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184화
청운은 고개를 저었다.
“신비세력과 곧 싸우러 가야 해서 다치면 안 됩니다. 아마 제가 다치면 팔십만 금군이 무림인들을 공격할 겁니다.”
용천관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제는 협박까지!
방심해서 승부를 결정짓지 못한 것도 억울한데 협박이라니!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청운은 그런 용천관을 슬쩍 살펴보고 한마디 툭 던졌다.
“이번 일 끝나면 신나게 한판 붙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고집부리시고 잠시 동안만 정파와 손을 잡으시지요.”
용천관은 청운을 노려봤다. 움켜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에잉! 좋다, 그럼 신비세력인지 뭔지 하는 잡것들 처리하고 나서 다시 붙자. 장소는… 여기서!”
청운도 각오하고 있던 바였다.
“알겠습니다.”
“정말이지? 약속 어기면 죽는다?”
“전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킵니다.”
“좋아, 내가 속는 셈치고 한번 믿어보마.”
청운은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뇌는 그런 청운을 더없이 차갑고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 *
오후의 햇빛이 대지를 적셨다.
그늘도 없는 넓은 강기슭에 백여 명의 인마가 넓게 자리했다.
중앙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용천관과 사도맹 고수들이 한쪽에 앉아 있는 청운에게 시선을 모았다.
청운은 서찰을 작성하고 있었다.
한참을 일필휘지로 서신을 작성한 청운은 곁에 있는 무사에게 건넸다.
“이건 화산으로 보내주시오.”
“알겠습니다.”
사내는 청운이 작성한 서류를 품에 넣고는 곧장 말 위에 올라타고는 어디론가 달렸다.
몇 차례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모든 일을 마친 청운은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용천관에게 다가갔다.
“맹주님. 이제 가시지요.”
“끄응, 약속은 지켜라.”
“물론입니다.”
용천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서 주위를 경계하던 이들이 모여들었다.
용천관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외쳤다.
“장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모든 결정을 내릴 것이다.”
“예! 주군!”
“출발하라!”
한 장한이 소리쳤다. 일행은 위수를 따라 뻗은 관도를 이용해서 동쪽으로 달렸다.
* * *
청운의 서찰을 받아본 제갈신기는 곧장 무림맹주 양조생에게 달려갔다.
양조생은 서찰을 펼쳐서 한참을 읽더니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 진무사가 큰일을 해냈군.”
“예, 설마 단신으로 처리할 줄은 몰랐습니다.”
양조생이 흐뭇해할 때 제갈신기가 말했다.
“진무사의 요청대로 장안에서 용천관을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장로들이군. 장로들이 동맹을 순순히 허락할 거라고 보는가?”
마도사파와 관련된 일은 거대 문파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사파와 흉흉한 상황이라면 그들이 순순히 협조할 리 없었다.
그렇다고 맹주 독단으로 명령을 내려 봐야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제자들을 파견하지 않을 것이 뻔하다. 무림대회를 열어 사신단이라는 무림맹 직속 무력단체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 아니던가.
“지금은 반대를 두려워할 때가 아닙니다, 맹주.”
양조생은 제갈신기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거대 문파 출신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무림에 신성처럼 나타난 고수였다.
그런데 구대문파와 십대세가가 서로 견제하는 과정에서 맹주로 추대되었다.
아마 그가 오래전 무림맹주였던 양소태의 후예가 아니었다면 무림맹주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장로들의 입김이 세어진 것도 어찌 보면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지낼 수도 없는 일이다.
“알겠네. 장로들을 소집하게.”
“예, 맹주!”
* * *
무림맹 장로원 부원주 석중은 전령으로부터 장로회의 소집에 대한 내용을 듣고 급히 전서를 작성했다.
손바닥만 한 종이에 간략하게 내용을 적은 그는 새장의 문을 열고 흑천구를 꺼냈다.
전신이 새카만 흑천구는 일반 비둘기보다 빠르고 밤에도 비행을 할 수 있어서 최상급의 전서구로 사용되는 비둘기였다.
흑천구의 다리에 매달린 전서통에 전서를 넣은 그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날렸다.
파다다닥.
흑천구가 하늘로 솟구치는 것을 본 그는 차디찬 냉소를 지었다.
‘후후후, 어림없다, 이놈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로, 안에 계셨군요.”
흠칫한 그는 몸을 돌렸다. 제갈신기가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허허허, 총군사께서 어쩐 일이시오?”
제갈신기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석중에게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요? 이쪽으로 앉으시구려.”
석중은 웃음을 잃지 않고 탁자를 가리켰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이 빠르게 오갔다.
그사이 제갈신기가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전령을 통해서 회의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셨을 겁니다.”
“안 그래도 들었소이다. 해서 차만 한잔 마시고 영웅관으로 갈 생각이었지요. 한데 총군사께선 영웅관으로 가지 않고 어찌 이곳으로 온 것이오?”
“형님께서 화산으로 가셨기 때문에 의논드릴 분이 장로님밖에 없는 것 같아서요.”
“흠, 총군사께서 그리 생각해주시다니, 고맙구려. 허허허. 어디 말씀해 보시오.”
“사도맹과의 동맹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겁니다.”
“들었소이다.”
“솔직히 저는 그 일이 마음에 안 듭니다. 사도맹과 동맹이라니요?”
“정말 그리 생각하시오?”
“물론입니다. 얼마 전만 해도 정파의 무사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습니까?”
제갈신기가 짜증 내듯 말하며 석중에게 다가갔다.
석중도 제갈신기의 말에 동조하듯 말했다.
“옳으신 말씀이오. 총군사 말대로 사도맹과의 동맹은 좀…….”
“응? 그런데 그 오른쪽 옆구리에 묻은 건 무엇입니까? 무슨 깃털 같은데……?”
“옆구리?”
석중이 ‘깃털’이라는 말에 흠칫하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제갈신기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석중은 제갈신우와 더불어서 장로원을 대표하는 삼대 장로 중 한 명으로 장로원의 부원주였다. 그의 상청비검(霜靑飛劍)은 무림일절로 정면대결을 해서는 승산이 높지 않았다.
하물며 아무도 몰래 제압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제갈신기의 말을 듣고 방심한 데다 ‘깃털’이라는 말에 제 발이 저려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퍼벅.
석중은 두 눈을 부릅떴다. 몸이 따끔하더니 움직일 수 없었다. 혈도를 제압당한 것이다.
“헉! 이게 무슨 짓……!”
석중을 바라보는 제갈신기의 두 눈은 어느새 차갑게 변해 있었다.
그는 혈도가 제압되어 온몸이 굳은 석중의 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설마 석 장로님께서 신비세력의 간자일 줄은 몰랐습니다.”
“무, 무슨 말이오! 누가 간자란 말이오! 당장 혈도를 풀지 못하겠소?”
“부인해도 소용없습니다. 증거가 있으니.”
“증거? 그래 그 증거 좀 봅시다. 어디 있…….”
석중을 말을 하다 말고 멈춰야 했다.
한 사람이 더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 자신이 날려 보낸 흑천구가 들려 있었다.
“속도가 빨라서 겨우 잡았습니다.”
“고생했네.”
제갈신기는 검은색 윤기가 흐르는 비둘기를 받아들고 혀를 찼다.
“쯧쯧. 이 귀한 흑천구가 주인을 잘못 만나서 생을 마감했군.”
그가 흑천구를 석중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거, 석 장로님께서 취미로 키운다는 흑천구지요? 여기 발에 전서도 있군요. 어디 한번 전서의 내용을 확인해 볼까요?”
푹.
제갈신기는 곧장 석중의 아혈마저 제압해서 자결을 방지했다.
“굳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랑 가시면 아마 말을 못 해서 안달이 나실 겁니다. 하하하, 제가 꼭 그리 만들어드리지요.”
제갈신기는 석중에게서 몸을 돌리며 수신호위에게 명령을 내렸다.
“은밀히 압송하라.”
“존명!”
제갈신기는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동안 무림맹에 숨어든 간자들을 대부분 파악했다.
문제는 간자들의 수뇌였다.
파악된 자들은 대부분 중간 간부나 일반 무사들이었다.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수뇌가 분명히 존재할 터.
하지만 파악한 정보만으로는 최상위에서 명령을 내리는 자를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증거가 없으니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잘못 건드리면 꼬리를 자르고 숨을 것이 뻔하니 무작정 잡아들일 수도 없고.
그런데 마침 사도맹과의 동맹이 성사되자, 장로회의를 소집하면서 의심쩍었던 세 명에게 넌지시 회의 내용을 발설하게 했다.
“아마도 사도맹과의 동맹 때문인 것으로 압니다.”
그중 한 사람이 석중이었다.
‘드디어 머리를 쳤다. 이제 쥐새끼들을 청소하는 일만 남았군.’
고개를 돌린 제갈신기는 자신의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장한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시작하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잡아들여라. 안 되겠다 싶으면 반드시 제거하고.”
“존명!”
* * *
소집 명령이 떨어지고 한 시진 후.
영웅관에 수십 명의 장로와 무림맹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긴급회의가 소집되자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왜 모이라고 한지 아는가?”
“사파 놈들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럼 추가 파병 때문인가 보군.”
“얼핏 듣기로는 사도맹 놈들과의 동맹 때문이라고도 하던데?”
“예? 동맹이오?”
웅성거림이 커져 갈 때 양조생과 제갈신기가 회의장에 들어섰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때 염소수염에 얍삽하게 생긴 무당파의 명운도장이 제갈신기에게 물었다.
“총군사, 무슨 일로 긴급회의를 소집하신 거요?”
그는 술을 한잔 마시려던 차에 회의가 소집되자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제갈신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진무사에게 긴급한 연락이 와서 모이시라 한 것입니다.”
“진무사라면, 장안에서 사파와 문제가 있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진무사가 사도맹의 용천관을 만났다 합니다. 그래서…….”
제갈신기는 청운에게서 온 서찰의 내용을 모두에게 알렸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감탄사를 터트리는 인물도 있었지만,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인물도 있었다.
모든 이야기가 다 끝나자 장로인 황보경이 버럭 화를 냈다.
“총군사! 지금 뭐라 하셨소? 사파 놈들과 손을 잡자고?”
“장로께서는 잠시 진정을 하시지요.”
제갈신기가 서둘러 황보경의 말을 끊었다. 그러나 황보경은 물러설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
“진정? 그걸 말씀이라고 하시는 것이오? 장안에 있는 정파들이 놈들에게 혈겁을 당했는데 손을 잡자고요?”
“맞습니다. 사파와 손을 잡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이번 기회에 놈들을 쓸어버립시다.”
“옳은 말씀입니다. 무엇이 두려워서 놈들과 손을 잡는단 말씀이십니까?”
황보경이 포문을 열자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 제갈신기가 손을 들었다.
장로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사도맹과 동맹을 하려는 것은, 암중에서 강호에 해악을 끼치는 신비세력을 치기 위해서라는 걸 잘 아실 겁니다.”
“누가 그걸 몰라서 그러는 거요? 솔직히 사도맹이나 신비세력이라는 놈들이나, 그놈들이 그놈들 아니오?”
“그 말씀도 맞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우리 무림맹과 사도맹을 이간질시켜서 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럴 경우 결국 강호는 그놈들이 집어삼키게 될 겁니다. 그걸 원하십니까?”
“험, 누가 그걸 원한다고 했소?”
“사도맹과의 동맹은 신비세력을 무너뜨릴 때까지입니다. 사도맹의 죄는 그 후에 물으면 됩니다.”
제갈신기의 말에 장로들의 불만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제갈신기는 때가 되었다 생각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장로님들 중 많은 분들이 석중 장로가 안 보이는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장로들이 안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 정말 없군. 어디 가셨지?”
“그러게 말입니다.”
그때 제갈신기가 말했다.
“석중 장로는 지금…… 뇌옥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