으로 넓게 펼쳤다.
십이병풍.
열두 칸으로 만들어진 병풍이었다.
그곳에는 섬서의 절경이 담겨 있었다.
웅장하고 힘차게 솟은 험준한 고봉부터 진령산맥을 잇는 여러 장도와 풍경이 열두 폭의 병풍에 나눠 있었다.
화산과 종남산, 그리고 위수의 도도하게 흐르는 물까지 거침없이 휘갈긴 산수화였다.
태친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자석에 이끌리듯 용상을 내려왔다. 병풍 앞에 선 그는 입을 쩍 벌리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찌, 어찌 이런 그림이…….”
덜덜 떨리는 손길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미 좌우에 늘어서 있던 관리들이 주위에 몰려들어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청운은 혼이 나간 태친왕 곁으로 다가가서 넌지시 말했다.
“소관이 왕야를 생각하며 몇 날 며칠 열과 성을 다해 그린 그림이옵니다.”
청운이 허리를 숙이며 읍을 했다.
태친왕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청운의 포권한 손을 덥석 잡았다.
“과연 만고의 충신이로다! 황상께서 그대를 아끼는 이유를 내 이제야 알겠구나.”
“전하! 망극하옵니다!”
“여봐라! 연회를 열 것이니 성대하게 준비하라!”
“니예! 바로 준비하겠사옵니다아!”
양 태감이 곁에 있다가 곧장 대답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태친왕은 여전히 열두 폭의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그림은 청운이 틈나는 대로 정 소감에게 보냈던 그림을 모아서 만든 병풍이다. 마지막 위수와 진령산맥의 그림은 사도맹과 싸우고 난 후에 그렸다.
용천관은 청운의 그림을 보고 자기에게도 하나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을 만큼 걸작이었다.
왕궁에서 연회가 준비되는 동안 청운은 정 소감과 따로 자리했다.
청운은 볼살이 조금 빠진 정 소감을 보며 말했다.
“어허, 몸을 아끼라 했거늘 어찌 이리 야위었단 말인가.”
“송구하옵니다.”
둘은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청운이 궁금한 부분을 물었다.
“그래,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왕야의 마음이 바뀌신 것인가?”
정파와 사파의 싸움을 막기 위해서 출동했던 병사들이 한순간에 뒤로 물러섰다. 태친왕의 명령이 있지 않고서야 병사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바뀔 리 없었다.
“니예, 알아본 바에 의하면 남경왕부에서 서찰이 도착한 후라고 하옵니다.”
“내용은 듣지 못했나?”
“니예, 서찰을 읽으시고 그 자리에서 태우셨다고 하옵니다.”
정 소감의 말에 청운의 미간이 좁혀졌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이왕야께서 무언가 전언을 보냈다는 말씀이신데.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딱히 ‘이거다’라는 생각은 없었다.
‘혹시? 아니야.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딱히 아쉬운 것도 없… 설마…?’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한번 들기 시작한 의심병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 한구석에 남았다.
“정 소감, 혹시 이곳 서경왕부에서 의심되는 자들은 보지 못했나?”
무림을 정복하려고 하는 겁 없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황실을 그냥 둘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 소감이 말했다.
“양 태감 말로는 활발하게 움직이는 자들이 있다고 하옵니다. 그들이 노룡회나 신혈교와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은 확실하옵니다.”
“흠, 그건 자네가 알아봐 주는 게 좋겠군. 그리고 항상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무리하지 말고 도망치게. 알겠는가?”
“니예, 소인 목숨을 소중히 여기겠사옵니다.”
정 소감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 * *
팽팽한 긴장감이 장안 일대를 짓눌렀다.
무림맹주와 사도맹주의 명령으로 사파와 정파의 싸움이 잠시 멈추었다 하나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인 감정의 골은 말 몇 마디에 풀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태친왕이 포고령을 내렸다.
[장안 일대 오십 리 안에서 무부들의 싸움을 금한다. 이를 어기고 싸우는 자들은 역모죄로 다스릴 것이다!]
그러고는 병사들을 풀어 장안의 경비를 강화했다. 청운의 선물이 마음에 든 듯했다.
정파와 마도사파의 무사들은 서로를 향해 이를 갈았지만 대놓고 싸우지는 못했다.
그렇게 청운이 장안에 들어선 지 닷새가 흘렀을 때, 기다리던 무림맹주와 그 일행이 장안에 도착했다.
화산에 있던 제갈신우와 무림맹 장로들도 맹주의 행렬에 합류해 있었다.
청운은 금의위 위소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위소의 거대한 전각 안에서 무림맹과 사도맹 인사들이 마주 앉았다.
좌측은 사도맹이, 우측은 무림맹 인사들이 자리했다. 한쪽이 열 명씩, 모두 스무 명이었다.
양조생과 용천관은 중앙에 앉아서 서로를 노려봤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용천관이었다.
“양 가야, 너도 이제 폭삭 늙었구나.”
“그러는 용 맹주께서는 여전하시구려.”
둘의 나이는 용천관이 다섯 살 많았다. 그러나 겉모습만 놓고 본다면 양조생이 스무 살은 많아 보였다.
용천관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걸렸다.
입꼬리를 살짝 올린 그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그 모습이 아니꼬운지 양조생은 턱을 살짝 당기며 눈을 위로 치켜떴다.
용천관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아이들이 워낙 나를 잘 보필하지. 주안과라고 들어봤나? 그걸 구해왔지 뭔가. 한사코 안 먹겠다고 했건만 어찌나 성화인지. 하하하. 어쩔 수 없이 한입 베어 물었지. 그랬더니 글쎄 피부가 탱탱해지더군. 하하하.”
“쯧쯧.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나이에 맞게 늙음을 받아드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걸 순리라고 하지요. 솔직히 죽을 날 얼마 안 남은 늙은이처럼 고집만 피우면서 얼굴만 젊어지면 뭐합니까?”
용천관의 한쪽 볼이 실룩였다. 만만치 않은 놈인 줄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입담이 더욱 날카로워진 듯했다.
용천관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양조생을 바라보았다. 세월이 지났어도 저놈의 상판대기는 적응이 안 되었다.
‘일단 한 대 쳐?’
주름이 졌지만 왠지 주먹 한 방 날리면 착착 감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양조생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며 불꽃이 튀었다.
청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이대로 뒀다가는 사달이 날 것 같다.
둘의 양쪽에 늘어선 이들 역시 눈을 희번덕거렸다. 누구 하나 기침이라도 한다면 공격 신호가 되어서 곧장 상대방을 향해 달려들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일촉즉발의 순간, 청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청운이 사람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이미 신혈교와 노룡회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셨을 테니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용천관과 양조생도 기세 싸움을 멈추고 청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두 분 맹주님께서는 이곳에 오신 목적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험, 누가 잊었다고 했나?”
용천관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투덜거렸다.
양조생은 굳은 표정으로 별말 없이 듣기만 했다.
청운이 낭랑한 목소리로 천하 무림에 한 획을 긋는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이제부터, 무림맹과 사도맹을 이간질시켜서 전쟁을 벌이게 하려는 자들에 대한 공동 대응 방안을 논의해보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