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181화
한중에서 장안으로 넘어가는 진령산맥의 네 개의 길 중 자오도(子午道)로만 오지 않기를 바랐다.
종남산이 지척이기에 그들이 종남을 밀고 화산으로 넘어올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네 개의 길 중 가장 험한 길인데 무공을 익힌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은 듯했다.
“종남도 알고 있습니까?”
“종남에서 전서구를 보내서 알게 된 사실이네. 종남은 끝까지 싸우겠다는 연락을 보내왔네.”
청운은 종남에 남은 자들에게 당부를 했었다. 만일 사도맹이 자오도를 넘어온다면 당장 사람들을 대피시키라고.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들은 항전을 택한 것 같았다.
‘목숨을 귀히 여기라 그리 일렀거늘.’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목숨보다 명예를 더 중시 여기는 사람들이 무인들이었다.
한번 구겨진 종남의 자존심이 수많은 무인들의 목숨을 바람 앞의 촛불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청운은 다급하게 제갈신우에게 물었다.
“무인들은 언제 파견하실 겁니까?”
“현허진인과 상의해서 파견할 생각이네.”
화산파의 제자들과 화산에 모인 군웅들만으로는 사도맹을 막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도 제갈신우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청운은 뭔가 더 있음을 느끼고 그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장로님, 혹, 호북에서 움직인 것입니까?”
“자네 생각대로네. 무당과 제갈세가에서 호북의 정파 무인들이 종남에 도착했다고 하네.”
“다행이군요.”
청운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당파와 제갈세가에 화산파가 함께 있다 하면 사도맹에서도 종남파를 쉽게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사천에서도 무사들이 달려오고 있다 하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네.”
청성파와 아미파, 당가의 무사들이 촉산을 넘어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청운은 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것이 있었지만, 당장은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천의 문파들은 맹주께서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맞네. 언제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부를 수 있는 무사들은 최대한 불러야 하지 않겠나?”
청운도 그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았다.
어쨌든 무사들이 많이 집결한다면 신비세력을 공격할 때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더 늦기 전에 사도맹주를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이미 이야기가 된 터라 제갈신우도 반대하지 않았다.
“알았네. 우선적으로 사도맹주의 뜻을 정확히 알아야 우리도 대처할 수 있네. 그자와 만난 후 바로 소식을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화산파를 나선 청운은 비천무영신법을 최대한으로 펼쳐서 사도맹주가 모습을 보였다는 오장원 쪽으로 향했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사도맹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움직였다는 것은 마도사파가 언제든 준동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자칫하면 전쟁이 벌어진다. 그것만은 막아야 해. 노룡회와 신혈교 놈들 좋은 일 시켜줄 뿐이야.’
* * *
청운이 사도맹주를 만나기 위해서 화산파를 떠난 그날 밤.
어둠이 내려앉은 언덕 위에 화톳불을 밝힌 일단의 무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위남에서 물러난 무림맹 무인들이었다.
딱히 밤이슬을 피할 막사는 준비되지 않았다. 그저 화톳불에 의지한 채 잠을 청하고 있었다.
수십 개의 화톳불은 주위를 환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은 어두워졌지만, 불침번을 서는 무인들이 장작을 던져 넣으며 어둠을 몰아내었다.
스스스슥.
불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수십, 아니 어쩌면 수백이 넘는 이들이 바닥에 바짝 몸을 숙이고 은밀하게 이동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야행복을 입고 있었다.
기척을 숨기고 은밀히 다가오는 자들이라면 선한 의도를 가진 자들은 아닐 것이다.
무림맹 무인 중 그들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두 지쳐서 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움직임을 모두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청운의 청으로 남아 있던 혈황은 그들의 움직임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
[내자불선 선자불래라 했지…….]
좋은 뜻을 품고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청운은 노자의 선자불변 변자불선(善者不辯 辯者不善)을 응용해서 혈황에게 이야기했었다. 언변이 뛰어난 자를 조심하라는 말이다.
청운의 말대로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자들의 의도는 뻔했다.
혈황은 고개를 돌려서 곤히 잠든 영호천을 보았다.
[네 녀석은 청운이 못지않은 행운아인 줄 알아라.]
스르륵.
혈황의 몸이 바람결에 흩어지듯이 사라졌다.
번쩍!
동시에 곤히 잠들어 있던 영호천이 두 눈을 떴다. 그의 두 눈에서 붉은 혈광이 번쩍였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혈황이 영호천의 몸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혈황은 신법을 펼쳐서 경비무사들 모르게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제일 선두에서 전방을 주시하며 은밀하게 다가오던 흑야대 팔조 조장 장우는 무언가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헉!’
온몸에 털이라는 털은 모조리 곤두섰다.
언제 나타났는지 아무것도 없던 전방에 누군가가 우뚝 서서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고 있었다.
장우는 한 손을 들어서 뒤쪽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그의 신호에 움직이던 자들이 몸을 낮췄다.
‘재수가 없는 놈이군. 이런 먼 곳까지 홀로 나와 있다니.’
장우는 검은색으로 칠한 단검을 꺼내 들고 천천히 하늘을 보고 있는 사내에게 접근했다.
막 그의 지근거리까지 다가갔을 때 청아한 음성이 장우의 귓가를 때렸다.
“옷을 보니 노룡회 놈들이 맞군. 흑야라고 했던가?”
사내는 이들을 마중 나온 혈황이었다.
장우는 자신의 접근을 알아차린 혈황에게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갑자기 이마가 따끔하다는 생각이 들더니 시야가 검게 변했다. 비틀거린 장우는 힘없이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뒤편의 복면인들이 신형을 날렸다.
혈황의 몸 주변에 붉은 기운이 뿜어졌다.
후아악!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 모습에 혈황의 미간이 구겨졌다.
“역시 청운이에 비하면 너무 부족해.”
혈황은 자신이 차지한 영호천의 몸이 청운보다 떨어지는 게 불만이었다.
이 상태로는 운용할 수 있는 혈기의 양이 너무 적었다. 과연 저놈들을 모두 상대할 동안 혈기가 남아날지 의문이 들었다.
영호천의 몸에 혈황신공을 심어놓고 키웠지만, 청운과 처음 만남에서 넘어간 혈기의 양에 비하면 태양과 반딧불의 차이만큼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혈황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흑야대 대원들을 향해서 뛰어들었다.
“어디 한판 놀아볼까?”
* * *
청운은 장안을 그대로 지나쳐서 관중평원에 들어섰다.
그렇게 얼마를 더 달렸을까, 언덕을 하나 넘어서자, 저 앞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족히 백 명은 될 듯했다. 그중에는 말을 타고 있는 자들도 이십 명은 되었다.
‘심상치 않은 자들이군.’
하나같이 기도가 대단한 자들이었다.
특히 몇 명에게서는 멀리서 보는데도 가슴이 답답할 정도의 가공할 기세가 느껴졌다.
천하에 그런 자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청운은 그들이 바로, 자신이 만나려고 하는 사도맹주 일행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런데 청운만 그들을 살피고 있는 게 아니었다.
말을 타고 있던 자들 중에서도 청운을 발견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말머리를 돌려서, 언덕 위에 서 있는 청운 쪽으로 다가왔다.
청운도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말을 타고 있던 자들 중 중앙에 있던 자가 약간 앞으로 나섰다.
엄청난 기도를 지닌 중년 사내였다.
모든 것을 불태울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강인한 턱, 두꺼운 목덜미, 그리고 떡 벌어진 어깨.
그의 전신에서 사위를 짓누르는 살기가 흘러나왔다.
철벽같은 호위를 받으며 청운에게 가까이 다가선 그는 말을 멈춰 세운 후 입을 열었다.
“너는 누구냐?”
조금 전 그는 청운이 백여 장 떨어진 곳에 서 있음에도 예사로운 자가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터였다.
더구나 가까이에서 보니 일반 무림인과는 복장이 조금 달랐다.
그래서 수하들이 나서려는 걸 막고 자신이 나선 것이었다.
“이청운이라 합니다.”
청운은 자신의 이름을 순순히 밝혔다.
중년 사내의 호안에서 광폭한 청광이 번뜩였다.
“네가… 진무사 이청운?”
“맞습니다. 제가 이청운입니다. 혹, 사도맹주님이 아니신지요?”
중 년사내도 순순히 자신이 사도맹주임을 인정했다.
“맞다. 내가 사도맹을 맡고 있는 용천관이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청운이 용천관의 눈길을 정면으로 받고도 흔들림이 없자, 용천관의 좌우에 늘어선 자들의 얼굴에 떠올랐던 조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들 중 용천관의 눈빛을 흔들림 없이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은 두어 명밖에 안 되었다.
그렇다면 결국 이청운이란 자가 자신들보다 약하지 않았다는 뜻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용천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단해. 그 나이에 화경을 이루었다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군.”
“과찬이십니다.”
청운 역시 감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만나본 최강의 고수는 백가장 가주인 백철군이었다.
그런데 철사자 용천관도 백철군에 비해서 손색이 없는 강자였다.
“혹시 나를 찾아온 것인가?”
“예, 그렇습니다.”
“종남과 장안에서 벌어진 일 때문이겠지?”
“예, 맹주. 황제 폐하께서도 무림맹과 사도맹이 전쟁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청운이 순순히 대답하자, 용천관의 얼굴에서 냉기가 풀풀 날렸다.
“어디 자네 생각을 말해보게. 지금 벌어지는 일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게 좋겠는가?”
질문을 던진 용천관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당장 목을 쳐버리기라도 할 것만 같았다.
청운은 사도의 하늘이라는 사도맹주를 앞에 두고도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에 일어난 일에는 상당히 복잡한 내막이 있습니다.”
“복잡한 내막?”
청운은 돌려서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아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무림에 천하를 전복하려는 신비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신비세력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 숨어서 정사대전이 벌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철사자는 눈매를 가늘게 뜨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청운은 예상한 반응이었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이었다.
“노룡회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부터 설명하지요. 그들은…….”
청운은 노룡회와 신혈교에 대해서 자신이 겪은 경험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의 말이 길어지면서 용천관과 사도맹 간부들의 얼굴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일각.
“……그렇게 된 일입니다. 그 후 놈들은 이런저런 흉계를 꾸며서 어떻게든 무림을 혼란으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청운은 핵심적인 사안에 대해 모두 알려주고 말을 맺었다.
용천관이 바위처럼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종남파를 사령회에서 공격한 것처럼 꾸며 무림맹을 움직였단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이미 구혼지마 안겸에서도 말한 터라 굳이 더 자세한 설명은 할 필요가 없었다.
용천관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청운의 말에는 허점이 없었다. 굳이 단 하나의 허점을 꼽자면, 그토록 강한 자들이 어떻게 천하의 눈을 속이고 그리 오랜 세월을 활동할 수 있었겠냐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강호에는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곤 했다.
때로는 현실이 꾸민 이야기보다도 더 괴이할 때가 많았다.
용천관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나이가 지긋하게 든 노인이 마상에 앉아 있었다.
비쩍 마르고 얼굴에 검은 버섯이 핀 노인은 볼품없는 시골 촌노 같았다.
하지만 청운은 그 노인이 바로 사파의 꾀주머니로 이름이 높은 사뇌라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
‘철사자보다 더 엉덩이가 무겁다는 사뇌까지 오다니, 아주 작정하고 나섰구나.’