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185화
장로들이 모두 놀라서 제갈신기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부원주께서 뇌옥에 계시다니. 내가 잘못 들은 것 아니지요?”
제갈신기가 화살처럼 장로들의 가슴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신비세력에 급히 전서를 보내려다 잡혔지요.”
“…….”
“뭐요?”
장로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본 맹과 사도맹의 동맹 사실을 신비세력에게 전하려 했습니다. 지금 취조 중이니 좀 더 확실한 사실이 나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갈신기는 말을 하면서 장로들의 표정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특히 의심하고 있던 자들 중 석중을 제외한 두 사람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중 한 사람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경악해서 이를 악다물고 있었다.
‘두고 보면 알겠지.’
제갈신기는 장로들의 입이 달라붙자, 양조생을 바라보았다.
양조생이 고개를 슬쩍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자 장로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모두의 시선이 모였을 때 양조생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난 그동안 무림 화합을 위해서 독단으로 일 처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여러분들께서 잘 아시는 일일 것입니다.”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조생의 말대로 그는 언제나 회의를 통해서 결정된 대로 움직였다. 불편하고 불합리하다 할지라도 장로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존중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품에서 푸른색의 옥으로 만든 패를 꺼내서 앞으로 내밀었다.
장로들과 회의에 모인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맹주령을 뵙습니다.”
“지존령을 뵙습니다.”
“그대들은 맹주령 앞에 충성을 맹서했소. 그러니 이 양조생에게 불만이 있더라도 맹주령에 따라주길 바라오. 본 맹주는 맹주령의 이름으로 신비세력을 상대하는 동안 사파와 손을 잡을 것이오.”
“맹주령을 따르겠습니다.”
“존명!”
몇몇 장로는 즉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반면 몇몇 장로들은 슬쩍슬쩍 눈을 돌려서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따르고 싶지 않았지만, 양조생이 맹주령을 내세운 이상 거부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석중이 간자로 확인되어서 뇌옥에 잡혀 있다지 않는가 말이다.
장로들 중 많은 자들이 석중과 친하게 지냈으니,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몰랐다.
“맹주께서 정희 그러실 마음이라면 따라야겠지요.”
“허나, 일이 잘못될 경우 모든 책임은 맹주께서 지셔야 하외다.”
그 상황에서도 몇 사람은 끝까지 양조생을 물고 늘어졌다.
양조생은 속이 끓었지만, 장로들이 자신의 명령을 받아들인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걱정 마시오. 이번 일이 잘못되면 이 양조생도 이 자리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을 거요.”
그쯤에서 제갈신기가 장로들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석 장로의 체포는 아직 비밀로 남아야 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면 안 됩니다. 만약 그 사실을 말한 분이 계시면, 안타깝지만 무림맹의 율법에 따라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로들은 그의 말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 자칫하면 적의 간자로 의심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걱정 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니.”
“그리 걱정 되면 내 입을 꿰매게나.”
회의가 끝나고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장로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석중이 간자였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럼에도 많은 장로들이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도맹과의 동맹으로 신비세력을 물리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다.
반면 실패한다면 양조생이 맹주위에서 물러날 것이니 새로운 맹주를 뽑는 일이 십 년은 앞당겨진다.
누가 알겠는가, 자신들 문파의 고수가 무림맹주가 될지.
장로들이 빠져나가서 휑해진 영웅관에 양조생과 제갈신기만 남았다.
양조생은 회안이 가득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군사.”
“예, 맹주님.”
“누가 다음 대의 맹주가 될지 몰라도, 나처럼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제갈신기는 고개를 숙였다.
양조생은 무림의 안위를 위해서 평생을 싸웠건만 정치적인 부분이 약했다.
자신의 지지기반이 약한 것이 문제였다.
아니 장로들이 그를 밀어주었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장로들은 자파의 이익만 추구하며 그를 멸시했다.
그래서 양조생은 더욱 그들이 미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 나이에 원망은 무슨.’
양조생은 한 차례 고개를 흔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며 제갈신기에게 말했다.
“평생 그대를 믿었소. 이번에도 그대를 믿고 모든 것을 던질 생각이니 잘 처리하시오.”
“존명!”
긴말은 필요 없었다. 그저 한마디 대답이면 되었다.
제갈신기는 등을 보인 채 영웅관을 빠져나가는 양조생을 향해서 깊이 허리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렇게 양조생은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영웅관을 빠져나갔다.
* * *
제갈신기는 온종일 석중을 신문했다.
석중은 자신도 잘 모른다면서 끝까지 버티다가 새벽이 다 되어서 결국 몇몇 인사를 불었다.
그중에는 이미 파악한 이도 있었고, 몇몇은 생각지도 못한 자들이었다.
신문을 마친 제갈신기는 양조생에게 간밤에 있었던 일을 은밀하게 보고했다.
양조생은 제갈신기의 노고를 치하했다.
“잘했네. 이제야 뭔가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 같군.”
“혹시 모르니 내일 가실 때 검왕 님과 사대호위를 대동하시지요.”
검왕 목유자는 옥선진인의 부상 소식을 듣고 진노해서 황궁을 떠나 무림맹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런데 제갈신기의 말에 양조생의 얼굴이 굳어졌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검왕까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지금은 동맹을 하겠다고 했습니다만, 용 맹주가 어떻게 나올지 누구도 모릅니다. 만일을 대비해서라도 검왕 어른과 함께 가시지요.”
양조생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제갈신기는 양조생이 기분 나쁘지 않게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기회가 적을 치면서 내기를 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양조생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알겠네. 군사의 뜻에 따르지.”
나이를 많이 먹었음에도 그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호승심이 남아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제갈신기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결심을 굳혔다.
석중이 말한 간자와 자신이 조사한 간자의 수가 수십 명이다. 그들을 모두 처리하다 보면 석중의 상황이 적들에게 알려질 수 있었다.
하지만 더는 간자들에 대한 처리를 미룰 수 없었다.
‘단숨에 제거해야 한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고, 참살조가 밖에서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갈신기는 들고 잇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탁.
“놈들은?”
옆에 고요히 서 있던 사십대 무사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조용합니다. 아직은 석중이 잡힌 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시작해라.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존명!”
* * *
사도맹 고수들과 함께 장안에 들어선 청운은 곧장 금의위 위소로 향했다.
그곳에는 무림맹을 지원하기 위해서 출동했던 금의위가 돌아와 있었다.
웅천은 청운과 사도맹 무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항상 외부로만 돌아다니던 청운으로서는 자신에게 배속된 중원 오대 위소를 처음으로 오게 된 셈이었다.
처음 와본 위소는 웅장한 전각들로 이뤄져 있었다.
중원 칠대황도 중 한 곳인 장안이다 보니 고풍스런 전각이 많았다.
청운은 그중 중앙의 전각 안 상단에 마련된 커다란 의자에 앉았다.
그의 앞에는 금의위 위사들이 서 있었다.
좌측에는 웅천을 비롯한 자신을 따르는 금의위들이, 우측에는 서경위소를 담당하는 금의위들이 서 있었다.
웅천이 먼저 보고를 올렸다.
“대인, 명하신 대로 위남으로 파견했던 병력이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서 사령회와 무림맹 간의 싸움을 적절히 막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추가로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혹, 내가 떠난 후 습격이 있었나?”
위남을 떠나며 찜찜했던 부분이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웅천이 말했다.
“예, 대인의 예상대로 무림맹을 습격하려던 자들이 있었습니다만, 다행히 백호단 영호천 단주가 그들을 막아냈습니다.”
“사령회에서 보낸 자들인가?”
“시체를 확인했는데, 정체는 밝히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령회에 사람을 보내서 시체를 수거할 것을 알렸는데, 자신들과 관련이 없는 자들이라며 수거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누구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흑야라는 놈들이군. 그런데 영호천이 혼자 막았다고? 몇 명 안 왔나?’
의문도 잠시였다. 이어지는 웅천의 대답에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데 영호천 단주가 싸움에서 머리를 다쳤는지, 당시 상황을 기억 못 한다고 합니다.”
“아! 그래?”
혈황이 개입한 것이 분명했다. 자신은 혈황이 몸속에 들어와도 정신을 공유하지만 영호천은 아니었다.
청운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을 이었다.
“흠, 막았으면 되었네. 기억 못 하는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고. 다른 곳에서는 문제가 없나?”
“사도맹 맹주의 명령이 떨어진 후 다른 곳은 조용해졌습니다. 그런데 사령회의 백골존자가 이끄는 무리가 문제입니다.”
“백골존자? 사령회의 장로라는 그 백골존자 말인가?”
“예, 수하들을 끌고 다니면 정파를 공격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청운의 미간이 좁혀졌다.
백골존자라면 장안에 있는 칠성도문에서 잔인하게 혈겁을 일으킨 자였다. 이대로 놈들이 활개 치도록 둘 수는 없었다.
청운은 보고하는 웅천에게 물었다.
“놈들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장안 인근을 돌고 있습니다. 현재 금의위 한 개 조가 따라붙은 상태입니다.”
“놈의 위치를 파악해서 보고하게. 당장.”
“예, 하옵고 서경왕부에서 대인을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러잖아도 찾아뵈려고 했었네. 좋은 시간이 언제인지 여쭙고 원하는 시간에 들르겠다고 전하게.”
“예, 대인.”
서경왕부는 금의위 위소에서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다. 제국의 서부를 지키는 곳이다 보니 왕부를 중심으로 위지휘사사와 금의위 위소가 근거리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 * *
회의가 끝나자 청운은 용천관을 찾아갔다.
사도맹 고수들이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지만, 청운은 씩 웃어주며 그들을 지나쳐서 용천관을 만났다.
“어서 오게.”
“맹주님, 쉬시기는 불편하지 않으신지요.”
“뭐 그럭저럭 지낼 만하네.”
청운은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들은 용천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곁에 있는 사뇌에게 물었다.
“백골존자라면 사령회의 장로 아닌가?”
“예, 사령회의 핵심 장로 가운데 한 명입니다.”
“내 명령을 못 들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요.”
“허, 사람을 보내서 이리 오라고 해. 안 오려 하면 팔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잡아와!”
“알겠습니다.”
용천관은 사도맹주령을 내려서 싸움을 금지시켰다. 그런데도 여전히 싸우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눈앞에서 자신을 은근히 압박하고 있는 저 애송이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말이다.
용천관은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청운에게 말했다.
“내가 처리할 것이니 걱정 말게. 아직 연락이 안 닿았거나 무언가 착오가 있었나 보군.”
“알겠습니다. 그래도 서둘러 주십시오. 혹, 이런 일이 지속된다면 황명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습니다.”
청운의 말을 압박으로 느낀 듯 용천관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자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것인가?”
“그럴 리가요. 그저 현실을 알려드렸을 뿐입니다.”
“그게 협박이지! 내가 만만해 보이나?”
용천관이 노성을 내지르자, 앞쪽에 늘어서 있던 사도맹 고수들까지 눈에 불을 켜고 청운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