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182화
사뇌는 청운을 한 차례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려서 용천관에게 말했다.
“거짓은 아닌 것 같사옵니다.”
“흠, 그렇단 말이지.”
용천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대들 생각은 어떤가?”
용천관 주변에 있던 자들이 자기 생각을 내놓았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냥 넘길 수는 없습니다, 맹주!”
“맞습니다. 무림맹 놈들이 날뛰는 것을 두고 보다니요. 일단 버르장머리를 고친 다음에 받아낼 것 받아내고 이야기를 하시지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이번 기회에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합니다.”
협조해서 신비세력을 물리치자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대부분이 정파와 싸우자는 말이었고, 나머지도 말뜻을 뜯어보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용천관은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듣더니, 오른손을 들어서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청운을 보며 말했다.
“우리 쪽에서는 싸우자는 의견이 많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정말 전쟁 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용천관은 청운의 말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혀 없는 건 아니지.”
“뜻을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해. 누르면 돼.”
용천관이 씩 웃었다. 그 웃음에 청운은 소름이 돋았다.
‘혼자서 상대하기를 바라는 것인가?’
아무래도 용천관은 청운 혼자서 자신의 부하들을 상대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청운은 용천관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그의 주위를 보았다.
하나같이 강한 자들이었다.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만큼.
‘고수가 많군.’
무림맹에서 본 정파의 고수들보다 더 강하게 느껴졌다.
‘이들을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까?’
대충 살펴봐도 대단한 실력을 지닌 자들이 열 명은 넘었다.
청운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망설임을 보이자 용천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자신이 없나?”
“그건 아닙니다. 제가 누구를 상대하면 되겠습니까?”
청운은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물었다.
용천관의 고개가 좌측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온통 검은색으로 통일된 옷을 입고 있는 한 무리의 사내들이 서 있었다.
“이들을 상대하면 되네.”
“흠……. 흑사자단이군요.”
용천관이 말한 눈앞의 사내들이 누군지 청운도 귀가 따갑게 들었다.
흑사자단은 사도맹주를 보호하고 유사시 돌격대가 되어서 적의 심장을 강타하는 임무를 맡은 사파 최정예였다.
“어떤가? 자신 있나?”
“해보겠습니다. 그보다 제가 이기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확답을 듣고 겨루는 게 좋다. 그래야 나중에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용천관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돌려서 사뇌를 봤다.
사뇌가 허리를 살짝 숙이더니 청운을 향해서 말했다.
“무림맹과 한시적인 동맹을 맺도록 하지요.”
“좋습니다. 그런데 은원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사뇌가 두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그건 당사자들 간에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이 죽을지도 모릅니다.”
“이 대인의 염려는 잘 알겠지만, 무림은 약육강식의 세계입니다. 힘이 없으면 고개를 숙이는 게 당연합니다. 또한, 이 일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정과 사의 문제입니다. 그러니 대인께서는 한발 물러서 계시지요.”
사뇌는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청운도 이 자리에서 결정을 내려 봐야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사자의 하나인 정파인들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이 문제는 신비세력을 제거한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지요.”
“좋습니다. 정파도 이 대인처럼 말이 통했으면 좋겠습니다.”
청운이 한발 물러서자 사뇌 역시 한발 물러섰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용천관은 한쪽 손을 살짝 들었다. 그러자 흑사자들이 앞으로 나섰다.
용천관은 청운을 보며 말했다.
“그냥 싸우면 재미가 없으니 조금 특이하게 겨루는 게 어떻겠나?”
“어떤 방식이든 받아드리겠습니다.”
청운은 흔쾌히 용천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흑사자단을 상대로 패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용천관이 손으로 한쪽의 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강이 위수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물론 알고 있습니다.”
“수전을 겪어 봤는지 모르겠지만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네. 어떤가? 저 위수 위에서 싸워보지 않겠나?”
물 위에서 싸우라고?
청운은 의아했지만 이제 와서 못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해보지요.”
청운은 포권을 하며 용천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용천관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탁!
“띄워라!”
“존명!”
용천관의 명령을 받은 흑사자들이 방패를 강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슈슈슈슉.
첨벙첨벙.
직경 두 자 정도 되는 둥근 방패가 강 위에 떨어졌다.
동시에 흑사자들이 신법을 펼쳐서 방패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그러고는 둥글게 원을 그리며 원진을 형성했다.
“진무사에게도 하나 줘라.”
용천관이 말하자, 흑사자 한 명이 방패를 던져주었다.
청운은 방패를 받아서 물 위에 떠 있는 흑사자들 사이에 던졌다. 동시에 지체 없이 신형을 날렸다.
훨훨 날아간 청운은 흑사자들이 이루고 있는 진세 안에 떨어진 방패 위에 내려섰다.
청운이 자리를 잡음과 동시에 흑사자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아!
그들은 방패를 타고 물살을 가르며 청운을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평지에서 진법을 펼치는 것처럼 막힘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원을 그리며 움직이자 위수의 물이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풍랑이라도 만난 듯 거칠게 솟구쳤다.
촤아악!
동시에 솟구친 파도를 뚫고 검은 인영이 쏘아져 들어왔다. 청운은 장력을 펼쳐서 그자를 상대했다.
펑!
청운을 향해 달려들던 흑의 인영이 장력에 맞고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별 충격은 없는 듯 다른 이들과 함께 원을 그리는 물살에 합류했다.
청운의 미간이 좁혀졌다.
‘물살로 시야를 가리고 공격하겠다는 생각인가? 중심을 잡으며 이들을 상대하려니 쉽지 않군.’
촤아아아악!
몇 차례 공방이 더 이어지면서 합격진이 변하기 시작했다. 좀 더 거칠고 치밀해진 변화에 청운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생각보다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왜 사도맹주 용천관이 화경의 고수들을 내보내지 않고도 자신만만했는지 알 것 같았다.
금문수륙십방진.
흑사자들이 펼치는 협격진의 이름이다. 수공의 고수라 할지라도 진법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듯했다.
‘잘못하면 물에 빠지겠군. 그럼 내가 패하는 것인가?’
용천관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방법으로 겨뤄서 승리하겠다는 계략이었다.
그러나 순순히 패배할 마음은 없었다.
청운은 거칠어지는 진법의 살피며 파훼법을 찾기 시작했다.
‘일단 여덟 사람이 팔방을 점하고 있다. 뒤쪽에서 원을 그리고 있는 둘이 하늘과 물속을 점하면 십방…….’
청운은 진법의 요체를 파악했다.
팔쾌에 천지음양의 묘를 합쳐서 만든 십방진이 분명했다.
‘문제는 생문인데…….’
진법의 기본인 팔쾌에는 생문이 존재한다. 그런데 금문수륙십방진에는 생문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 만들어진 둥근 원의 물살을 유지하고 있는 둘이 생문을 이중으로 막고 있는 것이다.
청운을 공격하는 여덟 명이 문제가 아니었다. 뒤쪽에 원을 그리며 파도를 만들고 있는 둘이 문제였다.
‘골치 아픈 진법이군.’
청운은 오른쪽으로 흑사자의 검을 피하며 상체를 비틀었다.
시퍼런 장검이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곧장 상체를 숙이자 파도와 함께 검신이 튀어나왔다.
챙!
청운은 검을 뽑아서 상대의 검을 튕겨냈다.
장법으로만 상대하기에는 진세의 변화가 너무 심했다.
검을 뽑아든 그는 물살을 가르며 파도의 접근을 막고 역으로 반격을 시도했다.
촤아악! 챙!
뒤쪽에서 공격하던 파도와 흑사자의 공격을 막아낸 청운은 밟고 있는 방패를 하늘 위로 차 올렸다.
퍽!
그러고는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하더니 용천혈에서 내공을 터트리며 허공을 밟았다.
팡!
청운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동시에 파도가 덮쳤다. 하지만 청운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진 후였다.
“엇! 놈이 사라졌다!”
청운을 공격하던 흑사자 중 하나가 다급히 소리쳤다. 다른 자들 역시 사라져버린 청운 때문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두리번거리며 청운을 찾을 때 뒤쪽에서 다급한 음성과 함께 굉음이 터졌다.
“헉! 막아!”
콰과광!
원을 그리며 생성되었던 물의 장벽 한쪽이 터져 나갔다.
흩날리는 물줄기 속에 흑사자 한 명이 정신을 잃고 날아갔다. 외곽에서 원을 그리며 돌던 둘 중 하나였다.
촤아악.
외곽에서 한 사람이 무너지자 금문수륙십방진이 흔들렸다.
흑사자들이 파도와 함께 뒤로 물러섰다.
쏴아아.
물보라가 사그라들며 청운의 모습이 뚜렷해졌다.
청운은 방패를 밟지도 않고 등평도수(登萍渡水)의 신법을 펼쳐서 물 위에 떠 있었다.
어느새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그는 양팔을 좌우로 벌리더니 사방으로 휘저었다.
발밑의 강물이 청운을 중심으로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휘이이익!
촤아아악!
거친 바람에 회오리치던 발밑에서부터 한 줄기 물기둥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청운의 몸 역시 솟구치는 물기둥의 중심에 서서 같이 떠올랐다.
흑사자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얼굴에 검상이 있는 흑사자가 심상치 않은 청운의 모습을 접하자 다급하게 외쳤다.
“쳐라!”
파바바바방!
촤아아아악!
네 방위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어났다. 네 명의 흑사자가 파도를 타고 청운을 공격했다.
흑사자들은 자신들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무공을 아낌없이 청운에게 쏟아냈다.
그사이 청운을 감싼 물기둥은 십 장 하늘 위로 솟구친 상태였다.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했다.
흑사자들이 펼친 무공이 물기둥에 부딪혔다.
거대한 물기둥이 충격을 받으며 요동치더니 실타래 풀리듯이 흩어졌다.
그런데 공격한 이들도, 지켜보고 있던 사도맹 무인들도 청운 쪽을 보다가 두 눈을 부릅떴다.
물기둥이 흩어진 자리에 거대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누군가 크게 외쳤다.
“용! 용이다!”
사도맹 고수들도 한마디씩 놀라움을 표현했다.
“저 나이에 저 정도 실력이라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죽여야 하는 것 아니오?”
그 와중에도 청운은 용처럼 변한 물기둥을 타고 움직이며 흑사자들을 덮쳤다.
콰콰콰쾅!
한 마리 청룡이 위수를 뒤집어 놓았다. 그 압도적인 위력 앞에 일위도강의 경신법을 펼쳤던 아홉 명의 흑사자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개중 몇 명은 정신을 잃고 물속에 처박혔다.
한편, 청운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던 사뇌의 두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시간이 갈수록 청운이 금문수륙십방진에 적응했는지 움직임이 부드러워졌다.
놀랄 만큼 빠른 적응력이었다.
반면 사뇌의 이마 주름은 그만큼 깊어졌다.
그러다 흑사자들이 청운의 공격에 모조리 날아간 것을 본 순간, 사뇌도 결심을 굳히고 용천관에게 전음을 보냈다.
-주군, 이곳에서 이청운을 제거하십시오.
용천관은 이마를 찌푸렸다.
-꼭 그래야 하나?
-예, 지금이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용천관이 대답 없이 망설이자, 사뇌가 다시 재촉했다.
-주군, 약관의 나이에 저 실력이라면, 몇 년 안에 주군을 위협하게 될 겁니다. 더 자라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